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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6. 가시 장신구 (5)


 옐레나 여제는 지도를 쭉 살펴보았다. 양피지 위에 펼쳐진 드넓은 세계에는 정교하게 조각한 상아 말들이 서있었다. 군용 지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복잡한 숫자나 등고선 따위는 없었으나. 시중에 나도는 장식품과 달리 정교한 축척을 통해 제작한 진짜 지도였다. 지도 여기저기에는 짤막한 단어들이 적혀있었다.

이 방식은 시할머니인 안나 여제가 고안한 것으로, 상아 말들도 그녀가 직접 도안을 그려 제작한 고급품이었다. 여제는 릴레벨트 해 위에 서펜트를 놓았고, 서펜트를 포위하듯 범선 여섯 척을 빙 둘러 놓았다. 이는 선장과 필리프로부터 보고를 받은 릴레벨트 해의 해룡의 부활과, 해룡을 무찌르기 위한 전열함 여섯 척을 뜻했다.

로렌을 세운 미남왕 앙리는 변변한 대포도 없던 시대에 칼을 가지고 용을 잡았다. 그런데 90문 전열함으로 용을 잡지 못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여제는 그렇게 대신들을 설득했다.

여제는 피아스트에 서 있는 기사 말의 발치에 ​t​r​i​m​e​s​t​r​e​(​3​개​월​)​이​라​고​ 적었다. 대(對) 피아스트 전쟁을 일찍 끝내야 할 필요가 생겼다고 해군 장관이 간언했다.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웨데나, 작센 등 릴레벨트 해를 접하고 있는 나라들이 자국 상선의 보호를 위해 군함을 보낸다면 코시카의 사략선이 힘을 잃게 된다. 따라서 릴레벨트 해의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언제든 전쟁 선포가 가능해야 했다.

코시카의 황도는 릴레벨트 해와 접하고 있는 항구 도시였다. 여제는 말들이 들어있는 상자를 뒤져 가장 가까운 항구인 소피야부르크로부터 황도까지 이어지는 해안선에 작은 배를 줄줄 올려놓고, 관련 서류의 번호를 기입했다. 이제 코시카의 모든 상선은 내해 무역을 금하는 칙령을 전달받아, 백해를 통해 다녀야 했다. 여제는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순시선을 늘리는 서류에 서명했다.

로렌과 달리 코시카는 귀족의 사병을 금하고 있었지만, 코시카 군 장교의 대부분은 귀족의 자제들이었다. 그 중의 상당수는 소피야 여제의 전례에도 불구하고 키옌 가문이 아닌 이가 옥좌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불편해했다.

그녀의 딸은 실각했지만, 콘스탄틴 대공, 그리고 폐주의 딸들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었다. 작센의 국왕도 코시카의 계승권을 가지고 있으며, 하다못해 카스티야에 시집간 사생아도 죽이지 못했다. 그녀는 파블 1세의 딸이므로 만에 하나 회랑에 들어가게 된다면 바로 계승권을 인정받는다.

여제는 그 때 왜 그녀가 그 결혼에 힘을 실어주었을까 후회했다. 파블 1세는 그가 아끼는 딸에게 HRH 공작부인의 지위를 주고 싶어 했다. 그녀가 사생아임은 공공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북쪽에서 그녀가 HRH로 불릴 수 있는 혼처에 시집가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사생아에게 관대하기로 한 혼전의 약속 때문에 이반 3세를 설득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카스티야와의 전쟁이 일어나면 좋으련만. 카스티야는 너무 먼데다가 아무런 명분이 없어 전쟁을 일으킬 수 없었다. 하지만 아쉬운 대로 용도 괜찮았다. 필리프의 연락을 받았을 때, 여제는 뛸 듯이 기뻤다.

-고모님. 저는 그 흉물스럽고 두려운 생물이 나타난 것이 제 탓이라고 짐작했습니다만, 아니었습니다. 그 생물은 제가 아닌 따님에게 더 관심을 보이며, 그녀가 각성하지 않은 마법사라고 주장했습니다.

딸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긋지긋했다. 그리고 이반이 죽자마자 나타난 게 소름끼쳤다. 그래도 복도에 서서 그녀가 눈길을 주기만을 기다리는 아이였을 때에는 참을 만했다. 이반이 죽지만 않았어도 영영 받을 일이 없었을 체사레브나 자리를 딸이 포기했을 때, 여제는 간만에 편히 잠들었다. 그 아이를 작센에 내려놓은 배가 돌아오자 그야말로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후련하고, 무겁던 몸이 가뿐하기까지 했다.

정말 그 아이가 용을 불러내 군사력을 소모할 명분을 만들어준 거라면, 지금 느끼는 감정이야 말로 여제가 딸을 낳은 뒤 그녀에게 처음으로 받은 기쁨이었다.

여제는 미리 써놓았던 편지를 찾아 서랍을 뒤졌다. 마지막으로 내용을 한 번 확인하고, 밀랍을 봉투에 부어 자신의 문장으로 봉인했다. 국장인 고양이가 아니라 개인의 문장-청포도와 지팡이와 독수리-을 사용하는 것은 공식적인 문서가 아닌 지극히 사적인 편지임을 뜻했다.

안타깝게도 이 편지는 필리프를 통해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약 두 달 이상 지나야 수신인에게 도착할 터였다.

그녀는 로렌에 서 있는 신부의 말 아래에 ​l​e​t​t​r​e​(​편​지​)​라​고​ 적고, 편지봉투에도 글씨를 휘갈겼다.

-사랑하는 어머니로부터.

 

멘 공작 루이 앙투안은 인지된 아들로서 결혼식과 피로연에 참석함이 옳았지만, 병을 사유로 정중히 초대를 거절했다. 마담 리젤로트는 앙투안을 벌레 보듯 싫어해서 바로 불참을 허락했다. 그래서 그는 몸처럼 가지고 있던 장검도 방에 놓아두고 건물 안을 한량처럼 어슬렁거렸다. 기사 '앙투안 드 클라리 경'은 오를레앙 소속으로 되어있어 연회의 경비를 서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는 불꽃놀이가 시작되면 잠깐 들어가 이복형과 형수에게 인사만 하고 나올 작정이었다. 한창 연회가 진행되는 도중에 들어가는 건 너무 눈에 띄었고, 또 그의 혈색이 너무 좋았다. 앙투안은 연회장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음악 소리를 들으며 계속 서성였다. 십 년의 세월은 길어서, 어린 앙투안이 샤를과 휘젓고 다니던 그 곳이 아닌 듯했다. 커다란 건물의 뼈대는 그대로였지만, 커튼을 바꾸고 벽지와 카펫도 바뀌었다.

그 놈의 불꽃놀이는 언제 시작하는 걸까. 슬슬 답답해졌다. 몸에 딱 달라붙도록 재단된 코트며 바지, 실크스타킹은 입을 때마다 어색했다. 호위 등의 특별한 일이 없다면 당연히 군주가 참석하는 연회에서 무장은 금지였다. 갑옷과 서코트는 말할 것도 없었고, 헐렁한 튜닉을 입을 수도 없었다.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부츠를 신는 것도 금지였다. 무릎까지 오는 부츠라면 날밑이 없는 단검도 들어갈 수 있었다. 앙투안은 별 수 없이 금장식이 달린 가죽 단화를 신어야 했다. 단화는 새 것이라 발가락이 쓸리고 까져서 아팠다. 길이 잘 든 부츠와 튜닉이 이토록 그리울 수 없었다.

막 정의관 바깥으로 나온 앙투안은 자비관에 들어가려는 앤 폰 레르헨펠트와 마주쳤다.

앙투안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레르헨펠트 양."

"예? 예. 클라리 경. 안녕하세요."

"제가 놀라게 해드렸다면 실례했습니다."

그녀는 과할 정도로 깜짝 놀랐다.

"저는 그저, 이곳에서 아는 분을 만나리라곤 생각도 못 했던 것뿐이에요."

"그러십니까. 오늘 아름다우십니다. 특히, 그 목걸이가 잘 어울리시는군요."

여성이란 원래 저리도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걸까. 작센에서의 형수가 그랬듯, 앤도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여인들에 대한 예의에 무지한 그도 한 마디 얹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그녀는 활짝 웃거나, 수줍어하는 대신 어깨를 움츠렸다.

"감사합니다. 저, 전하께서 시키신 일이 있어서."

"예. 들어가십시오."

앙투안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앤은 총총히 사라져갔다. 까마귀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파란 옷 위로 흩어져 있었다. 기사단 동기들 중에 그녀를 흠모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그 주인만큼은 아니더라도, 레르헨펠트 양은 귀족의 피를 이어받은 아름다운 처녀였다. 더군다나 구름보다 높이 있어 감히 말을 걸 수 없는 마담 라 세르와 달리 그녀는 우연히 마주쳐 말을 걸면 곧잘 상냥하게 대꾸해주기도 해서 인기가 있었다. 평소에는 수수하게 차리고 다니더니, 오늘은 독보적으로 눈에 띄었다. 특히 목걸이가 백미였다.

목걸이?

앙투안은 자비관으로 들어갔다. 그의 얼굴을 아는 근위대원들은 앙투안을 막지 않았다. 앙투안은 성큼성큼 걸어 계단으로 향했다. 자비관은 정의관과 쌍둥이 건물이어서 황제의 침실은 황후의 침실과 대칭인 위치에 있었다. 그러니 마담 라 세르의 침실도 세르의 침실과 같은 층에 있으리라. 사람의 유무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하는 다른 방들과 달리 황제, 황후, 세르와 마담 라 세르, 알자스 공작과 마담 르와이얄의 방은 그 인원의 유무에 상관없이 항상 마련되어 있었다. 몇몇 시녀들이 그에게 목례를 하고 지나갔다.

앙투안은 기억을 더듬어 사 층으로 올라가다가 계단에서 내려오는 앤을 마주쳤다.

"레르헨펠트 양!"

"클라리 경. 자비관에는 어쩐 일이신가요?"

앤의 흰 목은 텅 비어 있었다.

"목걸이는, 어찌 하셨습니까?"

"예? 그, 그건 제 방에. 무슨 목걸이 말씀이십니까?"

앙투안은 되물었다.

"제가 맡긴 목걸이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분명히 전하께 ​전​해​드​리​셨​습​니​까​?​"​

앤은 얼굴이 발갛게 물든 채 앙투안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경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소녀는 모르겠사옵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왜 그 목걸이를 레르헨펠트 양께서 하고 계셨던 것인지."

"전하께서 제게 하사하셨습니다."

"그러신지요, 제가 직접 마담 라 세르께 사실을 고하고, 다시 한 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클라리 경. 오늘은 경사스러운 결혼식이옵니다. 이런 날 자격도 없는 경이 회장에 난입하시겠다는 건가요?"

"제 안위는 레르헨펠트 양께서 걱정해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주인의 물건을 가로챈 시녀의 안위를 더 염려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앙투안은 그대로 목례도 하지 않고 뒤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기다려주세요, 경!"

그러나 두세 단을 채 내려가기도 전에, 뛰어내려온 앤이 앙투안의 팔뚝을 잡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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