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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4. 사랑꽃의 즙과 춤추는 요정 (8)


 깜빡 잠이 들었나보다. 아롈은 간만에 악몽의 여운 없이 눈을 떴다.

익히 들어왔던,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숙취는 없었다. 속이 조금 울렁일 뿐이었다. 아롈은 옆으로 돌아누웠다. 조피는 아롈의 머리칼을 한 움큼 쥔 채 세상모르고 곤히 자고 있었다. 밤새 잘라가지 않은 게 용하다 싶어 쓴웃음이 나왔다.

아롈 같았으면 옆에서 뒤척이면 바로 깼을 텐데. 쌔근쌔근 내쉬는 숨이 따뜻했다. 살아 숨쉬는 따스한 생명이 옆에서 자고 있는 경험은 대단히 낯선 것이었다. 알렉산드르조차도 아롈과 한 침대에서 잠든 적이 없었다.

흰 시트 위에는 레몬색 머리카락과 회색 머리칼이 여명처럼 뒤엉켜 있었다. 조피의 할머니인 옐리자베타 여대공도 아롈처럼 머리칼과 홍채의 색이 옅은 사람이었다. 조피는 그걸 물려받았다.

말하자면 혈통이다.

앤 마리아 폰 레르헨펠트는 첫째 고모의 손녀, 작센의 조피 도로테아 루도비카는 둘째 고모의 손녀. 둘 다 아롈의 오촌 조카 되는데도 유독 조피에게 관대하게 되는 것은 피를 이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아님 그냥 어려서 그렇거나.

하지만 아무리 귀여워해줘도 거기까지다. 아롈은 이제 떠나고 아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다시는 얼굴을 볼 일이 없을 것이다. 편지로나 왕래하면 다행이겠지. 하지만 조피는 금세 클 테고 다른 나라로 시집가서 살 테니 어릴 적 만난 당고모의 얼굴 따위는 금방 잊어버릴 것이다. 가문을 위한 결혼은 전하라고 불릴 수 있는 여자들의 숙명이었다. 아롈이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길.

"키예나의 피에 내려오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각성하는 사람은 이제 와서는 거의 없지만 태고로부터 내려오는 마법사의 혈통, 간혹 나타나는 색소부족증, 천한 핏줄을 애호하거나 극단적으로 호색하는 피.

모두 그리 좋지만은 않은 것들이었다.

"그래도 정신병자의 가문보다는 나을 것이다."

앤이 말해준 '소문', 아마 진실에 가까울 그 이야기들은 핏줄에 딸려 내려오는 지긋지긋한 비극이었다.

죽은 작센의 선왕, 카를 1세 아우구스트는 뼛속 깊이 열등감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작해야 공작, 그것도 산산이 갈라진 상속으로 마을 두 개 밖에 갖지 못한 허울뿐인 공작 전하.

친척들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서 작센의 영토는 점점 뭉쳐갈 것이 보였다. 조금만 기다리면, 십여 년만 기다리면 어마어마한 작센 분가의 영토가 아우구스트의 것이 되리라는 것은 누가 봐도 확연했다. 이반 3세는 그것을 노리고 자신의 어린 딸을 그와 결혼시켰다. 옐리자베타 여대공. 시집간 뒤 엘리자베트 공작부인으로 불렸던 그녀는 장자인 빌헬름, 다음 해에 하인리히와 루드비히 쌍둥이를 연이어 낳고는 일 년 뒤 세상을 떴다. 아우구스트가 아직 공작일 시절의 일이라 그녀의 작위는 공작부인으로 남았다.

그가 작센의 카를 1세 아우구스트 초대 국왕으로 즉위한 다음 브라운슈바이크의 아말리에가 왕비로서 대관했다. 아말리에 왕비는 양아들과 조카를 결혼시키고 싶어 했다. 그녀의 조카인 브라운슈바이크의 마르타는 생기 넘치는 아름다운 소녀였고 의붓사촌인 빌헬름과도 어렸을 때부터 친근한 사이였다. 빌헬름은 마르타와, 하인리히는 하노버의 빌헬미네와 약혼했다. 하인리히의 쌍둥이 동생인 루드비히가 저는 약혼하지 않겠노라 뻗대는 것만 빼면 나름대로 잘 돌아갔다고 했다.

살얼음 같이 위태했던 행복을 깨부순 것은 비텔스바흐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정신분열증이었다. 그 가문은 꽤나 오랫동안 브라운슈바이크를 다스리고 있었으며, 한 때는 교황을 배출한 적도 있는 선제후 가문이었다. 키예나만은 못 해도 꽤나 유서 깊은 가문으로, 오랜 사촌간의 결합은 그들의 피를 짙게 만들었으되 그 진득한 혈통에 스며든 것은 치욕스러운 정신병이었다.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며 약간의 허영심으로 콧대를 세울 뿐 선량하던 왕비가 시녀들에게 히스테리를 부릴 때까지만 해도 다들 그냥 예민해졌다 생각하려고 애썼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신경질을 내는 주기는 점점 짧아졌고, 또 정도도 심해졌다. 어느덧 만찬에서 갑자기 옷을 제 손으로 찢고 날뛰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말리에 왕비는 미쳤다고.

당연하게도 마르타와의 파혼이 거론되었다. 미친 여자가 초대 왕비 자리에 올라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욕은 충분했다. 미칠지도 모르는 여자를 또다시 옥좌에 올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작센은 주변국에서 주먹에 입이 달린 왕과 나체의 왕비가 다스리는 나라라는 조롱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파혼이 그렇게 쉬울 리도 없었다. 브라운슈바이크는 작센의 코앞에 있는 공국이었다. 작센이 왕국으로 불린 지 채 이십 년도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브라운슈바이크와 하노버는 각기 자신의 공녀를 왕자비로 삼는 조건으로 우방이 되었다.

결국 빌헬름은 마르타와의 약혼을 포기하고 동생의 약혼녀인 하노버의 빌헬미네를 선택했다. 하노버 공국에 결혼할 수 있는 공녀가 빌헬미네 뿐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다. 정략적인 관첨에서 봤을 때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사자에게는 다른 문제였다.

이미 마르타는 빌헬름을, 하인리히는 빌헬미네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강제로 개를 접붙이듯 하인리히와 마르타가 짝지어졌다. 서로 상처를 핥아주길 기대하기로 한 걸까. 아롈은 혀를 찼다.

마르타는 천성이 상냥한 소녀로, 예비 시동생으로만 생각했던 하인리히에게 마음을 붙이려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배신한 형과 그 손을 잡고 행복한 가정을 꾸린 빌헬미네에게 기나긴 편지를 남기고 도망쳤다. 그리고 시내에서 불량배에게 살해당했다.

분명 병사로 알고 있었건만 쉬쉬하면서 숨긴 모양이다. 아롈이 동년배라면 모를 리가 없었겠지. 하지만 당시 아롈은 키예프 공국에 있었다.

실려 온 시체를 본 마르타는 그대로 미쳤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시체를 본다고 해서 정신을 놓아버리지는 않는다. 크나큰 상흔이 남긴 할지언정 극복할 수는 있었다. 아롈도 그랬다.

그러나 마르타에게는 혈통으로 전해 받은 정신병의 뇌관이 있었고, 연이은 파혼과 약혼, 약혼자 이전에 사람으로 좋아했던 하인리히의 죽음에 정신이 쇠약해져 있었다.

빌헬미네가 임신한 것을 안 마르타는 원망에 시달리고 죄책감에 몸부림쳤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놓았다. 한 때 사랑했던 남자에게 복수할 만한 강단도, 하인리히를 잊어버릴만한 무심함도 없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울다가, 빌헬름에게 보여주겠다 연습하던 춤을 추다가 웃었다.

그런 그녀를 브라운슈바이크에 돌려보내지 않고 결혼한 것은 놀랍게도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 선언했던 루드비히였다. 그는 지금도 하인리히인 척 마르타를 달랜다고 했다. 모두 꿈이라고. 그냥 잊으라고. 자신은 죽지 않았다고.

한 편의 훌륭한 치정극이었다. 현실이 아니라 연극이었다면 말이지만.

아롈은 조피의 뺨을 쓸어내렸다.

안타깝게도 이 가족도 아롈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그런 가족은 아니었다. 실망감은 파편이 되어 가슴에 박혔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피는 우웅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눈에 졸음이 가득했다.

"당고모님?"

"그래."

사실 빌헬름과 빌헬미네가 잘못한 것은 정략에 따라 결혼한 것, 딱 한 가지였다. 빌헬름은 하인리히를 찔러 죽이지 않았고, 가출하라고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고, 빌헬미네가 마르타를 미치게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편하게 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네 부모가 무슨 죄를 지었든 간에, 무슨 죄책감을 가지고 있든 간에, 어떤 과정을 거쳐 너를 낳았든 간에, 너에게는 죄가 없다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사생아를 경멸할 권리가 없어진다. 그들이라고 원해서 정부를 어미로 두고 태어났을까. 하지만 사생아로 태어나 사람에게 상처를 준 원죄가 가벼울까.

아롈은 한숨을 쉬었다.

"너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으응? 리카가 뭐 잘못 했어요?"

잠이 솔솔 얹힌 얼굴인데도, 용케 들었나보다. 말한 아롈도 거의 듣지 못 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는데.

"아니다."

아롈은 웃었다.

"조금 더 자거라."

 

아롈은 아침에 국왕 부처와 함께 차를 마시는 자리를 가졌다. 프리드리히 1세와 빌헬미네 왕비는 안절부절을 못 하면서도 차마 먼저 말을 꺼내지는 못 했다. 아롈은 말없이 웃고 있는 필리프를 보고 찻물을 넘겼다. 그래, 주제를 알아야지. 아롈은 이제 후계자도 뭣도 아니었다. 미셸이 항의를 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겠지만 아롈이 나서 항의를 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도 그들이 눈앞에서 있는 건 견디기 힘들었다. 한 사람을 죽이고, 한 사람을 미치게 해놓곤.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핀 꽃처럼 고운 애정.

그러나 아롈은 끝까지 자리를 지켜냈다. 가만히 웃으며 대화를 하고, 차를 뱃속으로 밀어 넣었다. 처음에는 슬슬 눈치를 보던 빌헬미네 왕비는 아무 것도 못 봤다는 듯한 아롈의 태도에 곧 평온을 찾았다. 꿈꾸는 듯한 처진 눈이 생긋 미소를 머금는 모습은 더 이상 고와보이지 않았다.

사랑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이미 알고 있던 일을 다시금 실감하게 해주었다. 쓰디쓴 진실이었다.

아렐은 머랭을 하나 집어먹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이 단맛만큼은 거짓이 아니겠지.

 

티타임을 마치고 나오는 길목에서 루드비히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롈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 이글거리는 눈만은 여전했다.

"잠시 시간을 내어주시지요, 비전하."

"그대는 근신을 명받지 않았나. 어떻게 여기 있지?"

"저는 이곳의 왕자입니다."

근위병을 구워삶았다는 소리였다. 아롈은 미셸과 필리프를 떼어두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특히나 주먹다짐을 직접 본 미셸은 따라붙겠다고 우겨댔다. 아롈은 타협을 봐서 근처에서 오를레앙 기사들이 보고 있는 것으로 하고 정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롈은 마르타를 목격했던 곳에 있는 그네에 앉았다. 그리고 대놓고 존대마저 치워버린 채 이죽거렸다.

"그래. 그대는 약혼자를 빼앗아가는 '키예나'의 피를 받은 작센의 왕자였지. 나는 옐레나 파블로브나 키예나고."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 죽기 직전까지 나이 어린 정부를 끼고 있던 이반 3세는 물론이거니와 증조모였던 안나 여제도 사내를 밝히기로 유명했다. 약혼자가 있건 없건, 유부남이건 아니건 잘생긴 사내를 침실로 끌어들였다. 그랬던 그녀가 후대에 와서 마녀 취급을 받지 않는 것은 웨데나를 쳐부순 공이 큰 데다, 그 공을 깎아내릴 큰 실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시기를."

"내 용서가 필요했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무례하게 굴지 말았어야지. 어차피 내일 내가 떠나면 다시는 볼 일 없는 사이잖나. 사촌이라고는 해도 지금껏 편지 한 번 교환해 본 적 없는 사이고."

그는 이를 아드득 물었다. 아롈은 그넷줄을 꼭 쥐었다. 폭력은 주로 대물림된다. 아롈은 육체적으로는 남자와 상대할 수 없이 연약한 여자였고, 그나마도 단련을 그만둔 지 한참이었다.

"왕자, 한 대 칠건가?"

아롈은 곧바로 도발이 너무 강했나 후회했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성질을 억누르는데 성공한 것 같았다. 굵은 목에 선 핏대가 울렁거렸다.

"제 아내를 못 본 척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본적인 예의를 지켰을 뿐이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떠들고 다니지 않을 것. 말하지 않겠다는 앤을 다그쳐 이야기를 들어놓고 이런 공치사를 하는 것이 불편했지만 지는 건 더 싫었다. 아롈은 허리를 폈다.

"그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는 자들을 지겹게 겪었습니다. 감사하다고 할 때 감사를 받아주시지요."

아무리 봐도 말하는 본새가 건방지다.

"그 말인즉슨 작센을 떠나서도 브라운슈바이크의 마르타에 대해서는 입도 달싹하지 말라는 뜻인가?"

"예."

"과연."

필리프에게 굽혔던 자신이 생각났다. 결국 루드비히는 아롈에게 바라는 것이 있어서 참고 있는 것이다. 아롈은 필리프처럼 말을 빙빙 돌리는 화법은 질색이었다.

"알았네."

"맹세를 해주십시오."

어지간히 각오하고 있었던 아롈도 기가 찼다.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나? 왕자는 나보다 지위가 낮네. 나이가 반토막인 내가 이렇게 왕자에게 하대를 해도 될 만큼. 지위가 높은 자에게 맹세를 강요하다니."

"제 건방짐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훈계하고 뒷말을 생산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마르타는 안 된다?"

"예."

아롈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친 여자 어쩌고 하는 걸 떠들고 다닐 생각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가 나를 칼로 찌르려 했다는 건 아는 건가?"

루드비히는 입을 다물었다.

"클라리 경에게 물어보면 알걸세. 그녀는 산책하고 있는 나를 습격하여, 빌헬미네라고 외치며 칼로 찌르려 들었지. 왕자는 알겠지. 내가 이 사실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는지."

아롈은 너무 많은 말을 했나 잠시 후회했다. 그리고 잠시 후 놀라운 것을 보았다.

루드비히는 머뭇거리며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어린 아이와 눈을 마주치려는 행동도 아니고, 충성심의 표현도 아니고, 천한 자가 귀한 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청했다.

"비밀로 해주시길 청합니다."

아롈은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도대체가. 그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부디, 선처해 주십시오."

한숨만이 나왔다. 여러 가지의 계산이 머릿속에 오가다가 지워졌다. 하다못해 이 건을 끄집어낸다면 앤에게 공작위를 돌려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알았네. 입도 달싹하지 않겠다곤 말 못 해도 내가 먼저 말을 꺼내거나 굳이 불행을 끄집어내어 나불거릴 일은 없을 걸세. 내가 태어날 때 받은 이콘에 대고 맹세하지."

성화나 성물에 대고 맹세하는 것은 꽤나 전통적인 맹세 방법이었다. 가문의 이름, 자신의 이름, 혹은 고귀한 명예에 걸고 맹세하는 것은 아무리 깨질 일이 없어도 좀처럼 피하려고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루드비히는 곧바로 인사를 하고는 아롈을 두고 사라지려 했다.

"왕자."

그는 별 수 없이 멈춰 섰다.

"왕자는 왜 나를 미워하지?"

 

형의 약혼녀에게 마음이 끌렸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루드비히의 비밀이었다. 성서에서도 말하지 않았던가.

형수나 제수를 데리고 사는 것은 이 또한 역겨운 짓이다. 그 역시 자식을 보지 못 하리라.

마르타는 의붓어머니의 조카였다. 루드비히의 어머니-고 엘리자베트 공작부인은 루드비히를 낳고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났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머니보다는 아말리에 왕비가 진짜 어머니 같았다. 그래서 마르타는 정말 피가 이어진 사촌들과 왕래하듯이 가끔 작센을 방문했다.

빌헬름은 바쁠 때가 많았기 때문에 주로 손님 대접은 루드비히가 하곤 했다. 그는 새처럼 지저귀는 마르타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나긋나긋하게 휘어지는 눈웃음과 별똥별처럼 부서지는 웃음도 좋았다.

-있잖아요, 루드비히는 언제 약혼해요?

방글방글 웃으며 속을 긁어댈 때마다 그는 화도 내지 못 했다.

-하인리히도 이미 약혼 했잖아요? 언제까지나 혼자서 살 수만은 없잖아요?

-나는 평생 결혼 하지 않고 살 거야.

-어머나, 왜요? 결혼은 좋은 거예요!

-정략으로 맺는 결혼 같은 건 아무 의미도 없어.

-불과 몇 백 년 전까지만 해도 부부 간에 사랑을 하는 건 더러운 일로 여겨졌잖아요? 그래도 다들 잘 살았어요.

-그래서 나보고 남들처럼 그냥 씨 뿌리는 종마처럼 살다 죽으란 말이야?

이기적이기는. 자기는 그렇게 행복해 죽을 것 같다는 얼굴을 하고선 누가 누구에게 뭐라고 하는 거야? 그런 뜻이 아닌 걸 알면서 왜 그러냐고 웃는 마르타에게 루드비히는 침을 뱉듯이 말했다.

-나는 내 부인을 내 어머니처럼 살게 하기 싫어.

-네? 아말리에 폐하께서 왜요?

아말리에 왕비는 허영심 때문에 조금 사치스러운 소비 행태를 보이는 것 말고는 그냥저냥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왕비였다. 하지만 루드비히가 말한 어머니는 아말리에가 아니었다.

-엘리자베트 공작부인 말이야. 아내를 때리는 피는 내 몸에도 흐르고 있거든.

툭 튀어나온 말에 루드비히 자신이 더 놀랐다. 아내를 때리는 피라니. 아버지와 사이가 데면데면하긴 했지만 별로 그런 생각은 하지 못 했다. 친모가 아버지에게 맞고 살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데리고 온 유모가 울면서 형에게 애원하는 것을 들었으니까.

전하의 복수를 해주세요, 왕자님. 차라리 외조부인 코시카 황제에게 가서 탄원하는 게 좀 더 빠르지 않았을까?

마르타의 눈이 커졌다. 선한 사슴 같은 눈이 금세 젖어들었다.

-세상에.

아냐. 그런 소리를 듣고 울어버리지 마. 그냥 너를 떼어버리고 싶어서 아무 의미 없이 지껄인 말이라고.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든 나는 아무런 감흥도 없단 말이다.

마르타는 루드비히의 손을 마주잡았다.

-루드비히. 그런 생각 하지 말아요. 대를 이어오는 불행은 끊을 수 있어요. 사람의 노력으로 그만 둘 수 있단 말이에요.

그 위로가 마르타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이라는 것은 그 때 미처 몰랐다. 마르타는 올곧은 소녀였다. 상냥하고, 강인하고, 다른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소녀. 아말리에 왕비가 대를 이어오는 정신병에 젖어들어 미쳐버렸을 때, 루드비히는 비웃을 힘도 없었다.

빌헬름이 마르타와 파혼하고, 왕위에 올라 빌헬미네와 함께 대관식을 치르는 걸 보면서도 그녀는 애써 웃으며 행복하게 살라며 축복을 해 줄 정도로 투명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마르타와 하인리히의 약혼이 맺어졌을 때, 마르타는 루드비히의 형수이자 제수가 되었다. 마르타는 똑같이 실의에 빠진 하인리히를 위로해주려 애썼다.

그래서 말 할 수 없었다.

형님 폐하도 하인리히도 버려. 나와 결혼해. 그러면 아껴줄게. 어머니처럼 죽게 하지는 않을게. 아말리에 폐하는 잊어. 너만은 다를 거야. 사람의 의지로 불행을 끊을 수 있다고 말했잖아. 같이 노력하자.

하인리히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닐까 생각했다. 설마 쌍둥이 동생이 빌헬미네 왕비를 납치해서 도주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시체, 자신과 똑같은 얼굴이 밀랍인형처럼 창백한 시체가 되어 누워있는 모습은 루드비히가 봐도 섬뜩했다. 마르타는 그 시체를 보자마자 기절했다. 그리고 깨어난 그녀는 루드비히를 보고 생글생글 웃었다.

-루드비히. 왔어요?

-마르타.

-벌써 올린 지 한 달이나 된 결혼식을 아직도 생각해요. 정말 꿈 같아요.

마르타는 아직 결혼식을 올린 적이 없었다. 그녀는 결혼식이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웠는지 멍한 눈으로 묘사했다. 부드러운 상아색의 옷, 머리에 씌워진 왕관, 곳곳에 장식된 꽃들과 장엄한 스테인드글라스. 추기경의 법복이 얼마나 예쁜 진홍색이었는지에 대해서.

-하노버 공녀도 내 결혼식에 왔던가요? 내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못 본 것 같아요.

루드비히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 때 마르타는 열여섯이었다. 그리고 그네에 -벌써 올린 지 한 달이나 된 결혼식을 아직도 생각해요. 정말 꿈 같아요.

마르타는 아직 결혼식을 올린 적이 없었다. 그녀는 결혼식이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웠는지 멍한 눈으로 묘사했다. 부드러운 상아색의 옷, 머리에 씌워진 왕관, 곳곳에 장식된 꽃들과 장엄한 스테인드글라스. 추기경의 법복이 얼마나 예쁜 진홍색이었는지에 대해서.

-하노버 공녀도 내 결혼식에 왔던가요? 내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못 본 것 같아요.

루드비히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 때 마르타는 열여섯이었다. 그리고 그네에 앉아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녀도 열여섯이라고 들었다.

"왜 미워하냐고 하셨습니까?"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미 증오하고 있지 않았나? 내게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려는 건 아니겠지."

"사람을 싫어하는 데에 이유가 필요합니까?"

사람을 좋아하는 데에 이유가 필요없듯이. 대체 왜 그랬을까. 처음부터 그런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너덜너덜해지지 않았을 텐데. 이 세상에 많고 많은 여인들 중 왜 하필 마르타였을까.

사랑은 다 타올라 없어졌고, 정이 붙을 시간도 없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어린 시절에 마르타가 남긴 한 줌의 상냥함 뿐이었다. 결국 그 하나를 잊지 못 해 평생 낫지 못할 광인을 수발들어야 하는 삶이 지겨웠다.

"왕자."

그런데 그가, 마르타가 감히 꿈꿀 수조차 없는 건강한 몸과 영혼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뭐라고 그렇게 재미없다는 눈을 하고 있지?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 혼자 서 있는 '사촌'을 봤을 때, 그는 화가 났다. 흠 하나 없는 어여쁜 인형처럼 꾸미고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

마르타에게 그 시간을 돌려준다면 훨씬 행복했을 것이다. 상냥하고 착한 소녀였던, 지금은 해골처럼 말라 나이 먹어가는 그녀에게 젊음과 생명을 돌려준다면!

그는 가면처럼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오신다는 이유로 마르타를 탑에 가둬두었습니다. 그 때문에 기분이 나빴을 뿐입니다. 마르타는 원래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는 것을 즐겼는데, 갇혀서 우는 게 싫어서, 제가."

그러나 옐레나는 그의 대답을 끊고 찔러 들어왔다.

"왕자의 증오를 내게 떠넘기려 하지 말게."

바람이 불었다.

그네가 매달려 있는 가지에 돋은 나뭇잎이 서로 맞부딪혔다. 옐레나의 목덜미에 흘러내린 잔머리 몇 가닥이 흩날렸다. 그녀는 새순처럼 연약한 녹색 홍채에 또렷한 빛을 담고 또박또박 말했다.

"착각하지 말아주게. 그녀가 미친 건 내 탓이 아닐세. 내가 지금 당장 죽어준다고 해도 마르타 공녀는 죽을 때까지 미친 그대로일 걸세."

옐레나는 자기는 프리드리히 1세의 선택에도, 빌헬미네 왕비의 선택에도, 하인리히 왕자의 멍청한 선택에도, 하다못해 마르타의 혈통에도 일말의 관계도 없다고 쏘아붙이곤, 흰 소매를 흔들며 사라졌다.

 

루이 오귀스트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성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시골 마을과 작은 저택이 있었다. 그는 문지기도 없는 저택의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미친 놈이 아닐까 하는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얼마 기다리지 않았다.

문을 열자 구부정한 노파가 나왔다. 루이 오귀스트는 찾는 이의 이름을 말하고 잠시 긴장했다. 설마 이 노파가 자신이 마르그리트라고 주장하든가, 아니면 그런 사람은 이 곳에 없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노파는 기쁨에 가득 찬 목소리로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질렀다.

아가씨! 아가씨, 나와보세요!

잠시 후 우당탕탕 소리가 들렸다. 노파는 그를 응접실로 이끌어 차와 과일을 대접했다. 그는 정말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차가 식어 목구멍을 시원하게 식힐 무렵,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루이 오귀스트는 간만에 나타난 추녀를 보고 폭소했다. 아무리 해도 저건 너무 심하잖은가. 머리에 깃털을 가득 단데다가 옷은 한 백 년 묵은 것 같았다. 더군다나 얼굴색과 어울리지도 않는 남색에, 연극배우처럼 잔뜩 분칠하고 입술만 빨갛게 칠해놓다니.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기품이 아니었다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으리라. 배를 잡고 웃어대는 그를 보고, 추녀는 울상을 지었다.

-그렇게 이상해요?

-이상하다마다.

그는 눈물을 닦으며 마르그리트의 머리에 꽂힌 깃털을 손수 빼냈다. 옷은 그렇게 입는 것이 아니고, 화장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세세한 것을 떠나 전체적으로 웃겼다.

-다음에는 좀 낫게 입고 와라. 이블린에 오면 옷이라도 내려줄 테니.

다음에는. 만남이 이어질 것을 전제하는 말이었다. 마르그리트의 얼굴이 어리둥절해졌다.

-대신 돌려받을 것이 있는데.

그리고 그는 추녀의 입술을 있는 힘껏 물어뜯었다. 그래, 남녀간의 일은 식장 안에 들어설 때까지는 정말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자신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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