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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6. 가시 장신구 (2)


 세시안은 비스듬히 벽에 기대려다가 허리를 폈다. 예복을 구기고 싶지 않았다.

딱 하나 있는 창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먼지들이 춤을 추었다. 이블린에 아무리 하인과 하녀들이 많다고 한들 모든 방을 먼지 하나 없이 쓸고 닦는 건 불가능했다. 특히 이 '왕의 서재'는 몇 년에 한 번 열릴까 말까한 곳이었으니. 이 방이 열린 것은 오 년만의 일로, 마지막으로 열린 날에 그와 루이즈 마리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왕의 서재는 발루아 가문이 올랑 지방의 왕일 적부터, 황제로서 대관하여 일곱 가문의 수장이 되어 이블린 궁이 호화로운 세 개의 건물로 증축된 지금까지 왕의 서재는 이블린 궁에 있어왔으며 황실의 직계가 결혼식을 올릴 때 사용하는 방이었다. 작은 팔각형의 방에는 벽마다 책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세시안은, 이곳에 벌써 신랑으로서 선 것이 네 번째였다. 처음은 마리 제피린느와의 열 넷, 그 다음은 카트린느와 결혼식 아닌 결혼식을 올렸던 스물, 그 다음은 루이즈 마리와 결혼했던 스물셋, 그리고 지금은 스물여덟.

나이는 두 배로 먹었고, 결혼식 경험은 네 배로 늘었지. 그는 고소를 머금었다.

똑, 똑, 똑.

"들어오세요."

"세르."

가문의 색인 초록색 가운을 걸치고 있는 처녀는 그가 마주하기 다소 껄끄러운 상대였다. 그러나 그는 매끄럽게 웃어보였다.

"말씀하세요. 로르쉘의 아가씨."

샤를루아 공작 필리프의 장녀이자 로르쉘의 아가씨인 소피는 치맛자락을 갈무리하며 빙긋 웃었다.

"마담-라-세르의 차비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부디 양해해주시길 청한다 하셨습니다."

"이런 날 여인에게 아름다움이 얼마나 중요한 일일지는 익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디 서두르지 마시라 전하십시오."

"마담을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깔끔하게 돌아섰다. 소피는 국내에 있는 '자격 있는' 여인 중 자신의 의지로 그와 혼인하고자 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보르디 출신이었으므로, 그녀가 예를 지키는 한 가장 적극적으로 내보인 의지는 황후에 의해 묵살 당했다.

요즘 여섯 대공가의 균형은 위험할 정도였다. 부황은 황후가 대놓고 보르디를 차별하는 걸 조장하지도 않았지만 막아주지도 않았다. 그나마 이 결혼으로 기울어진 저울이 조금이라도 바로설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여섯 대공가의 균형이 크게 깨질 때마다, 로렌은 내전에 시달렸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문 앞에 대기하던 미셸이 들어왔다. 그는 문을 닫고는 대뜸 투덜거렸다.

"우리 선조는 칼만 잘 썼지 미적 감각이라고는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던 게 분명해."

세시안은 단숨에 어깨를 늘어뜨렸다.

"또 그 놈의 노란색 타령이야? 오를레앙의 선조를 탓하기 전에 이런 전통을 만든 미남왕 앙리부터 원망하지 그래."

"우리 가문의 상징색이 붉은색이었다면 내가 이 전통에 불만을 가졌을 리 없잖아?"

미셸은 오를레앙의 상징색이 노란색이라는 이유로 항상 들러리 복장을 불만스러워했다. 만일 그에게 사랑스러운 여동생이라도 한 명 있었더라면 당장에 들러리의 영광을 떠넘겼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외동아들이었다.

"다시는 안 입게 해 줄게."

진심이었다. 미셸은 입매를 살짝 끌어내렸다.

"그럼 미네트나 마담 르와이얄의 결혼식에는 누가 나가라고? 푹 삭아 고린내가 나는 우리 아버지께 나가시라고 할까? 부르고뉴 대공을 봐. 나이가 서른다섯인데 가문에 남은 직계가 없으니 아직까지 들러리 신세. 이래서 애는 많을수록 좋다는 거야."

세시안은 부르고뉴 대공자인 조카를 떠올렸다.

"큰애가 아직 열 살인데 어쩌겠어. 그래도 사오 년만 더 고생하면 되겠지."

사실 미셸은 지금 당장 애를 얻는다 해도 서른 셋까지는 들러리 신세였지만, 세시안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똑똑똑.

또 노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문이 딸깍 열렸다. 정말 다행히도 이번에 나타난 이는 차가운 얼굴로도 유명한 부르고뉴 대공이 아니었다. 미셸이 부러워 마지않을 붉은 예복을 걸친 소년의 뺨은 흡사 능금처럼 토실토실했다.

"세르."

"일어나세요, 베리 공작."

오베르뉴 대공의 아들인 베리 공작 샤를은 이제 겨우 열다섯, 새신부보다도 어린 토끼 같은 소년이었다. 그는 한 눈에 봐도 잔뜩 긴장해 있어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무슨 일입니까?"

"세르, 가장 신실하신 두 분 폐하께옵서 대성당에 들어서셨다는 소식입니다. 마담 미네트가 수행했다 합니다."

"크리스틴과 리젤로트도 같이 갔습니까?"

"마담 르와이얄과 마담 리젤로트가 함께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전령에게 듣지 못하였습니다. 확인하고 올까요?"

잠시 불안해졌다. 세시안은 요즘 토라져 있는 리젤로트와, 십 년 만에 돌아와 예법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크리스틴을 한 번씩 떠올려보았다. 그래도 설마하니 이런 날에 무슨 문제를 일으킬까. 리젤로트는 제멋대로였지만 적어도 공식 석상에 불참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오를레앙 대공비를 도와 이번 결혼식을 여는 데에 크게 힘썼다. 그리고 크리스틴은, 세시안은 잠시 눈매를 찡그렸다. 그 아이가 대체 어땠더라?

"아닙니다. 식이 곧 시작할 테니. 리무쟁 공작. 베리 공작과 함께 나가서 말동무라도 해주겠어요?"

혼자 있고 싶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미셸은 친구로서의 그 어떤 장난스러운 행동도 없이 베리 공작을 데리고 나갔다. 혼자가 된 세시안의 머릿속에 미셸의 말이 울렸다.

-그러니까 애는 많을수록 좋다는 거야.

지금 황실의 직계 남성은 그 하나뿐이었다. 앙투안 그 아이가 있다고는 해도 어차피 사생아였다. 앙투안의 계승권은 그야말로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나 효력이 있을 임시방편일 뿐이었으므로, 세시안은 당장 아들이 필요했다.

나이가 스물여덟인데도 그는 몇 번의 실패 때문에 아이가 하나도 없었다. 마리 제피린느가 낳아주었던 딸이 일주일 만에 숨을 거둔 후 그의 아이를 잉태한 여자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마리 루이즈와는 삼 년 간의 결혼 생활을 했는데도 그녀는 그 흔한 유산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체면 문제와 사생아라도 일단 보라는 부황의 압박으로 두었던 다섯 명의 정부들도 그의 아이를 잉태한 적은 없었다. 그녀들의 문제는 확실히 아니었다. 그 다섯 명 중 네 명은 그와 만나기 전이나, 그와 헤어진 후에 출산을 경험했다. 문제가 있다면 그 자신에게 있었다.

세시안은 발끝을 조금 움직여 카펫의 결을 바꿨다가 다시 돌려놓는 의미 없는 발장난을 계속했다. 반쯤은 포기했다고 생각했건만, 이만큼이나 초조했던가.

어머니는 아버지도 이 나이에 큰 형-세르 루이 페르디낭-을 얻었으니 걱정할 것 하나 없다 달랬지만, 그와 아버지는 상황이 달랐다. 아버지에게는 남자 형제가 세 명이나 있었고, 무엇보다 결혼 전부터 정부에게 본 사생아 딸이 있었다.

루이즈 마리와의 삼 년, 그 때는 정말로 여유가 없었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바빴다. 식민지에 갑작스런 전염병이 터졌다. 그로 인해 식민지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던 식량 생산량이 크게 흔들렸다. 설탕이나 금이나 상아 같은 것들은 크게 언급할 만 한 거리도 아니었다. 밀이 부족했다. 로렌 본국을 위해 최대한 밀을 끌어오고 식민지를 놔두느냐, 아니면 뒷수습을 위해 본국의 식량 소비량을 줄이느냐. 어려운 선택이었다. 부황이 폐렴에 걸려 앓아누웠을 때였다. 굉장한 압박감이 그를 짓눌렀다.

그는 아내를 다그쳤다. 언제쯤 아이가 생길까요? 자신이 꽃나무 뿌리에 독을 부었다는 사실을 그 때는 몰랐다.

사실 다 변명이었다. 그가 얼마나 바빴든, 책상 위에서 거꾸러져 죽은 게 아닌 이상 아내가 신께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를 짓도록 방치, 혹은 조장한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었다. 퉁퉁 부어있던 얼굴을 보고 처음 느낀 혐오감은 그를 짓누르는 족쇄였다.

그는 마음을 정리하며 넓지도 않은 서재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정말 다행히도 그는 나이를 먹은 어른이었고, 덕분에 그는 신부가 뒤늦게 도착했을 때 최대한 상냥한 얼굴로 웃을 수 있었다.

 

"언니!"

리젤로트는 치맛자락을 감아쥐고 달렸다. 복도의 타일이 구둣바닥과 부딪치며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그녀의 시녀들이 허겁지겁 종종걸음을 쳐 따라왔지만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기다려 주세요, 언니!"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성큼성큼 걷던 마담 르와이얄 크리스틴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으므로, 돌진하던 리젤로트는 거의 그녀와 충돌할 뻔 했다. 아슬아슬하게 발걸음을 멈추자 파란 장미로 장식한 올림머리가 풀려 땀에 젖은 목덜미로 떨어져 내렸다. 리젤로트는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일이니,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크리스틴의 얼굴은 가면을 쓴 것처럼 딱딱했다. 지독히도 낯설었다. 이 사람의 얼굴이 이랬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크리스틴과 그녀 사이에는 오 년의 나이차가 있었다. 크리스틴이 이블린에 있을 적에, 그녀는 막 무도회에서 밤새 춤을 출 나이였고, 리젤로트와 미네트는 아직 어려 어른들을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리젤로트는 친언니와 대화한 시간이 열여섯 짜리 새언니와 얼굴을 맞댄 시간과 얼마 차이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 말이 없으면 가보려무나."

"잠시만요!"

주인을 따라잡은 시녀들이 후다닥 머리손질을 하는 동안 리젤로트는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골랐다.

"언니가 화가를 데려가셨다고 들었어요."

"그래. 내가 데려오라고 명령했단다. 안 되니?"

"언니. 물론 언니는 화가를 언제든지 불러들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분이에요. 하지만 오늘만은 그러시면 안 되죠!"

"왜 안 되니?"

"언니!"

그녀는 빽 소리 질렀다.

"오늘은 오라버니의 결혼식 날이에요. 밑그림을 그리기로 한 화가를 멋대로 빼가시다니요! 하다못해 저나 이모님께 양해를 구하셨어야죠!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신성한 주님께 맹세컨대 언니는 짐작도 못 하실 걸요!"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급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와 달리 크리스틴은 시종일관 차분했다. 아니, 차분해보였다.

"왜 내가 너나 오를레앙 대공비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 거니?"

"그야 저와 이모님이 이 결혼식의 행사를 주관하니까요."

"자비관의 여주인은 가장 신실하신 황후 폐하시지. 언제부터 일개 마담과 대공비가 세르의 결혼을 주관하게 된 거야?"

리젤로트는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하고 똑같은 눈높이에 있는 큰언니를 노려보았다. 언니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시면서! 그러나 아직까지 조롱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은 남아있었다.

"언니. 지금 그런 세세한 일을 따질 겨를이 없어요. 데려가신 화가를 돌려주세요. 언제 식이 시작할 지 아무도 모른다고요. 만일 언니와 실랑이를 하고 있는 동안 식이 시작되어 그림이 남지 않는다면 언니는 분명히 후회하게 되실 거예요."

"마담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지금 마담 르와이얄인 내게 먼저 말을 건 것도 모자라 협박을 하는 거니?"

리젤로트는 하, 숨을 내뱉었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물론 마담 르와이얄, 황제의 장녀는 차녀 이하의 다른 마담들보다 지위가 높았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이블린에서 문장에 파란 장미를 새겨넣은 남매들이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단 말인가? 부르고뉴 대공비인 작은언니는 물론이요, 세르인 세시안조차 리젤로트와 미네트에게 그런 예법을 강요하지 않았다.

"너마저도 내게 이리 무례하구나. 다들 그렇지. 허울 좋은 마담 르와이얄이라 하여 고개를 숙일 생각조차 않더구나. 수도원에서 십 년을 지내 곰팡내가 난다 하여 내가 두 분 가장 신실하신 폐하의 장녀라는 사실이 사라진다더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리젤로트는 날카롭게 비꼬았다.

"언니. 십 년 동안 수도원에서 신앙을 오롯이 갈고 닦으시느라 그 '곰팡내'가 아직 떨어져나가지 않았다는 건 굳이 설명해 주실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 그 부채만 봐도 모두가 알 수 있거든요! 요즘 이블린에서 그런 동부식 부채를 들고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크리스틴은 부채를 꺾어 바닥에 던져버렸다. 가느다란 살이 무참히 꺾이고, 얇은 비단이 뜯겨나가 안쓰러운 모양새였다. 그녀의 눈은 형형하기 짝이 없었다.

"네가 감히."

리젤로트가 한 번 더 쏘아붙이려는 순간 또각또각 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신분 낮은 이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내는 인기척에 익숙한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인상적'이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만든 것 같았다. 동부 사람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호박색 눈도 그렇거니와, 키도 웬만한 사내보다 커서, 얼굴을 보기 위해 리젤로트가 고개를 꺾어 올려야 할 정도였다. 그녀가 우아하게 무릎을 굽혔다 폈다.

크리스틴이 물었다.

"무슨 일이지?"

"마담 르와이얄, 그리고 마담께 인사 올립니다. 분부하신 대로 화가들이 대성당을 둘러볼 수 있도록 안내해주고 오는 길입니다. 그들은 전하의 명대로 결혼식 장면을 하나도 빠짐없이 화폭에 담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더군요."

리젤로트는 기가 막혀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시녀들도 입을 손으로 가렸다.

크리스틴은 대단히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알았다."

"더 명하실 것이 있으신지요?"

"아니, 없단다. 서두르자꾸나. 이러다 식을 놓치겠어."

크리스틴은 몇 걸음 떼다가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주름 하나 없이 뻣뻣한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안 가니? 네가 그리 찾아 마지않던 화가가 이미 도착해있다고 하는구나."

리젤로트는 할 말이 너무 많아 무엇부터 얘기해야 할 지 도저히 결정할 수 없었다.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그런 그녀가 마침내 정리를 마친 건 이미 크리스틴과 검은 머리의 여자가 복도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지금 몇 시야?"

그녀의 시녀인 베아트리스가 회중시계를 꺼냈다.

"오후 세 시 십오 분입니다, 마담."

벌써 늦었다. 리젤로트는 분을 참고 다시 한 번 복도를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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