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붉은 올가미, 푸른 가위 (8)
옐레나 여대공은 황실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회랑에 들어갔다가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녀는 회랑에 들어가 자신의 초상화를 다시 한 번 새김으로써 자신이 키예나임을 증명했다. 옐레나 대공비의 핏줄임은 외모만으로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었으므로 그녀에게는 정말 당연하게 여대공의 작위가 다시 수여되었다.
원래 여대공의 경우에는 성 소피야 훈장을 태어날 때부터 받는다. 빨간 새시가 어깨를 비스듬하게 둘러 내려와 리본으로 매듭지어졌고, 가슴에는 영예로운 별이 빛났다. 아무래도 조금 늦었다.
훈장을 받은 옐레나는 어린 아이 특유의 짧은 다리로 열심히 복도를 걸었다. 폐인처럼 퀭했던 눈은 금세 그늘이 지워졌고 푹 들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던 뺨에도 다시 살이 올랐다. 빨리 가서 마샤랑 과자 먹어야지.
그 때 누군가가 무릎을 꿇지도 않고 길을 가로막았다.
"안녕하시오, 옐레나 여대공 전하?"
옐레나는 눈을 깜빡였다. 정말 곰처럼 큰 남자였다.
"누구냐?"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감히 옐레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누구냐니까?"
"본인은, 아 못 하겠다."
이반 어쩌고 중얼거리며 머리를 긁적인 그는 옐레나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몸을 낮췄다.
"정말 많이 닮았네."
남자 대신 옐레나의 뒤에 서 있던 알렉산드라가 고개 숙여 대답했다.
"여대공 전하. 전하의 오라버니이신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대공 전하십니다. 대공 전하. 아시다시피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 전하십니다."
"오라버니?"
그런 거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마리야가 뭐라고 했더라?
"나한테 알료샤랑 표트르 말고도 다른 오라버니가 있었어?"
남자의 얼굴이 꽤 험악하게 찌푸려졌다. 남자는 황소처럼 무섭게 생겨서 옐레나는 속으로 엄청나게 겁을 먹었다. 설마 때리지는 않겠지. 유모도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는 잘해줬는걸.
"알료샤라면, 알렉세이 파블로비치?"
"응."
"옐레나 여대공 전하. 알렉세이는 사생아라서 우리 형제가 아니야."
"사생아?"
"따라와 봐. 가르쳐 줄게."
알렉산드르의 손을 잡고 따라갔다. 갑자기 복도가 휘황찬란한 회랑으로 바뀌었다. 아무리 걸어도 끝없어 보이는 벽에는 초상화가 쭉 늘어서 있었다. 옐레나는, 아니 아롈은 그 초상화들이 자신을 붙잡고 빙글빙글 도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 어느새 알렉산드르도 그 초상화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옐레나 파블로브나.
잘생긴 남자였다. 목소리도 좋았다. 파블 1세, 파블 이바노비치 키옌은 성큼성큼 초상화의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아렐르. 안 먹나요?"
크리스틴은 혀가 굳었는지 아롈이라는 발음을 똑바로 해내지 못 하고 아롈을 남쪽식 발음으로 아렐르라고 불렀다. 그것도 올케라고 꼬박꼬박 부르다가 아롈이 고치라고 말하자 고친 것이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롈은 접시에 놓인 머랭 쿠키를 집어 입에 넣었다. 계란 흰자와 설탕으로만 거품을 내 구운 과자는 입에서 사르르 녹았다.
시간에 맞추려 이틀을 꼬박 달리며 도착한 별궁은 과연 멀쩡한 방에 멀쩡한 음식을 내놓는 멀쩡한 곳이었다. 아롈은 새삼 얼마나 이 여정이 험난했는지 생각하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함부르크에서 본 나무로 된 목욕통은 정말이지 충격적이었다.
"내일이면 만날 분이 많으니 긴장할 만도 하지요."
크리스틴은 얼굴이 석회로 된 것처럼 어색하게 웃었다. 그 얼굴은 꽤 깨끗해져 있었다.
"크리스틴. 다시 봐도 얼굴이 많이 좋아졌군요. 단순히 분이 잘 맞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나바르에서 만난 시의가 좋은 약을 주었답니다. 생각보다 얼굴에 좋아서 흉이 좀 메워지는 것 같군요."
"다행이군요. 크리스틴. 내일 입고 나갈 옷은 정했나요? 장신구는요?"
"아, 괜찮은 안목을 가진 이가 있어서 잘 골라주, 주었어요."
크리스틴은 그리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어서 아롈이 딱히 말을 걸지 않자 금세 조용해졌다. 차와 곁들인 과자를 씹는 소리와 차를 조용히 목구멍으로 넘기는 소리가 다였다.
아롈은 그 침묵에 힘입어 생각했다.
아롈은 어머니가 마리야를 죽이지 못 해 줄곧 안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 불안한 황위를 두고 '대국'에 속하는 동쪽의 카스티야와 마찰을 빚는 것을 포기하고 피아스트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이 없어야 사람을 만나는 그 성정에 마리야가 얼마나 거슬릴까. 얼마나 죽여 버리고 싶을까.
크리스틴은 과자를 우걱우걱 먹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일찍 들어갈게요."
얼마나 연습을 하는진 몰라도, 그녀가 말을 더듬는 일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갈리아 어가 많이 는 건 필리프가 혹독하게 다그친 아롈도 마찬가지였다. 필리프는 페란토를 절대, 절대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에 아롈은 미셸이나 필리프, 쥬스티느, 앤 등과 잡담을 나눌 때조차 서툰 갈리아 어를 사용해야 했다. 정말 힘든 시간이었지만, 힘든 만큼 실력은 빠르게 좋아졌다.
"네, 크리스틴. 내일 새벽에 보지요. 잘 가요."
일어나 배웅을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앤이 머리를 빗기는 동안에도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한 가지로 모였던 생각의 줄기는 여러 갈래로 다시 갈라졌다.
아롈은 거울 너머로 앤의 얼굴을 넘겨보았다. 앤은 화장을 지운 맨얼굴이라 입가에 몇 개 난 점과 불그스름한 자국이 고스란히 보였다. 여드름이 났던 자국이라고 했다. 손톱으로 짰더니 빨간 자국이 남았다고.
"앤."
"예, 전하."
"마마 자국을 고쳤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
"소녀가 듣기로는 없사옵니다."
"너도 아까 듣지 않았느냐. 크리스틴이 말하기를 좋은 시의가 있어서 마마 자국을 고쳤다고. 실제로 얼굴이 눈에 띄게 나아졌고."
"그런 의사가 있을까요?"
"그래서 묻는 것이다. 릴레벨트."
[왜?]
릴레벨트는 앤이 화장대 위에 곱게 놓아둔 목걸이 틀에서 빠져나왔다. 늘씬한 허리에 둘러진 허리띠 모양의 흰 비늘이 요새 유난히도 선명해졌다. 아롈은 몇 가지를 계산해보다가 물었다.
"마담 르와이얄이 마법사냐?"
황후는 오를레앙 대공녀고, 오를레앙 대공자이자 황후의 조카인 미셸은 마법사다. 그렇다면 황후도 마법사일 가능성이 있고 황후의 딸인 크리스틴에게도 가능성이 있었다.
벨타는 생각도 해보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걔가 마법사면 내가 벌써 걔한테로 갈아탔겠지.]
그런가. 아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앤이 자연스레 빗을 머리에서 뗐다.
"앤, 그만 빗고 침수 준비를 하거라.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니 이만 자야겠다. 이불 사이에 향유를 좀 뿌려 다오."
그럼 뭘까. 벨타는 꼬리를 들어 아롈의 손가락을 툭툭 쳤다. 차가운 감촉에 소름이 끼쳤다.
[무슨 생각 하니?]
용. 마법사. 그리고 어머니.
"내일 사파이어를 다는 것이 좋을지 진주를 다는 것이 좋을지 고민 중이다."
개도 안 믿을 거짓말에 벨타는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어찌나 크게 벌리는지 그 작았던 입에 앵두 한 알이 다 들어갈 것 같았다.
[랄랄랄랄라. 랄랄랄랄랄라.]
아롈은 자신의 머릿속에만 울리는 벨타의 노래를 들으며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일벌백계. 처형. 차도살인. 뇌물. 살 길. 마리야 파블로브나.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지 알 것도 같은데,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초상화가 말했다.
-네가 나를 죽였다.
아롈은 말했다.
-폐하를 시해한 것은 제가 아닙니다.
초상화가 말했다.
-네가 나를 죽였다. 네가 나를 칼로 찌르고 네가 내 목을 벴어! 옐레나!
우렁찬 소리와 함께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아롈은 지옥의 불길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가 아니야! 나는 어머니가 아니라고! 내 이름은 옐레나잖아? 그래! 내 이름은 옐레나야! 머리도 금발이고 눈도 녹색이야! 하지만 나는 어머니가 아니라고! 나는 옐레나 '파블로브나'야! 그게 중요해? 내가 아버지를 죽였어. 나는 파블 1세를 죽이지 않았어! 아냐, 내가 죽였어. 나는 막지 않았어. 네가 조금만 더 능력 있었다면 막았을 거야. 그건 불가능해. 어차피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내가 죽였을 거야! 나는 지금 아버지의 딸까지 죽이려고 하고 있어!
턱,
손목이 잡혔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여자였다. 아롈은 그녀를 알았다. 릴레벨트는 생글생글 웃었다. 아롈의 손을 잡고 있어 소매가 들려 있었다. 손목에는 파르스름한 핏줄이 비쳐보였다. 입술도 파랬다.
-너. 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
-잊어.
-너, 나한테, 거짓말을 했구나.
-아니면 지옥불에 떨어질래? 잊으라고.
아럐를 보자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보였다. 저기 떨어지면 뼛속까지 녹아 사라지리라. 아롈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벨타는 푸르스름한 입술로 방글방글 웃었다.
-그래, 착하지.
릴레벨트는 다른 손으로 아롈의 뺨을 쓰다듬었다. 긴 손톱, 아니 발톱이 복숭아 같은 뺨을 살짝 할퀴었다.
-그리고 고마워. 참 맛있었어.
무슨 꿈을 꾸었더라. 분명히 꿈을 꾸기는 꾸었던 것 같은데 눈을 뜨자마자 기억이 사라졌다. 침의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시간을 보니 그리 오래 잠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푹 잠들어 그럴까. 피부에는 반들거리는 윤기가 돌았고 드물게도 핏기가 올랐다. 창밖은 아직 검기만 했고 해가 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아롈은 간만에 졸음기나 두통이 없는 청명한 아침을 맞아 기분이 좋아졌다.
"전하, 차라도 한 잔 올리오리까?"
아롈의 옷 주름을 잡고 있던 앤이 물었다. 코시카 후작의 손녀이며 작센 국왕으로부터 백작의 작위를 받은 이의 딸인 앤은 기실 무릎을 꿇고 앉아 치맛자락의 주름을 잡는 것 같은 천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처지이기는 하나 앤은 굳이 아롈에 관련된 모든 일을 하길 고집했다.
"아니다. 차는 됐으니 너는 일어서고 다른 하녀를 시키려무나."
"소녀가 좋아서 하는 일이옵니다. 거의 다 되었사옵니다."
앤의 손끝에서 미끄러지는 옷감은 차가운 흰색이었다. 아롈은 주로 파란 계통의 옷을 즐겨 입었고 보석들도 무색이나 청색을 좋아했다. 눈이 노란색 도는 연둣빛이랍시고 녹옥이나 감람석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고 옷도 녹색만 입는 것도 우습다 싶어서 선명한 녹색의 옷은 되도록 피하는 편이었다.
누런 베이지나 칙칙한 회색과는 달리 얼룩이 조금이라도 묻으면 빠지지 않는 순백색은 드물었다. 옷감을 한 번 짠 다음 여러 번 흰 색으로 염색을 해야 흰 옷을 만들 수 있었고 개중에서도 눈처럼 차갑고 깨끗한 흰 옷은 더더욱 귀했다.
흰 비단에 금실과 은실로 짠 레이스를 단 옷은 완벽한 로렌식으로 어깨는 가리고 가슴은 깊이 파여있었다. 코시카에서 어깨는 드러내고 가슴은 가리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가슴 윗부분이 훤히 드러날 지경이어서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지만 억지로 어깨를 폈다. 이 옷의 가장 큰 사치는 스토마커에 있었다. 자잘한 금강석만을 박아 키옌 가문의 독수리를 수놓은지라, 어느 각도에서 봐도 화려하게 빛을 발했다.
곱게 개여 상자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다른 옷들과 달리 이 옷과 세례식 때 입을 옷, 그리고 혼인식에서 입을 옷은 각 한 벌씩 펼쳐진 채로 흑단 상자에 들어 있었다. 그만큼 귀중했다.
보르디는 마르그리트 안 로를레앙이 엘리엔 소피 아델라이드를 대신해서 마담 라 세르가 된 이래로 근 30년 가까이 황실과 혼사를 맺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보르디 대공을 외조부로 둔 아롈이, 남쪽 말로 엘리엔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롈이 마담 라 세르가 되는 것이다.
흠을 만들어서라도 잡을 수 있는 자리이니만큼 이 날만은 무조건 완벽해야만 한다. 잡을 틈조차 없어야 했다. 나이든 황후 바로 아래의 지위를 지닌 아롈은 가장 어리고 아름답고 현명한 여인이어야 했다. 누구보다도 화려하고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그래서 아롈은 신경을 쓰는 앤을 굳이 더 말리지 않았다.
시녀들이 여럿 달라붙어 머리를 땋아 올리고 관을 씌웠다. 진주와 루비, 마노의 카메오로 된 관은 백색과 금색, 은색의 옷 위에서 타오르듯 시선을 잡아끌었다. 아롈은 붉은 계통의 보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거울을 보니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귓불에는 진주 귀걸이를 달았다.
잘 하지 않는 화장까지 하고 모든 준비를 마친 북쪽 제국의 여대공은 남쪽 제국의 후계자에게 가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별궁에서 숲으로 가는 길은 잘 다져져 있어서 마차는 거의 흔들리지도 않고 매끄럽게 달려갔다. 아롈은 잠시 눈을 감았다. 정신은 정말로 맑았다. 이런 일이 대체 얼마만인지. 마차의 문이 열리자 아롈은 차분히 치맛자락을 붙잡고 필리프의 도움을 받아 한 단 한 단 마차에서 내렸다. 긴장감에 아랫배부터 덜덜 떨렸지만 계단을 헛딛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고귀한 여자들의 치맛자락이 흙으로 더럽혀지지 않도록 숲의 바닥은 반반한 돌이 깔려 있었다. 구두가 바닥에 닿자마자 아롈은 천천히 내리깔았던 눈을 들었다.
대충 잡아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가장 앞에 서 있는 남녀가 아마 황제 부처일 것이다. 아롈은 빠르게 파악했다. 황제는 엄격한 인상이었고 황후는 아주 평범한 중년 여인이었다. 다만 그녀의 얼굴에는 심통이 가득해서, 과연 좋은 마음으로 맞아주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수행원도 없이 무사히 돌아갔구나. 그는 눈이 마주치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빙긋 웃어보였다. 그의 옆에는 미리 준비하여 따로 출발한 마담 르와이얄 크리스틴과 두 명의 소녀가, 그리고 그 뒤에는 몇 명의 남녀, 마지막으로 맨 뒤에는 남녀가 열네 줄로 서 있었다. 모두가 필리프와 미셸이 설명한 그대로였다. 맨 앞에는 황족, 그 뒤에는 대공가, 마지막으로 외국의 귀빈들.
아롈은 필리프가 말한 인상착의를 바탕으로 몇 명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황제 부처, 남편, 그리고 두 명의 시누이. 황제의 형제인 '무슈'와 그 자녀들. 마지막으로 여섯 대공가의 사람들. 아롈은 리젤로트와 미네트라고 들었던 두 명의 마담들을 보고는 잠시 생각했다.
미셸. 리젤로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이라면서요?
이목구비가 비슷한 두 명은 모난 구석 없는 얼굴이었고 충분히 귀엽다거나 어여쁘다고 말할 수 있을만한 외모였지만 그렇다고 눈에 번쩍 뜨일만한 절세미인은 절대 아니었다.
"어서 오너라. 여독에 지치지는 않았느냐."
황제의 말에 정신을 차린 아롈은 언제 다른 생각을 했냐는 듯이 무릎을 꿇었다. 조부, 파블 1세, 어머니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무릎을 꿇는 것 자체가 난생 처음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익숙해져야 할 일이다. 아롈은 굴욕감을 감추고 낭랑하게 대답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의 은덕 덕분에 편안히 왔사옵니다."
바다에서 용을 만나고 그 용에게 갖은 핍박을 당하며 팔자에도 없는 오촌 조카를 시녀로 들이고 사촌 올케가 미친 여자라는 것도 알게 되고 아버지의 사생아도 이유 없이 데리고 오고 심지어 손위 시누이까지 주운 것이 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몇 번이고 연습한 덕에 발음은 매끄러웠다.
"어서 일어나려무나. 바닥이 차다."
긴 치맛자락을 끌고 일어선 아롈은 황후를 향해서 고개 숙였다. 이미 가장 높은 이인 황제에게 무릎을 꿇었으므로 황후에게는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되었다.
"오늘, 이블린은, 날씨가, 정말, 좋구나."
황후는 누가 봐도 정말 싫다는 듯이 딱딱 끊어 말했다. 미리 경고받은 바가 있어 아롈은 웃음까지 띠며 가볍게 답했다.
"폐하의 환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어머니이신 옐레나 1세 폐하께서도 황후 폐하께 안부를 전하라 하셨습니다."
분위기가 출렁였다. 미셸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남편은 그 다음이었다. 아롈은 잠시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래서 양쪽 뺨에 한 번씩 입술이 와 닿았을 때 처음만큼의 충격은 없었다. 그래도 손끝이 떨려 아롈은 치맛자락을 잡은 손에 꾹 힘을 주었다. 손끝에서 피가 다 빠지는 것처럼 차가웠다.
"반갑습니다. 먼 길 오느라 실로 고생이 많았어요."
그는 정말 처음 본다는 것처럼 뻔뻔스레 웃어보였다. 눈을 살짝 내리깔았지만, 가볍게 포옹했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저 또한, 뵙게 되어 기쁩니다."
그는 아롈을 놓아주고 뒤로 물러섰다. 아롈은 갑자기 흙탕물처럼 어지러워진 머리를 하고, 마담 르와이얄과, 마담 미네트와, 마담 리젤로트에게도 뺨에 키스와 포옹을 받았다. 무슈와, 마담과 그 자녀들은 그저 인사만 하고 넘어갔다. 아롈은 가장 먼저 보르디에 다가가 최대한 다정스레 웃으려 노력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아침이군요, 외숙모님."
초로의 노인인 그녀는 아롈의 손을 잡고 눈물마저 글썽였다. 보르디 대공비는 필리프의 어머니인 동시에, 아롈의 외숙모 되는 사람이었다.
"오, 이 감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는지 모르겠군요."
대공비는 아롈의 손에 입 맞추려 했고 아롈은 노인의 손을 다시 덮었다.
갑자기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롈은 벨타의 뜬금없는 웃음에 슬슬 익숙해지던 참이라 무시하고, 사촌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러다 잠시 눈이 헛돌아갔다. 그리고 아롈의 눈은 그 여자에게 못박혔다. 웃음소리가 세상을 뒤흔드는 듯 느껴질 정도로 커졌다. 사촌들이 무어라 말하는지 거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좀, 닥쳐!
이를 악물수도, 주먹을 쥘 수도, 미간을 찌푸릴 수도 없었다. 아롈은 그저 웃는 얼굴을 찌그러뜨리지 않고 필리프의 아들딸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바르 대공가의 줄로 걸어가 나바르 대공에게 말을 걸었다. 그 동안에도 계속 마지막 줄을 보고 싶은 욕망은 가슴 속에서 폭발하듯 솟아올랐다.
잘못 본 게 아닐까. 아롈은 심장이 두근거려 부르고뉴 대공녀라는 아무개가 뭐라고 아롈을 돌려까든 상관하지 않고, 부르고뉴 대공자인 소년이 아롈에게 무슨 칭찬을 했는지도 제대로 듣지 못 한 채 모든 대공가문을 다 돌며 인사를 마쳤다.
그리고 귀빈의 줄 맨 앞에 그녀가 서 있었다. 역시 잘못 보지 않았다. 저 검은 머리카락과 파란 눈은, 아롈이 부계로부터 하나도 물려받지 못 한 것이었으며, 때문에 아롈은 사생아라는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받아야만 했다. 그녀는 한 때 가련한 척을 하려 풀어헤쳤던 머리카락을 자랑스럽게 틀어 올리고, 곱게 화장을 한 채 웃고 있었다.
천진하게 웃는 그녀를 보고, 아롈은 그녀의 남편을 쳐다보았다. 귀가 멍멍할 정도로 웃음 소리가 커졌다. 아롈은 그제야 기억 속에서 그가 누구인지를 끄집어냈다.
"안녕하세요, 마드리드 공작."
"페드루스라 불러주십시오, 도나 치에르바(Donna Cierva). 알아주시니 영광입니다."
아주 나이든 남자였다. 아롈의 남편 되는 세시안도 거의 서른에 가까웠지만 그는 필리프와 동년배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국왕의 사촌이었고, HRH였으므로 저토록 흠이 있지 않았더라면 사생아인 마리야가 시집가기에는 과분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 쪽은 제 안사람입니다."
분명히 그가 아롈과 마리야의 관계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웃음 소리 때문에 귀가 거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아롈은 마리야가 하는 말을 입술의 움직임을 통해 파고들 듯 알아들었다.
"안녕하세요. 마드리드 공작부인 마리아입니다. 도나 치에르바."
작센에서 칼이라도 주워놓을 걸 그랬다. 그랬더라면 당장에 그녀의 가슴에 칼을 박았을 텐데. 진심이었다. 남편과, 시부모와, 시누이와, 로렌의 모든 세도가들이 모여있는 자리만 아니었더라면 아롈은 그녀에게 침을 뱉을 자신도 있었다.
-그러니까 제발 닥치라고!
털끝 하나하나까지 민감하게 곤두섰다. 아롈은 필리프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걸 느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기이한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는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아롈은 웃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화사하게 웃었다.
여기서 밀려나면, 다시는 갈 곳이 없었다. 한 번 밀려났을 때의 그 치욕을 기억한다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핏속에 얼음 덩어리가 흐르는 것 같았지만 아롈은 끝끝내 화내지 않았다.
"압니다. 유리예프스카야 공녀. 황도에서 마지막으로 본 지 벌써 삼 년이나 지났군요. 축복을 해주기 위해 먼 길 와준 것에 대해 사의를 표합니다. 비록 지금은 정신이 없어 어렵지만, 나중에 찾아오세요. 고향에 대한 이야기라도 나눌 일이 있겠지요."
마리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롈은 그녀의 남편에게 손등에 입을 맞추도록 허락하면서도 끝끝내 긴장을 풀지 않았다.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정말 사라진다면 아롈도 모든 것을 잊어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태자비인 아롈은 카스티야 사람을 만날 기회도 거의 없을 터였다. 그러니 오늘 정도만 참으면 되었다. 그러나 마리야는 생글생글 웃으며 귀빈 자격으로 아롈의 눈 앞에 다시 나타났다. 하필, 오늘.
네가 선택한 길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를 원망하지 마라.
아롈은 그런 말을 속삭이지조차 않았다. 경고조차 너무 자비로웠다. 그래서 그냥 다음 사람에게 인사를 하며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