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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4. 사랑꽃의 즙과 춤추는 요정 (6)


 연회를 마다하고 숙소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던 멘 공작 루이 앙투안은 갑자기 솟아오르는 직감에 벌컥 짜증을 냈다. 또 뭐야. 뭘 빼앗아 가려고. 그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두피에 난 여드름을 건드리는 바람에 펄쩍 뛰어올랐다. 눈물이 쏙 빠지게 아팠다.

그는 낑낑거리며 던져둔 검을 집어 들고 부츠를 꿰어 신었다.

다른 사람에 관련된 직감이라면 그냥 무시했겠지만 마담 라 세르에 대한 것이었다. 앙투안은 지금 그 여자 때문에 이곳에 있었다. 그녀가 잘못 되었다간 그의 소중한 기사단 동기들이 나란히 교수대에 매달려 까마귀 밥이 될 지도 몰랐다.

동료들이 아니더라도 앙투안은 이복형인 세시안에게 빚이 있었다. 리젤로트와 미네트가 그를 경멸했지만 세시안은 달랐다. 그는 앙투안을 오를레앙의 기사단에 넣어주었고, 기사단으로 떠난 다음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지 않게 그의 모후를 설득했다.

이번에도 그 여자가 죽으면 세시안은 정말 다시는 재혼을 못 할지도 모른다.

사생아라는 말을 듣고 예쁘장한 얼굴에 떠오르던 비뚜름한 웃음과 빈정거리는 말투는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앙투안은 구시렁거리며 검 한 자루를 빗겨 차고 숙소를 나갔다. 가슴이 쾅 쾅 울렸다. 빨리! 빨리! 알았어. 알았다고. 그는 점점 빨리 걷다가 그냥 내달렸다.

이윽고 그는 심장에 이끌려 옐레나를 찾았다. 하현달과 그믐의 중간쯤에 있는 손톱 같은 달이 뜬 밤은 두터운 벨벳처럼 보들보들했다. 그런 어둠에 감싸여 서 있는 여자가 있었다. 볼록한 이마에서 날렵한 콧날로 이어져, 인중을 타고 입술과 목선까지 흘러내리는 달빛.

혈기왕성한 젊은이들 사이에서 마담 라 세르의 이국적인 미모는 언제나 화제였다. 거대한 용에게 당당히 맞서는 드센 성격이 평을 깎아내리기에는 그녀의 얼굴이 지나치게 예뻤다. 그들은 주군에 대한 불경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선에서 마담 라 세르와 그 시녀에 대한 수다를 즐겼다.

갑자기 옐레나가 몸을 돌리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알려주었다. 늦지 않게 찾아왔다고. 가슴을 얻어맞은 것처럼 그는 주춤거리며 무릎을 굽혔다.

"그러지 않아도 되오. 멘 공작."

옐레나의 어투는 남쪽의 연음에 익숙해진 앙투안의 귀에는 대단히 딱딱하게 들렸다. 거기다 멘 공작이라니. 동료들은 모두가 그를 앙투안, 혹은 트완이라고 불렀다.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그녀의 머리는 거의 백발로 보였다. 색을 구분할 수 없는 눈동자가 그를 또렷하게 보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도 모를 지경으로 웃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무릎을 폈던가? 아 무릎은 폈구나. 누가 보면 모자란 사람인 줄 알겠다. 앙투안은 땀을 삐질 흘렸다. 그녀는 전형적인 고귀한 여자의 태도로 우아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오?"

그는 변명하듯이 위험하다고, 배행하겠다고 주장했다. 왜 거기서 죽은 여동생의 생각이 났는지. 다 직감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걸어 나갔다. 미끄러지는 것 같은 걸음이었다. 앙투안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곱게 틀어 올린 머리카락 밑으로 크림처럼 부드러울 목덜미가 보였다. 희미하게 빛나는 뽀얀 솜털. 직감은 끝났는데도 잔상이 좀 남았는지 심장이 무거웠다.

"처음부터 따라왔소?"

그 처음부터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는 일단 무조건 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처음은 무슨 처음부터냐. 다시 한 번 여드름을 건드려 소리 없이 뛰어오른 앙투안은 눈물을 매달고 재빨리 옐레나를 따라갔다. 느린 걸음이라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역시 키가 크구나. 다른 여인들과는 눈높이가 달랐다. 착 달라붙는 소매는 군살 없는 매끈한 팔뚝을 그대로 드러냈다. 속치마로 부풀린 치마가 예쁜 선을 그렸다.

그는 유령에게 홀린 청년이라도 된 듯이 옐레나의 뒷모습을 보며 걸었다. 호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옐레나는 큰 나무에 매달린 그네에 사뿐히 앉고는 그를 정면으로 올려다보았다. 눈이 두어 번 깜빡였다.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가 눈부셨다.

그녀는 그가 왜 북쪽 말에 능한지, 공작임을 밝히지 않는지에 대해 물었다. 무조건 싫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올라가 귓불을 한 번 만지작거리고 내려왔다. 웬일인지 그 얼굴에는 딱히 경멸이 스며있지 않았다.

옐레나는 희미하게 웃고는 발을 살짝 굴러 그네를 밀었다. 흔들, 흔들. 마음도 흔들거렸다. 정신 차려, 루이 앙투안. 아무리 예뻐도 이 여자는 유부녀다. 이복형수라고!

이내 옐레나가 던진 질문에 앙투안은 세시안을 떠올리며 죄책감에 몸부림쳐야 했다.

"공작.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소."

"하문하십시오."

"황태자 전하, 그러니까, 세르를 만나본 적이 있소?"

"어릴 적에는 함께 자랐습니다."

"어떤 사람이오?"

 

멘 공작은 말없이 한동안 있었다. 왠지 면구한 얼굴이라 질문을 잘못 했나 싶었다. 하긴. 이복형제라고는 해도 사생아가 적자와 오래 같이 살았을 리 없겠지. 실제로 아롈은 유리예프스카야 남매를 얼마 본 기억이 없었다. 알렉산드르가 나간 이후 아롈이 그들을 황도에서 내쫓아버렸다.

"좋은 분입니다."

맥이 탁 풀리는 바람에, 아롈은 실례되는 걸 알면서도 그만 소리내서 웃어버렸다. 아직은 찬 밤공기에 웃음이 퍼졌다. 아롈은 어깨에 힘을 뺐다.

"좋은 분이시겠지. 리무쟁 공작도, 샤를루아 공작도 그리 말했소. 하지만 내가 듣고 싶은 건 다른 이야기요."

"정말 좋은 분입니다."

그는 약간 다급하게 말했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상냥하고, 이성적이고, 공정하고, 참을성 강한 분입니다."

그리고 그는 좋다는 수식어는 다 한 번씩 돌려가며 이복형을 찬양했다. 황립 오페라단의 각본가라도 되나. 아롈이 듣고 싶은 '정부가 없다'거나 '폭력적이지 않다'거나 '사생아를 둘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다' 같은 말은 당연히 나오지 않았다. 나올 리가 없지.

아롈은 줄줄 흘러나오는 말을 손을 들어 끊었다.

"알겠소. 충분히 알겠소."

"제가 존경하는 분입니다."

미처 마치지 못 해 튀어나온 그 문장에는 아롈이 잠깐 멈칫할 만큼 충분한 무게가 있었다. 취기에 떠밀려 툭 던진 질문에 멘 공작은 훨씬 더한 진지함으로 맞부딪쳐왔다. 아롈을 지켜준답시고 따라온 빨간 머리의 기사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제 진심을 다해 존경하는 분입니다."

아롈은 그 진심에 대고 '남자가 남자를 대할 때와 여자를 대할 때의 태도는 엄연히 다를 수 있다'는 차가운 논리는 들이대지는 않기로 했다. 바람은 부드럽고 뱃속에 들어간 술은 따뜻했다. 그냥 좋은 사람이라니까 믿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만나보고 생각하자. 정말 만나보고.

"경의 진심을 믿어보겠다."

공작이 아닌 경이었다. 앙투안은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롈은 손을 뻗었다.

"돌아가겠다."

아롈은 처음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중에 사생아 따위에게 손을 잡게 했다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아롈이 여태껏 충분히 뾰족하게 대했음에도 호의를 가지고 대답해주었다. 필리프가 말했지. 호의를 사는 게 중요하다고. 앙투안은 손이 무슨 푸딩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정말로 조심스레 잡아끌었다.

완전히 일어서서 한 발자국을 뗀 순간 희미하게 노랫소리가 들렸다.

​"​라​라​라​라​라​라​라​라​.​"​

등골이 쭈뼛 섰다.

요정의 노랫소리는 아닐 테고. 아니, 세상에 용은 있는데 요정은 없을까.

"들리나?"

"예. 들립니다."

"세이렌?"

"여기는 내륙입니다. 전하. 밴시가 아닐까요."

"밴시는 노래가 아니라 울음소리인데. 레쉬?"

"그건 남자 요정입니다."

아롈과 앙투안은 몇 가지 지식을 총동원해서 노래를 부르는 요정에 대한 지식을 나누어보았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요정이 없었다. 섬뜩한 노랫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설마 왕궁에 위험한 요정이 살겠습니까."

"아까 이블린 궁조차 위험하다고 내게 역설한 사람은 경이었다."

"그건. 보이십니까?"

저 풀숲 너머로 언뜻언뜻 불빛과 흰 옷자락이 보였다. 게다가 뱅글뱅글 돌며 점점 가까워졌다. 앙투안은 아롈의 앞으로 나서며 검을 뽑았다. 소름끼치는 소리가 났다. 아롈은 잠깐 몸을 떨었다. 폭력은 질색이었다.

​"​라​라​라​라​라​라​라​라​.​"​

풀숲에서 인영이 툭 튀어나왔다.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흰 옷을 입은 여자는 망측하게도 맨발이었다. 촘촘한 면직물로 된 옷은 침의나 다름없었다. 아롈은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라​라​라​라​라​라​라​라​.​"​

그녀는 앙투안과 아롈을 아랑곳 않고 계속 춤을 추었다. 맨발과 다리는 이미 상처투성이였다. 피가 길게 장딴지부터 발목까지 흐르다 굳어있었다.

앙투안이 물었다.

"누구냐."

움직임이 그대로 멎었다. 그녀는 희극의 한 장면을 박제한 것처럼 춤을 추던 자세대로 손을 높이 올리고 회전하던 그대로 서 있었다. 관절이 제대로 달리지 않은 목각 인형처럼 삐걱삐걱 고개가 돌아갔다.

"나?"

높이 들어 올린 손에 걸린 등불이 달랑거리며 여자의 얼굴에 기묘한 음영을 만들어 냈다. 아롈은 광인 특유의 초점 없는 눈을 보고 술이 다 깼다.

뱀처럼 흘러내린 산발, 속옷이나 다름없는 면옷, 피가 묻어있는 맨발. 그리고 저 눈이.

-비밀은 무덤에 가서 지켜주세요.

유모는 죽었단 말이야!

"전하. 진정하십시오. 유령이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은촛대로 머리를 얻어맞을 것 같았다. 옐레나 파블로브나. 십 년 전의 일이야. 알렉산드르가 도망치기 훨씬 전에 일어난 일. 너는 이제 무력하기만 한 어린 아이가 아니야.

눈물 날 것처럼 두려웠다. 벨타의 앞에서도 이렇게 무섭지는 않았는데. 그 때는 상상을 초월하는 등장에 머리가 멍해져서 그랬던가. 하지만 저 미친 여자는 현실적인 공포였다.

아롈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손수 목걸이를 풀려 애썼다. 목걸이를 하는 데에 딱히 불편함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끈이 뱀처럼 목을 조르는 것 같아 숨을 쉴 수 없었다.

여자는 시간을 아주 느리게 돌린 것처럼 손을 내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자꾸 엇나가던 손이 기어코 걸쇠를 풀어내자 무거운 목걸이가 턱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의 눈이 가만히 땅을 향했다가 앙투안의 얼굴로 움직였다.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그녀는 누렇게 썩은 이가 다 보이도록 크게 웃었다.

"루드비히. 전하의 소식을 전해주러 왔나요?"

틀림없이 미친 여자였다. 앙투안과 루드비히 왕자는 눈곱만큼도 닮은 점이 없었다. 그녀는 혼자 연극 대사를 읊는 배우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빌헬름 전하와 맺어질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잠깐 마음이 변했다고 파혼이라뇨. 사내들이란 다 그런 거라고 루드비히도 얘기했잖아요? 저는 그렇게 아량 없는 여자가 아니랍니다. 전하께서 누굴 좋아하시든 너그럽게 품을 수 있어요."

그녀의 코끝에 달빛이 맺혔다가 사라졌다. 아롈은 그녀의 정체를 금세 추측해 낼 수 있었다. 사실 모르는 것이 더 이상했다.

"빌헬름 '전하'의 약혼녀인가."

그녀는 모든 곳을 보고 있되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더니 자기 손으로 자기 뺨을 탁탁 때렸다.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그녀는 관절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처럼 아롈에게 인사했다.

"그렇답니다. 거기 계신 아름다운 숙녀 분께서 루드비히의 약혼녀인가요? 거봐요! 루드비히. 세상에는 좋은 여자가 많다고 내가 몇 번이나 얘기 했잖아요? 평생 약혼하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그녀는 들뜬 카나리아처럼 떠들어댔다. 아롈은 바로 이름을 하나 떠올렸다. 작센의 하인리히 루돌프. 아롈의 또 다른 사촌. 작센의 루드비히의 쌍둥이. 병사한.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그녀는 맨발을 앞으로 내밀고 꾸벅 절을 했다.

"브라운슈바이크의 마르타예요. 아가씨는?"

코시카의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 혹은 로렌의 마담 라 세르. 여자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난 브라운슈바이크의 마르타야. 아무리 빌헬름이 왕자라고는 해도 나한테 이럴 수는 없어."

신분 높은 여인 특유의 긴 머리칼이, 처녀라는 것을 소리 높여 외치듯 흩어졌다. 그녀는 또 춤을 추기 시작했다. 라라라라라라라. 당장 끊어질 것 같은 목소리와 금방 쓰러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춤. 속치마를 제대로 입지 않았는지 움직일 때마다 치맛자락이 다리에 감기는 모양이 다 보였다. 아롈은 더이상 맨발과 산발, 옷차림에 민망함을 느끼지 못했다. 무덤에서 썩고 있어야 할 시체가 기어 나온 것 같았다.

아까는 어떻게 사람이라고 확신했을까. 너무 말라서 꼭 해골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언뜻언뜻 보이는 발목도 너무 말라서 색정적인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디서 쓰고 왔는지 머리 위에는 엉성하게 얽은 화관이 얹혀 있었다. 현실감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르타는 낫을 든 사신을 상대하는 듯이 춤췄다. 그녀는 영혼도 육체도 죽어버린 듯이 보였다.

​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슬프게도 아롈은 그녀가 지나치게 친절하게 던진 몇 마디를 가지고 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국과 린넨부르크 공국을 다스리는 비텔스바흐는 대대로 이어오는 정신병으로 이름 있는 가문이었다. 어여쁜 얼굴, 그리고 그 뒷면에 스며있는 광기는 아롈이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춤을 추고 있는 마르타의 얼굴은 볼이 푹 패이고 눈이 퀭해서 아름다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지만.

마르타는 또 다시 춤을 딱 멈췄다.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대체 그 말이 몇 번째인가. 앙투안은 아예 들고 있던 검을 꽂아 넣었다. 그도 완전히 질려 있었다.

"그래서 하인리히는 하노버 공녀와 잘 지내요? 그래, 하인리히. 하인리히. 하인리히. 하인리히. 하인리히. 빌헬미네, 빌헬름, 하인리히."

그녀는 갑자기 미친듯이 몇 개의 이름을 부르더니 아롈을 텅 빈 눈으로 쳐다보았다.

"빌헬미네, 죽여버릴 ​거​야​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귀청이 찢어질 것 같이 높은 비명이었다. 마르타는 악귀처럼 달려들었다. 앙투안이 아롈의 앞을 가로막으며 여인의 손목을 비틀어 꺾고 그녀를 땅에 무릎 꿇렸다. 그녀의 손에서 칼이 떨어지는 것과 함께 비명을 다 뿜어낸 고개가 픽 떨어졌다. 아롈은 멍청하게 칼날이 반짝이는 걸 쳐다보았다. 생선을 써는 것으로 보이는 크기의, 은제 칼이었다. 손잡이에는 작센의 상징인 곰 머리가 달려 있었다.

"전하. 물러서십시오."

아롈은 얌전히 물러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앙투안은 마르타를 제압한 손을 풀지 않은 채 왼손으로 맥을 짚었다.

"살아 있소?"

"예. 숨이 붙어있습니다."

아롈은 마침 옆에 있는 그네에 털썩 주저앉았다. 음료의 탈을 쓴 술이 모든 것의 원흉이었다. 갑자기 잠에서 깬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다시 한 번 깊이 반성해야겠다. 아롈은 무력한 여자에게 찔려죽을 뻔했다. 뒤늦게 비명을 들었는지 저 멀리서 근위병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왕자비 전하!"

 

요새 꿈이 계속 생생하기만 했다. 낮잠만 잠시 자도 꿈을 꾸었다. 그가 손재주가 있는 천한 환쟁이였다면 손에 물감을 묻혀 그대로 그릴 수 있을 만큼 선명한 광경들이 내내 펼쳐졌다.

그는 그 풍경 속에 서서 가만히, 마치 '오를레앙의 마르그리트 안 앙리에트'를 기다리는 듯이 있다가 꿈에서 깨곤 했다. 이상하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딱 두 번 나와 놓고는 다시는 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귀족연감을 뒤지자 분명 그 곳에 이름이 있긴 했다. 어째서 세르인 그가 대공녀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을까. 당장이라도 오를레앙 대공에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하필 대공과 대공비는 루이즈 안 대공녀의 결혼식 때문에 오를레앙 대공령에 가 있었다. 궁금증을 풀 수 없자 미칠 것 같았다.

사막, 호수, 구름 위, 초원.

그가 상상해 본 적도 없는 풍경들 속에서 그는 결심했다.

블루아에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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