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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5. 붉은 올가미, 푸른 가위 (2)


 키예프 공국에서 돌아온 옐레나 여대공이 정신이 이상하다는 소문은 이미 황궁 전체에 파다했다. 벌써 다섯 살 생일이 지났는데도 소녀는 말을 못 한다고 했다. 어머니를 닮은 예쁜 얼굴로 가만히 사람을 쳐다보다가 아무 소리도 않고 고개를 돌리곤 한다고.

이반 3세는 애초에 그녀가 '손녀'라는 사실 때문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파블 대공은 대공비가 마흔이 넘자 일주일에 두 번 의무적으로 찾던 정비의 침실을 멀리 하고 마리야의 어머니와 붙어살았다. 옐레나 대공비도 딸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다시 찾지 않았기 때문에 소녀를 강제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소녀는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마리야 파블로브나는 그런 모든 이야기들을 오라비로부터 전해 들었다. 벌써 스물이 지난 지도 삼 년이 넘은 큰 오라비 표트르는 막내인 마리야를 붙들고 다른 이들의 험담을 하는 것을 즐겼다.

누구는 이렇고, 누구는 저렇고.

그 험담은 항상 옐레나 대공비와 알렉산드르 대공과, 죽은 이반 대공에 대한 이야기로 끝났다. 아직 어리기만 한 마리야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키예나가 아니라 유리예프스카야인 게 뭐가 어때서?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오라비의 소매를 당기며 물으면 항상 머리를 쓰다듬으며 쓰게 웃었다. 네가 그걸 몰랐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마리야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금세 잊어버리고 잘생긴 아버지의 뺨을 꼬집으며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그 날도 마리야는 황궁의 정원에서 둘째 오라비인 알렉세이와 같이 공놀이를 하는 중이었다. 유리예프스키는 아주 작은 공국으로 세력이 그리 크지도 않았지만 황실의 모두가 그들 남매가 파블 대공의 자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 오히려 옐레나 대공비가 그들에게는 관대하게 굴었기 때문에 다들 암묵적으로 그들이 황궁의 방을 차지하고 들어앉은 것을 용인했다.

"료샤!"

"미안, 미안. 마샤가 주워와!"

비단을 꿰매고 그 안에 솜을 채워 만든 공은 너무 가벼워서 마리야의 머리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아이는 발을 쾅쾅 구르고는 뒤로 돌아 공을 주우러 달려갔다. 공을 놓친 사람이 공을 주워오는 것이 그들 남매의 규칙이었다.

수를 놓은 모자를 푹 눌러쓴 아래로 긴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바람 때문에 귀가 시려서 손으로 귀를 폭 눌러쓰고 자꾸만 굴러가는 새빨간 공을 따라 달리던 마리야는 반사적으로 날아오는 공을 가슴에 받아 안았다.

공을 던져준 것은 갈색 머리의 소녀였고, 그 옆에는 새하얀 아이가 서 있었다. 볼도 발그레하고 입술도 빨간 마리야와는 달리 뺨에도 홍조가 거의 없고 입술에도 색이 없었다.

마리야는 그 아이가 바로 표트르가 그렇게도 잘근잘근 씹어대던 '정신병자인 여대공'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 했다. 마리야는 방글방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

갈색 머리의 아이는 흰 아이를 계속 끌고 가려고 했지만 흰 아이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손을 떼어놓았다.

"됐어, 놔라. 제냐."

목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잔뜩 쉬어버린, 아주 작아진 목구멍으로 간신히 내뱉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였다. 마리야보다 몸이 작은 아이는 제 손목을 주무르며 아래를 보다가 마리야를 쳐다보았다.

눈이 부신지 살짝 찌푸린 얼굴도 예뻤다. 흰 모자며 망토가 꼭 눈의 정령 같았다.

"마샤!"

허겁지겁 알렉세이가 달려와서 마리야를 잡아끌었다.

"가자."

"어? 하지만 인사해야지. 아직 이름도 못 들었단 말이야."

"됐으니까 빨리!"

마리야는 질질 끌려가면서도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계속 마리야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롈은 진창에 처박힌 기분을 수습하지 못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말을 타면서도 마리야의 말을 곱씹었다. 짜증이 났다.

마리야와 기분 나쁜 조우 이후, 아롈은 씩씩거리며 미셸의 방에 찾아가 '그 여자'를 쫓아내라고 명령했다. 당연히 그게 이루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미셸은 아롈에게는 특별히 상냥했다. 아롈의 부탁에 의해 아롈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로렌에 숨겨주겠다고 흔쾌히 맹세했고, 작센의 마르타에 대한 일을 외교적으로 문제 삼을 때 그녀가 아롈을 찌르려고 했다는 사실은 빼기로 했다. 물론 그가 그 사실을 알고 앙투안에게 화를 많이 내긴 했지만, 결국은 아롈의 뜻대로 해주었다.

그러나 정말 어이 없게도, 미셸은 그를 거부했다. 힘 없는 숙녀가 도움을 청해온 이상 당연히 돕는 것이 기사의 도리라고 오히려 소리 높여 아롈을 설득하려 들었다. 언제부터 사생아 따위가 숙녀라고 불릴 수 있게 되었단 말인가. 그러나 아롈은 고래고래 분노를 토하기 전에, 제가 밟고 선 이 땅이 사생아에게 정식 계승권을 주기도 하는 발정난 동네임을 용케 기억해낼 수 있었다.

미셸의 잘생긴 얼굴은 신념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롈이 보기에는 대단히 구식인 사고방식이었지만.

아롈은 빠르게 계산하고 설득을 하는 편으로 돌아섰다. 그 여자의 신원도 모르지 않느냐, 대체 무슨 사정인지도 모르지 않느냐, 어떻게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는 여자를 자신의 근처에 두게 할 수 있느냐. 모든 것이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사실 식사에 독이라도 탈 지 누가 아는가.

그러나 미셸은 마리야가 아롈을 '아롈'이라고 불렀고, 아롈이 '여전히' 주제를 모르는구나, 라고 내뱉었던 것을 담담히 지적했다. 입을 찧고 싶었다. 사생아 따위가 뭐라고 나불대건간에 재빨리 자리를 떴어야 했다.

"그 숙녀와 아롈이 어떤 관계인지는 제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무런 연고가 없는 여인을 어찌 그냥 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충분히 여비를 주어 내보내면 되지 않냐는 말은 아롈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미셸은 여유롭고 상냥하게 웃으며 자신의 명예를 생각해달라고 부탁했다. 완전히 졌다. 아롈은 손바닥을 꾹 할퀴며 부들부들 떨며 방으로 돌아와 일정을 대폭 단축해 바로 수도원을 방문하겠다는 지시를 내렸고, 지금 말 위에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셸은 그렇다 치자. 그에게는 최소한의 정당성과 명분이 있었다. 기사가 숙녀를 내칠 수 없다. 그래, 구닥다리 사고방식이지만 이 남쪽이라는 동네가 전부 구닥다리인데 뭘 어쩌겠는가! 하지만 마리야는! 그 여자는 대체 뭔데 아롈에게 그렇게 달라붙지?

코시카에서 친한 듯 굴었던 건 그렇다 치자. 물론 아롈은 어머니만큼 사생아에 관대할 수는 없었지만 멍청하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자기 부모와 형제의 목이 아롈의 어머니의 손에 떨어졌다. 사람의 은원으로부터 초탈한 성녀라도 되는 건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수녀나 성직자도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 하건만 고작 아롈과 동갑이면서.

여기까지 생각하던 아롈은 설마 마리야가 제 부모의 죽음을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결론에 다다랐다. 아롈의 상식으로는 그게 아닌 한에야 이렇게 친한 척을 할 리가 없었다. 아버지가 죽은 것보다 어머니에게 황위를 빼앗긴 게 더 충격일만큼 파블 1세에 대한 정이 없었던 아롈과 달리 마리야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존경으로 부풀어 올라 빵 터질 것 같던 소녀였다.

말을 몰아 가면서도 생각에 잠겨있던 아롈은 앞을 보고 전율했다.

흔히 남쪽의 수도원들이 그렇듯이 이곳에도 포도밭이 있었다. 포도는 아직 열려있지 않았지만, 포도가 타고 올라가라고 꽂아둔 수만 개의 꼬챙이, 그를 타고 뱅글뱅글 돌고 있는 여린 덩굴과 아이들의 손처럼 넓적한 잎사귀. 그런 포도밭으로 둘러싸인 언덕 위에 흰 벽의 건물이 서 있었다.

건물 자체가 화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건물이 정확히 서쪽에 위치해 있던 탓에 건물은 마치 석양을 등지고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분명히 회칠을 해서 희어야 할 벽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고, 갈색으로 추정되는 지붕이 땔감이 된 것처럼 붉은 화염이 피어올랐다. 그 가운데 우뚝 선 단 한 개의 첨탑과 십자가는 포도 잎사귀와 언덕의 풀잎 전체에 붉은 신앙을 흩뿌리고 있었다. 남쪽의 신앙을 다소 무시하는 감이 있었는데도 저 아름다움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차가 아니라 말을 타고 온 덕에 모든 광경이 고스란히 보였다. 노아이유 백작 부인은 뒤로 넘어가는 시늉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하루에 두 번 마차를 타는 건 내키지 않았다.

"전하. 날이 완전히 저물기 전에 드시지요."

아롈은 살짝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챙 넓은 모자에 달린 공단 리본이 흔들렸다. 남부 모자는 챙이 너무 커서 거슬렸다. 아롈이 탄 백마는 새침하게 언덕을 단숨에 올랐다. 아롈은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않고 말에서 훌쩍 뛰어 내렸다.

다행히도 바닥에 예상치 못한 돌 같은 것은 박혀 있지 않았다. 노아이유 부인은 어떻게든 말을 못 타게 하겠다는 듯이 숙녀라면 언제 어디서나 정숙한 옷차림-즉 겹겹이 껴입은 치마-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롈은 바지 없이 옆안장으로도 무리 없이 말을 탈 줄 알았다. 시조 표트르 키예프는 거대한 독수리를 타고 다녔다던데. 살짝 떠오른 스커트가 가볍게 내려앉은 다음에야 다른 기사들이 뒤따라 도착했다. 행렬의 맨 뒤에는 노부인이 짐짝처럼 실려 오고 있었다.

아롈은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며 아주 잠시 고소한 웃음을 머금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아롈을 맞이한 것은 이런 시골구석에 있을 리 없는 주교였다. 붉은 수단을 입은 추기경이 아닌 것이 마음에 차지 않았지만 당장 추기경을 내놓으라고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사실 정말 놀란 것은 그가 아롈에게 무릎 꿇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코시카에서는 모든 사제들이 황족에게 무릎 꿇었다. 실질적인 정교회의 1인자 총주교조차도 정교회의 수장인 차르의 휘하에 있었으므로. 그러나 주교는 교황을 섬긴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아롈에게 고개만 꾸벅 숙였다.

손등이나 반지에 접구를 하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아서 순간적으로 기분이 대단히 상했다. 도대체 이 나라는 어떻게 굴러가는 것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귀족가의 둘째나 사생아 따위가 물려받을 재산이 없으면 기어들어가 평생을 보내는 성직 나부랭이에 있는 주제에.

기분이 싸늘하게 식은 아롈은 수도원장의 아부를 들은 척 만 척 하며 수도원 뒤에 붙어있는 생 엘로이즈 수녀원에 들어섰다. 저녁 시간인데도 정말이지 의아할 정도로 조용해서 설명을 요구했더니 나온 답이 가관이었다.

"평생 대침묵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럼 평생 입을 열지 않은 채 살아간단 말인가?"

"수련수녀들은 수요일과 주일에만 대침묵을 지키고 그 외에 수녀원장은 성사 때는 성서봉독을 위해 입을 엽니다만 나머지는 그렇습니다."

도대체 고르고 골라 왜 이런 시골구석에 왔는지 의문이었는데. 수도원장은 이렇게 대침묵을 철저하게 지키는 신심 깊은 수녀원은 로렌 전체에도 몇 없다고 자랑스레 설명했다.

사람이 평생 말을 한 마디도 안 하고 살 수 있구나. 아롈은 저도 모르게 쇄골을 만지작거렸다. 데리고 올 생각이었지만 벨타가 앤의 손가락에 입김을 분 다음 소름이 끼쳐서 도저히 목에 걸 수가 없었다. 앤과 잘 노닥거리고 있으라는 핑계를 댔기 때문에 지금은 맨 목이었다. 어쨌거나 벨타에게 평생 대침묵을 지키라고 요구한다면 혀를 깨물고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목걸이 하니 작센에서 떨어뜨린 토파즈 목걸이가 생각났다. 결국 찾지 못 했다고 했다. 한 눈에 봐도 값진 것이니 누가 주워갔겠지 싶으면서도 입맛이 썼다. 이제 구하기 힘든 물건인데.

"자, 이쪽으로 오시옵소서."

흰 옷과 머릿수건을 쓴 수녀원장이 수도원장과 교대해 아롈을 이끌었다. 벽 안으로는 남자가 들어갈 수 없으며, 마담 르와이얄은 아롈과의 독대를 청한다고 했다. 설마 이 안에 뭔가 있지는 않겠지. 다소 찜찜한 기분이 되어 수녀원장의 안내를 받아 홀로 수녀원 안에 들어섰다.

그 안에서 아롈은 관심의 대상도 되지 못했다. 수련수녀들은 흘끔거리는 눈길이라도 던졌지만 다른 수녀들은 아롈이 마치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스쳐 지나갔다. 태어나서 사람 많은 곳에서 이토록 시선 없이 지내본 것은 처음이라 당황했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건물은 크지 않아서 얼마 안 있어 도착했다. 수녀원장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 제 갈 길로 떠났다. 손님 대접을 하면서 문도 안 열어주고 가다니.

아롈은 잠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말했다.

"마담 르와이얄. 들어가겠습니다."

필리프에게 혹독하게 배우고 있는 갈리아 어는, 그리 나쁘게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롈은 익숙지 않게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마담 르와이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롈은 불길한 기분에 젖어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털썩 주저 앉아 성호를 그었다. 손이 바듧바들 떨렸다.

"신이여."

그리 신실하지도 않았건만 떨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아롈을 부축해주러 온 수련수녀들이 방 안을 쳐다보더니 묵계를 깨고 비명을 올렸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방 안에는 대롱대롱 목을 맨 여인이 있었다. 여인의 얼굴은 처참하게 얽어 있었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은 너무도 힘겨운 일이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다시 눈이 쌓인 골짜기가 나타날 것 같았다. 소녀는 흰 용의 가죽 날개에 얼굴을 비비며 행복해했고, 방글방글 웃었다. 파피, 파피. 다시는 가지 마. 알았지? 파피. 이상한 꿈을 꿨단 말이야. 파피가 사람을 먹어. 사람을 먹는대.

그럼 귀여운 파피는 입을 쩍 벌린다. 그 안에서 피가 질질질 흘러나온다. 온 세상을 피로 가득 채워버리고, 소녀는 그 끈적한 피에 갇혀서 숨을 못 쉬고 바동거린다.

그러고 있으면 목을 조르는 피가 어느 새 흙으로 바뀌어 있다.

비밀은 무덤에 가서 지켜주세요. 무덤에 가서 지켜주세요. 무덤에 가서 지켜주세요.

너무 깜깜하고, 갑갑하고, 숨이 막혀서. 깨어나면 눈물로 얼굴이 흠뻑 젖어 있었다. 행복한 일인지 아닌 일인지 모르겠다. 유모는 죽어버렸다. 아롈이 죽여 버렸다. 성을 전부 불태워버렸다.

내가 전부 죽였어. 내 잘못이야.

파피가 보고 싶었다. 무뚝뚝한 말투로 뭔가를 끊임없이 말해주던 파피. 꼭 끌어안아주던 파피. 유모한테 맞고 오면 입김을 후 불어서 상처를 치료해주던 파피.

그 무서운 용이 아니라, 파피가 보고 싶었다.

내 작고 예쁜 흰 용.

아롈은 이불에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거위 솜털로 가득 채운 이불은 보들보들하고 따뜻했다. 하지만 예쁜 용보다는 덜 했다.

"깨셨습니까?"

"꺼져, 제냐."

황도에서 기사가 도착했을 때, 아롈은 제냐를 데리고 왔다. 저 애가 내 시녀야. 아롈의 뺨을 갈겼으니 사형당해 마땅했을 제냐 카나예바는 그렇게 목숨을 건졌다.

전형적인 북쪽 아이의 골격을 지닌 제냐는 아롈보다 단 한 달 먼저 태어났을 뿐인데도 훨씬 몸의 성장이 빨랐다. 아롈은 그 얼굴을 볼 때마다 숯덩이가 된 시체가 떠올라 구역질이 났다.

"밤을 같이 새야 한댔어. 아니, 새야 한다고 했사옵니다."

"누가?"

"시녀장님이요."

"내가 싫다고 했잖아."

목소리가 거칠었다. 아롈은 침을 모아 삼켰다. 목구멍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유모가 이걸 봤으면 내 팔뚝을 엄청 아프게 꼬집었을 텐데. 아, 유모는 이제 없지.

"시녀장님이 새야 한댔어요."

"너 앵무새야? 내가 싫다고 했지! 내가 싫다고 했잖아!"

아롈은 악을 썼다. 앵무새. 파피가 말해줬다. 똑같은 말만 계속 하는 알록달록한 새라고. 호루라기처럼 찢어지는 목소리에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 두 명이 뛰쳐나왔다.

그녀들은 꺽꺽거리며 숨이 넘어가려고 하는 아롈에게 따뜻한 물에 설탕을 타서 먹였다.

"전하. 여대공 전하. 무언가 미편하신 점이 있으신가요?"

숨이 좀 가라앉은 아롈은 그녀들을 노려보았다.

"너희는 왜 거기서 나와?"

"저희는 전하를 모시는 시녀인 만큼 곁방에서 항상 대기하는 것이 법도인지라."

"싫어."

"여대공 전하. 그건 저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랍니다. 착하신 전하, 떼를 쓰시면 안 되지요?"

"너. 이름이 뭐랬지?"

"쿠트조프 백작의 딸 올가 ​블​라​디​미​로​브​나​입​니​다​,​ 전하."

"네가 나보다 높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하."

"그런데 왜 토를 달아?"

"전하. 저희에게는 전하를 보필하고 도울 책임이 있답니다. 곁에서 모시지 않으면 어찌 시녀라고 하겠어요? 저희는 전하의 어머님이신 옐레나 대공비 전하로부터 전하를 잘 모시라는 명을 받은 상태랍니다. 만약에 밤에 혼자 계시다가 열이 오르시거나 다치시면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아롈은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차갑게 식었던 몸이 조금씩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네 이름은 알아. 알렉산드라지? 잘 모신다고?"

"예, 전하. 알렉산드라 이바노브나 주코바입니다. 저는 전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답니다."

"나 목욕할 때 나보고 지진아 아니냐고 수군거렸던 건 기억나?"

그녀의 얼굴이 잠깐 사색이 되었다.

"그럴 리가요, 전하. 잘못 들으셨겠지요."

"아니야. 너 맞아."

다섯 살짜리 소녀는 훌륭하게 들은 말을 외워보였다.

"내가 난산에 노산이어서 뭐 잘못 된 거 아니냐고 했잖아? 말 안 하는 걸 보니까 뭔가 이상한 거 같다고 했잖아. 정신이 나간 것 같다고도 했고. 거기다가 사생아 아니냐고도 떠들었지? 알렉산드라 너는 사실 마리야라는 애랑 내가 바뀐 거 아니냐고도 했잖아."

아롈은 사실 사생아, 지진아가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몰랐다. 그러나 흔히 나이 어린 아이들이 그렇듯이 어른들이 하는 말의 부정적인 뉘앙스는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가."

"저, 저, 전하."

"용서해 주면, 나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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