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붉은 올가미, 푸른 가위 (3)
마리야는 아롈의 방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검은 머리칼이 뺨에 드리웠다. 이복언니의 시녀는 방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빠끔히 고개를 내밀더니 바로 문을 쾅 닫았다. 차 한 잔만 주지.
이제 곧 여름인데도 돌의 차가운 냉기가 엉덩이를 타고 올라왔다. 공기는 더워도 실내의 돌은 차가웠다. 북쪽에서 태어났지만 내려와서 산 지 오래 되었다.
사실 아롈의 행렬에 뛰어든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마리야는 남편과 싸운 뒤 집을 뛰쳐나왔다. 자기는 다른 여자들과 실컷 놀아나는 주제에, 그는 마리야가 너무 사치스러우며 다른 남자와 잠을 잤다는 이유로 그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말도 안 된다. 처음에는 복수심에 불탔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여자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동쪽에서 바로 북쪽으로 가는 배를 찾다가, 한 번 사기를 당해 패물의 반을 빼앗기고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북쪽으로 바로 가는 배는 지금 바람의 문제로 찾기 어렵다고 했다. 마리야는 겨우겨우 동쪽에서 남쪽으로 넘어오는 배를 탈 수 있었다. 남편은 동쪽의 공작이라, 남쪽으로 넘어오면 마리야를 찾기 힘들거라는 생각을 했다.
마리야는 정말 당장이라도 아버지의 품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북쪽으로 바로 넘어가는 배는 하나도 없었다. 일 한 번 해본 적 없는 고운 손은 금세 거칠어졌다. 울퉁불퉁 못생기게 변한 손톱과 결이 다 상한 머리칼을 보고 속상해 할 틈도 없었다. 그 와중에 중부로 간다는 마차를 잘못 타 항구가 아닌 내륙으로 들어와버렸다.
그래도 천한 자들처럼 머리를 잘라 팔지 않은 것은 마리야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마리야의 아버지는 코시카의 대공이었고, 마리야의 외할아버지는 백작이었다. 마리야는 고귀한 여자였다.
자존심을 꾹꾹 접어두고 남은 패물을 털어 머물며 북쪽에 보낸 아버지의 편지를 기다리는 사이, 어떤 소문을 들었다. 이 나라의 태자비가 근처를 지난다는 것이었다.
그 때 마리야가 떠올린 것은 언젠가 동화책에서 읽었던 장면이었다. 고귀한 숙녀가 머리를 풀어 내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면 기사나 왕이 숙녀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것.
자주 싸우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아껴주던 남편을 버리고 잘생긴 악사에게 몸을 맡겼을 때의 격정은 활활 타오르는 원한으로 변해 있었다. 사랑은 짧았고 고생은 길었다.
아버지한테 꼭 죽여달라고 할 거야.
마리야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차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호화로운 마차에서 내린 것은 뜻밖에도 두 달 차이나는 이복 언니였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무릎을 꿇고 있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롈.
그저 반가웠다. 어쨌거나 핏줄인데. 아버지와 어머니와 오라버니는 아무리 편지를 보내도 답장 한 장 없는데 눈앞에 떡하니 이복 언니가 나타났다. 태자비라고? 왜 그녀가 이 먼 남쪽에 시집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충분히 제 한 몸 도와줄 수 있을 터였다.
똑같이 아버지의 딸인데 저는 다 늙은 공작에게 시집가고 아롈은 남쪽의 황후가 된다니, 조금 억울하기도 했지만 그 기분은 잠시였다.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 기분이었다. 이 줄을 잡지 않으면 영영 기회라곤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친근하게 부르기는 했다. 아롈이라고. 뭐 어떻단 말인가. 궁정의 모든 사람들이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을 아롈 여대공, 혹은 아롈 전하라고 불렀다. 도망친 알렉산드르 대공도 그냥 아롈을 아롈이라고 불렀는데 반쪽이긴 해도 자매인 자기가 아롈이라고 부르는 게 뭐가 잘못 되었다고.
어릴 적의 아롈은 마리야의 말에 잘 대답을 안 해줘서 그렇지 그렇게 대놓고 면박을 주는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어머니께서 여자란 모름지기 다소곳하게 남편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싸늘하게 구는 법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마리야가 시집가서 보낸 사 년 만에 옐레나 대공비 전하처럼 그렇게 딱딱하게 변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신분이라니! 신분이라니!
똑같은 아버지의 딸이잖은가. 똑같이 파블로브나잖은가. 키예나인가 유리예프스카야인가 그게 중요한가? 어차피 자매인데!
자매가 어렵게 살고 있으면 좀 도와줄 수도 있지. 아롈은 마리야의 이야기를 하나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칼처럼 단호하게 사라지라고 명령했다. 마리야의 뺨에 눈물이 처연하게 흘러내렸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다른 사람들이 다 등을 돌려도 동기간에 그러면 안 되는 거지.
세상이 전부 자신을 미워하는 것 같았다.
아까 그 잘생긴 기사님만 해도 그랬다. 연약한 숙녀가 머리를 풀고 도와달라고 했으면 이야기를 잘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수도원에 가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나중에 듣겠다고 하는 건지.
마리야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입술을 삐죽였다.
기다릴 거다. 아무리 문을 안 열어줘도 언젠가는 여기로 아롈이 돌아오겠지. 끈질기게 매달리면 도와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나쁜 놈을 죽여 달라고 하고, 여비를 받아서 집에 돌아가야지.
엄마와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기다리는 북쪽에.
"숙녀 분?"
비로드 위에서 반짝이는 훈장처럼 정중한 목소리였다. 마리야는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를 단정히 묶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가 눈짓하자 뒤에 시립해 있던 시종이 마리야를 일으키고 손수건을 쥐어주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찬 바닥에 앉아 있으면 몸이 상합니다."
한 눈에 봐도 비싼 옷이었다. 마리야는 촉촉이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발 부탁이에요. 저를 좀 도와주세요."
아롈은 누워있는 그녀의 흉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를 갈다가 수도원의 응접실로 돌아왔다. 그녀의 숨은 평온하기만 했다.
수도원장의 더듬거리는 변명에 따르면 그녀는 상습적인 자살 시도자였다. 그래서 식사를 할 때를 제외하면 모든 뾰족한 물건을 방에서 치우도록 명하고 수녀 한 명을 항상 따라다니게 했다고 하는데, 그 수녀가 잠시 변소에 다녀오는 사이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수련수녀복은 아주 질기고 소박한 천으로 되어 있었다. 마담 르와이얄은 옷을 동아줄처럼 꼬아서 천장에 매달고 목을 매달았다.
자살은 교황을 믿는 자들, 교황을 믿지 않는 자들, 황제를 따르는 자들 모두 다 금기시하는 죄악이었다. 교인에게 있어서 자살은 살인이며, 일반 살인과 달리 자살은 영원히 회개하고 고해를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대죄다. 아롈은 '당연하지, 자살이 허락되면 농사는 누가 짓는단 말이야?'라는 모 철학자의 비아냥거림을 훨씬 더 좋아했지만.
가뜩이나 독실한 수녀들만 모였다는 생 엘로이즈 수녀원에서 석 달에 한 번은 죄를 지으려 하는 마담 르와이얄은 거대한 골칫거리였던 모양이다.
아롈은 깜짝 놀라 달려운 수녀원장의 부축을 받아 수녀원을 빠져나가 수도원에서 기다렸다. 이제 겨우 울퉁불퉁하게 자라기 시작한 손톱을 차마 깨물지 못 해 손가락의 살을 깨물며 시간을 보냈다. 간신히 새벽이 되고 나서야 수녀원의 문이 열렸고, 정말로 마담 르와이얄의 용태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다. 그리고 일행인 아롈이, 이번에는 시녀들을 이끌고 직접 그녀를 보러 갔다. 그녀는 욱할 정도로 무사했다.
차라리 진짜 죽었으면 이런 생각이 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래 매달려 있지도 않아서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조금 있으면 눈을 뜰 것이라 했다. 작정하고, 아롈이 오는 시간을 계산해서 목을 맨 것이 틀림 없었다.
상태를 보고 온 아롈이 입을 열지 않자 응접실에는 싸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아롈은 숨을 부러 입으로 길게 뿜어냈다. 선명한 한숨이 원색적인 비난조로 크게 울렸다. 정말이지 천박하게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혼인은 마가 꼈다. 들르는 곳마다 좋은 일이 하나도 없이 마가 끼었다.
"마담 르와이얄은 무사합니다."
필리프가 답했다.
"그러십니까. 전하, 염려하시는 마음은 이해하오나,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피곤해보이십니다."
실제로 아롈은 너무 놀라 그대로 저녁을 걸렀고, 식사는 커녕 물 한 모금 대접받지 못했다. 너무 놀랐다 하여 브랜디를 반의 반 모금 정도 마신 것 외에는 공복이었다. 제대로 옷을 갈아입지도 못 했고, 머리도 다듬지 못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좀 쉴 필요가 있었다.
아롈은 몸을 움직이는 대신 눈만 부드럽게 굴려서 앙투안을 응시했다.
"클라리 경."
"예, 전하."
"수행하게."
또 몰래 따라오지 말고. 아롈은 치졸하게 속으로 뒷말을 덧붙였다.
마리야는 그 남자가 '숙녀는 혼자 있으면 안 된다'며 붙여준 기사를 달고 복도에 서 있었다. 머리는 그대로 풀어헤친 채여서 간혹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한들거렸다. 제대로 씻질 못 해서 기분이 안 좋았다. 한참을 기다리자 드디어 문이 열리고 꽤 나이가 있어 보이는 처녀가 빠져나왔다.
마리야는 멋쩍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빤히 마리야를 쳐다보다가 무시하고 돌아섰다.
"저기요! 잠깐만요!"
마리야는 달려가 그녀를 붙들어 세웠다. 그녀는 마리야의 손을 떨쳐내고는 마리야의 손이 닿은 어깨를 털어냈다.
"숙녀께서는 뉘시기에 제게 이리 무례하신가요?"
동쪽 말이었다. 마리야는 알아듣고 한 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당신 아롈의 시녀지요?"
"대답해야할 의무가 없을 것 같지만 호의로 대답해 드리지요. 맞습니다. 그리고 숙녀께서는 제 주인을 그리 무례하게 부르지 말아주시겠어요? 어중이떠중이의 입에 그 고귀한 이름이 오르내려도 될 만한 분이 아니시거든요."
마리야는 그만 발끈했다.
"이봐요. 댁도 아롈의 시녀쯤 되면 코시카의 귀족일 거고 내가 누군지는 건너건너 들어 알 것 아니에요. 모르는 척 하지 말아요."
"정말 모르겠습니다만, 제 주인이신 전하께서는 이름 모를 숙녀께 좋은 감정을 가지신 거 같진 않거든요. 부디 제가 주인께 순종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어요?"
"나는 유리예프스카야의 마리야 파블로브나예요. 좀 그만 빈정대는 게 어때요?"
"예, 저는 앤 마리아 폰 레르헨펠트랍니다. 저는 빈정거린 게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렸어요."
"말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아니면 그냥 건방진 거예요? 나는 아롈의 여동생이라고요!"
"아, 그 쫓겨난 걸로 유명하신 사생아셨군요?"
사생아. 한 번도 어머니를 부끄럽게 여겨본 적 없었다. 자상하고 상냥한 어머니. 아버지는 평생 어머니만을 사랑했다. 그리고 어머니도 평생 아버지에게 충실했다. 그런데 왜 사생아라고 비난을 들어야 하지? 우리 어머니가 대공비 전하보다 아버지와 일찍 만났단 말이야!
하지만 여기까지는 많이 들어온 말이었다. 그보다 마리야는 쫓겨났다는 말에 머리가 뜨끈해졌다.
"남의 사정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남편과의 잠자리가 싫었다. 항상 거칠기만 하고, 하고 나면 살결을 칼로 쑤신 듯이 아팠다. 침상에 뚝뚝 떨어진 눈물을 다 모으면 세탁을 할 수 있을 거다. 잠자리를 몇 번 거부하면 보석을 갖다 바치는 것도 지겨웠다. 침대 밖에서는 몇 분 볼 수조차 없는 부부 생활.
언어가 서투른 걸 비웃는 다른 여자들에 둘러싸여 하루하루 시름으로 살아가는 날이 길어지면서 마리야는 점점 우울함의 늪에 빠졌다.
아버지는 왜 나를 이렇게 멀리 시집보내셨을까. 아무리 어릴 때 시집가는 게 좋은 혼처로 가기 유리하다고는 해도.
그렇게 메말라가고 있을 때 그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간교한 뱀처럼 마리야를 휘감았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꿈을 즐겼다. 그는 마리야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듯,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반했듯, 마리야도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냥, 그 것뿐이다. 남편도 다른 여자들의 치마를 들치고 들어가 온갖 환락을 즐기면서 왜 여자는 안 된다는 거지? 불공평했다.
"숙녀분에 대한 이야기는 작센에서도 유명하답니다. 사생아가, 공작부인이 되었다고요."
"이봐요, 알고 있으면 전하라고 불러요!"
"왜 전하지요? 아가씨께서는 전하 칭호가 없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요."
"무슨 소리예요?"
마리야는 유리예프스카야 공녀로서 HSH 칭호를 받았고, 결혼하면서 남편인 공작에게 HRH 칭호를 받아 HRH 공작부인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동쪽의 방계 왕족인 공작이었다.
"아가씨의 작위와 전하 호칭은 전부 박탈당했잖아요?"
마리야는 했던 말을 반복했다. 목소리가 추를 달아 바다에 던진 것처럼 가라앉았다.
"무슨 소리예요?"
"모르셨나요?"
앤 폰 레르헨펠트는 성화에 나오는 성모만큼이나 상냥하게 웃었다.
"아가씨의 부모님과 오라비들이 모두 목이 잘린 걸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