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붉은 올가미, 푸른 가위 (7)
용수철을 사용한 마차의 좌석은 흔들림이 심하지 않았다. 동행인 앤과 아롈은 모두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리스틴은 창 밖의 별 것도 없는 풍경들을 한참이나 내다보다가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창틀을 톡톡 쳤다.
"да(네)?"
갑작스레 튀어나온 외국어에 크리스틴은 주눅 들었다. 반쯤 졸고 있던 아롈은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그녀는 미간을 문지르며 물었다.
"내가 да라고 했나요?"
"아, 아, 아니에요. 자고 있었나요?"
"잠시 생각 중이었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냥, 지루해서요."
"그러신가요. 앤, 커튼을 좀 내리거라. 눈부시구나."
마차 안은 금세 어두워졌고, 크리스틴은 이제 창밖 구경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 조금 더 상냥하게 대화를 이끌어줄 만도 하건만 아롈은 다시 눈을 감았다. 여인의 귀염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성격이었다. 용건을 마치면 보통 대화를 끝내, 잡담이라곤 할 줄을 몰랐고, 가끔 크리스틴을 비웃듯이 외국어를 썼다. 크리스틴은 그럴 때마다 무안함에 귀까지 달아올랐다. 게다가 말투가 아주 딱딱해서 흡사 사내 같았다.
이런 그녀의 단점에 대해 미셸에게 운을 띄워보았다. 그러나 그 잘생긴 사촌은 그녀의 불평을 받아주지 않았다. 외국인이고, 아직 어리니까 이해해 달라고.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크리스틴의 오라버니는 열네 살에 결혼하셨지만 그가 저렇게 철이 없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크리스틴은 올케의 깨끗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흔한 주근깨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만져보고 싶을 만큼 매끈하고 보들보들했다. 그 때 그 이상한 여자를 만난 뒤로 크리스틴의 얼굴은 점점 호전되고 있었지만, 아직 저만큼 돌아오지는 않았다.
나바르에 도착해서, 이 꼴을 하고 다과회에 꼭 나가야 하나 하고 크리스틴은 우울감에 잠겨 있었다. 나바르 대공녀가 보내준 시녀들도 전부 내보내고, 자신의 추한 얼굴이 담긴 거울을 마주하고 한숨만을 푹푹 내쉬다가, 방 안을 정신없이 서성였다.
-나, 나한테 왜 이러는데요?
깜짝 놀라 한바탕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여자는 크리스틴의 목을 끌어안은 채 소동이 끝날 때까지 크리스틴을 '구경'하고 있었다.
-얼굴을 고치고 싶니?
여자는 속삭였다.
-멀쩡하게 얼굴을 고치고 나다니고 싶지 않아? 너, 황제의 장녀라며? 내가 황제의 장녀라고 소리 높여 외치고 싶지 않니?
세 치 혀를 날름거리던 여자는 손끝으로 크리스틴의 쇄골을 쓸어내렸다. 크리스틴은 펄쩍 뛰어 올랐다.
-고개만 끄덕이렴. 그럼 네가 원했던 모든 것이 바로 네 것이 되는 거야.
-왜 그, 그, 그래야 하지요?
-너, 네 새언니가 싫지 않니?
어리고 예쁘다고 우쭐우쭐하는 그 꼴이 보기 싫지 않아? 네가 그 애보다 못 한 게 뭐가 있는데? 천연두에 걸린 건 네 잘못이 아니잖아? 그 여자도 천연두에 걸렸으면 너보다 훨씬 흉했을걸. 생각해봐. 자비라도 베푸는 것처럼 건방진 얼굴로 허락도 없이 크리스틴이라고 부르는 걸. 그게 좋아? 그 애의 그늘 밑에 들어가서 신발이라도 핥으면서 거짓 위세를 얻으면 앞으로 돌아가서도 행복할 것 같니?
붉은 혀가 날름날름 말을 뱉어냈다.
-전혀 그렇지 않을걸.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야. 열여섯 어린애보다는 네가 더 이블린에 대해 잘 알고, 외국인보다는 네가 훨씬 이블린에 중요한 사람이지. 안 그러니?
네가 원하는 걸 내가 줄게. 나는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아. 내가 너에게 지금 호의를 베푸는 것뿐이야. 네가 내게 대가로 지불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어. 지금 이 호의를 걷어차면 너는 정말 바보야. 넌 그저 행복해지기만 하면 되는 거란다.
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거울 위로 그녀의 손가락이 쭉 미끄러졌다. 놀랍게도 그녀는 거울에 비치지 않았다. 크리스틴은 입술을 떨었다.
-당신은 악마인가요?
-나는 릴레벨트란다. 네 이름은 뭐니?
-크리스틴이라고 하는데요.
-그래, 크리스틴. 내가 앞으로 너를 행복하게 해줄게. 먼저, 이 약부터 마시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약은 정말 짜고 쓴데다 비릿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걸 마시자마자, 얼굴의 분화구가 얕아지는 게 눈으로도 보였다. 실로 극적인 효과였다. 거울을 본 직후 크리스틴은 약을 양동이 째로 마셔도 좋다며 애원했다. 이미 의심은 씻은듯이 사라진 뒤였다. 하지만 여자는 너무 자주 먹는 것도 좋지 않다며 일주일 뒤에 또 약을 주겠다고 했다.
이틀 뒤면 그 일주일이 된다. 크리스틴은 그 날을 고대하며 배에 힘을 주었다. 펑퍼짐한 수련 수녀복을 너무 오래 입고 지내다보니, 스테이가 익숙지 않았다. 끈을 완전히 졸라맨 것도 아니건만. 허리가 너무 조였다. 하루 종일 앉아 지내다보니 살도 쪘다. 그 여자는 꾸준히 약을 먹으면 날씬해질 거라고 속삭였지만 얼굴과는 달리 살이 빠지는 건 크게 표가 나지 않았다.
"안, 이라고 했던가요?"
"예, 전하. 앤 폰 레르헨펠트입니다."
다행히 처음 듣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롈의 시녀는 말에 능했다.
"주, 중부 출신인가요?"
크리스틴은 아직도 말을 더듬거리는 게 부끄러웠다. 혀가 꼭 나무토막 같았다. 아롈을 사이에 두고 크리스틴의 건너편에 앉아 있던 앤은 고개를 숙였다.
"예. 작센 국왕 폐하의 은혜를 입었나이다."
"어쩌다가, 오, 오, 올케와 함께?"
"소녀의 진외조부(陳外祖父)께옵서 마담 라 세르의 조부 되십니다."
"어, 그러니까, 음. 올케의 조부라면. 보르디쪽 가계인가요? 거, 거기에 작센으로 시집간 사람이 있, 있었나?"
"앤은 제 친가 쪽의 오촌 조카입니다, 크리스틴."
아롈은 언제 자고 있었냐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아, 그, 그런가요?"
꼭 그렇게 면박을 주듯이 이야기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예. 앤의 아버지가 제 고종사촌이 됩니다."
"아, 그렇군요."
아롈은 별 말이 없이 다시 눈을 감았다. 크리스틴은 입술을 씹으며 말을 참았다. 마차는 정말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휴식 시간이라며 멈췄다. 신기하게도, 마차가 멈추자 마자 아주 곤히 자는 것처럼 보였던 아롈은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바로 마차에서 내리더니 미셸을 찾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크리스틴은 홀로 남겨져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었다.
세상이 전부 그녀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말 먹이를 먹이는 종자들도, 마차를 확인하고 있는 기술자도, 간이용 의자를 펼치고 있는 하인들도. 심지어 다른 마차에서 내린 나바르의 쥬스티느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녀는 자신의 시녀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었다.
크리스틴에게는 이제 시녀도 딸려 있지 않았다. 아마 이블린에서 그녀가 부리던 이들은 전부 시집을 갔을 것이 틀림 없었다. 말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 때 검은 머리의 처녀가 사박사박 걸어와 그녀에게 목례했다.
"안녕하세요, 도나 레알. 저는 마드리드 공작부인인 마리아라고 해요."
그녀가 그토록 유창한 동쪽 말로 인사하지만 않았더라면 크리스틴은 지금까지 무시 당한 설움을 한 번에 모아 터르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외국인'에게 화를 낼 정도로 대범하지 못했다.
"무, 무슨 일이지요?"
갈리아 어와 카스티야에서 사용하는 레온 어는 어족이 같아 말을 배우기 수월했다. 그래서 외국어를 배우길 게을리하는 남쪽의 숙녀들도 아주 간단한 동쪽 말의 일상회화는 서툴게나마 가능했다.
"도나 레알. 제가 제 남편에게 편지 한 장만 쓸 수 있도록 해주실 수 있을까요? 도나 레알께서는 로렌 황제 폐하의 장녀시라고 들었어요. 그렇게 높은 분이시니까, 곤경에 처한 제게 도움을 주실 수 있으리라고 믿어요."
크리스틴은 살짝 웃었다. 입가의 딱지가 터지면서 피가 나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대단히 저자세로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 크리스틴은 마담 르와이얄이었다. 황제의 장녀였다.
"다리가 아, 아프군요. 무슨 편지인지는 몰라도, 앉아서 얘기할까요?"
"이제 이틀만 더 가면 별궁에 도착합니다."
아롈은 갑자기 머릿속에서 쩌렁쩌렁 울려퍼지는 웃음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벨타가 혼자 이야기 하다가 혼자 웃는 것은 드문 일도 아니었다. 잠시 멈춰서 미간을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미셸이 따라 멈춰 물었다.
"어디 미령하십니까?"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마차 여행이 길어지자 도통 눈을 붙이지 못 하시어 그러신 듯하옵니다."
앤의 부연에도 아롈은 고개를 저었다.
"그저 곤한 탓입니다."
크리스틴은 정말이지 산만한 사람이었다. 어린 아이도 아니고 가만히 앉아 있질 못 했다. 그녀가 부스럭거릴 때마다 아롈은 잠이 들 만하면 깨고 들 만하면 깨버렸다. 아롈은 그럼에도 그녀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에 잠시나마 뿌듯함을 느꼈다.
"연인을 만날 날을 앞두고 잠 못 이뤄야 할 분은 따로 있는데 말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미셸이 빙긋 웃었다. 모자 아래 귓가에 늘어진 미셸의 금갈색 머리카락이 어깨에 걸친 붉은 망토와 좋은 조화를 이뤘다. 그는 꾸미길 좋아하는 남쪽 남자치고도 유난히 감각이 좋은 편이었다.
"낭군이 기다리는데 잠 못 이루실 만도 하지요. 하지만 잠이 모자라면 꽃처럼 고운 얼굴이 거칠어지십니다."
아롈은 필리프에게 혹독한 구박을 받고 난 뒤라 '낭군이라, 얼굴 한 번 본 게 다인데 무슨 낭군인가요?'라고 빈정거리지 않고 우아하게 웃었다.
"별궁에서 준비를 하게 되나요?"
"예, 이블린 근교 별궁에서 하룻밤 자고 새벽에 두 분 폐하를 알현하는 동시에 황가의 일원, 그리고 대공가의 일원들을 만나게 되실 겁니다."
"그렇군요. 마담 르와이얄은 나와 함께 가나요?"
"폐하의 명령이 아직 떨어지지 않았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마담 르와이얄은 따로 움직여 숲에서 기다리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아롈은 앤의 손목에 파란 보석이 달랑이는 목걸이 줄이 두 겹으로 감겨 있는 것을 똑똑히 곁눈질로 확인한 다음 미셸의 손을 놓고 먼저 사뿐사뿐 걸어 나갔다. 걸어 나간 쪽이 하필 햇살이 정면으로 드는 쪽이라 눈이 부셨다. 앤이 급히 따라와 뒤에서 커다란 양산을 받쳐 들었다.
아롈은 빙글 뒤로 돌았다.
"미셸. 전에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나요?"
"전에 그 여자라면, 아. 마드리드 공작부인 말씀이십니까?"
"마드리드 공작부인?"
"전하. 마드리드 공작가는 동쪽 카스티야의 방계 가문이옵니다."
"안다. 그런데 그 가문이 지금 왜 나오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제가 보호하고 있는 아가씨가 마드리드 공작부인이라고 하더군요, 아롈. 아는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그런 줄 알았는데요."
아롈은 전에 미셸에게 화를 냈다고 필리프에게 꾸중을 들었던 일이 생각나 움찔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셸은 고개를 돌리고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셸. 그 대답에 앞서 나는 질문을 했고 대답을 듣고 싶은데요."
"아, 죄송합니다. 그 아가씨는 아직 제 보호 하에 있고 제 편지와 그 아가씨의 편지, 그리고 용모파기를 확인을 위해 동쪽으로 보냈습니다. 그녀 자신은 HRH 공작부인의 작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를레앙의 기수가문의 여식과 같은 대우를 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틴의 더듬거리는 말을 항시 듣다가 똑 떨어지는 대답을 들으니 귀가 다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마담 크리스틴은 요즘 점점 나아지기는 해도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그렇군요. 요즘은 무얼 하고 있나요?"
"제가 시위를 붙여놓았고 특히 전하께서 계신 곳은 가지 말라 시위에게 단단히 일러놓았기 때문에 조용히 살고 있습니다. 요즘은 거의 방 안에서 나가지 않고 잠시 산책만 하고 있다고 합니다."
백작녀 밖에 안 되는 신분 주제에 대공을 유혹한 천하의 요녀인 헬레네의 딸이라 틀림없이 미셸에게 꼬리를 칠 줄 알았는데 조용히 지내고 있다니 의외였다.
하지만 엉덩이로부터 정수리까지 타고 올라오던 불길함은 아직도 몸에 남아있었다. 아롈은 차분하게 물었다.
"정말 조용히 살고 있나요?"
"예."
"동쪽에서 답이 오면 어떻게 처분할 예정이지요?"
"진실이면 그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마땅하겠으나, 거짓이라면 감히 군주를 기만한 죄로 일벌백계할 것입니다."
마리야 파블로브나 유리예프스카야는 파블 1세의 딸이었다. 키예프에서 막 돌아왔을 때 시녀들이 그녀가 더 여대공 같다며 수군거리던 것을 기억한다. 뺨도 통통하고 당당하다고. 그 아이의 손에 이끌려 역시 천것인 알렉세이와 셋이 공놀이를 했던 치욕스러운 기억이 있었다.
"군주기만죄라. 처형하나요?"
"전하. 새신부가 그리 불길한 단어를 입에 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옵니다."
앤의 말을 미셸이 따로 부정하지 않는 것을 보면 처형이라는 뜻이었다. 아롈의 기분이 가라앉아 있자 미셸은 이런저런 말을 떠벌리기 시작했다. 숲에 들어가서 인사를 하고 그 다음날 세례를 받은 다음 또 그 다음날에 정식 예식을 할 거라고 남들 다 아는 말을 반복하질 않나, 꽃처럼 달처럼 혼인식에서 고우시려면 지금부터 맘고생 하지 말고 잘 먹고 잘 자야 한다는 아첨을 하질 않나.
아롈이 그 갖은 노력을 보고 성의를 봐서 희미하게 웃자 결국 산책은 리젤로트에 대한 찬양으로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