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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6. 가시 장신구 (4)


 이른 저녁 만찬은 초여름의 정원에서 벌어졌다. 이 만찬을 위해 후원의 풀을 뽑고 판판한 반석을 까는 거대한 공사를 치렀다. 커다란 원탁이 몇 개나 놓였다. 탁자에 깔린 식탁보는 가는 실로 손뜨개를 한 것이었다. 가운데에는 흰 실로 황실 문장을 짜넣었고, 가장자리에는 파란 실로 발루아의 푸른 장미 도안을 넣었다. 탁자 한가운데에 꽂힌 꽃은 연분홍의 작약이었다. 한 사람 당 열 개도 넘게 배정된 식기는 당연히도 은이었다. 가장 말석의 귀족에게까지 주석잔이 아닌 유리잔을 돌렸다는 것만 봐도 이 결혼식에 황실이 얼마나 굉장한 액수를 지불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황후와 마담 미네트가 건강을 핑계로 자리를 비웠으므로, 크리스틴의 양 옆은 텅텅 비어있었다. 건너편에는 세르와 마담-라-세르가, 한 자리 건넌 옆 자리에는 리젤로트가 앉아있었다. 그들은 모두 고요히 황제를 기다렸다. 황제가 참석하는 자리에서는 황제가 입을 열기 전에 아무도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이블린의 불문율이었다. 황제가 마지막으로 자리에 착석하자, 모두들 일어서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외국의 사신들을 제외한 로렌의 모든 귀족이 충성의 표시로 무릎을 꿇었다. 크리스틴도 마찬가지였다.

"자, 자. 모두 앉으시오."

작은 소란이 일었다.

"내 아들의 결혼을 축복하기 위해 먼길을 와 이 곳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로렌의 이름으로 감사를 표하는 바요."

황제의 목소리는 묵직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부디 오늘 밤은 이 이블린을 들어먹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즐기시오."

크리스틴은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가장 신실하신 폐하, 경애하는 아버지. 부디 제게 미숙하게나마 오라버니와 새 올케언니를 위해 건배를 외칠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어요?"

"물론이다."

크리스틴은 마담-라-세르, 아롈과 눈이 마주쳤다. 아롈은 흰 옷 위로 붉은 어깨띠를 두르고 가슴에 훈장을 단 것만 빼면 성당에서 걸어나왔을 때의 옷차림 그대로였다. 아롈은 그녀가 정면으로 쳐다보는데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크리스틴은 열여섯 어린 외국인 여자가 지켜줘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로렌의 모든 권위있는 귀족들이 모여있는 지금이야말로 그걸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다. 마담 르와이얄이 돌아왔다는걸.

"가장 신실하신 황후 폐하를 대신하여 제가 잔을 들 수 있다는 사실이 황송해서 견딜 수가 없네요"

죽 정원을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부르고뉴 대공의 옆에 앉아 있는 여동생이라든가, 대공가의 일원들은 대부분 크리스틴이 아는 사람들이었다. 얼굴은 낯설지만 누구인지 짐작이 가는 사람도 꽤 많았다. 그녀는 한 눈에 찾는 사람을 확인했다. 그녀는 마치 하녀인 것처럼 자연스레 정원에 섞여들어 조용히 서 있었다. 그녀는 옆에 화가를 데리고 있었는데, 화가는 열심히 크리스틴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크리스틴은 최대한 아름다운 그림이 나올 수 있도록 잔을 높이 들었다.

"부디 남쪽과 북쪽의 결합이 영원하기를. 주님 앞에서 맺은 약속이 빛바래는 일 없기를. 자, 모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알자스 공작을 위해서 건배할까요? 알자스 공작-로렌의 제 2 왕위계승권자. 흔히 세르의 장자에게 주어지는 작위-의 탄생을 위하여!"

"알자스 공작의 탄생을 위하여!"

크리스틴은 잔을 완전히 비우고 앉았다. 건배사를 시작으로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했다. 본궁에서부터 수백접시의 음식을 날라야 하는 시종들은 그야말로 다리가 부서질 듯 달려왔다. 그래도 상석부터 음식이 서빙되기 때문에, 말석의 귀족들은 차게 식은 음식을 먹는 걸 피할 수 없었다. 물론 크리스틴의 앞에 놓인 해산물 수프는 김이 올라올 정도로 따스했다.

이블린은 내륙에 있기 때문에 해산물은 비싼 음식이었다. 깊은 감칠맛이 입 안을 채웠다. 크리스틴은 만족해서 스푼을 내려놓았다. 금욕 수도원에 있을 때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음식이었다.

"어머나, 새언니. 포도주가 입에 맞지 않으신가요?"

아롈의 술은 입술만 적시고 내려놓은 모양새로 조금도 줄지 않았다.

"나바르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술을 즐기지 않습니다. 마담 르와이얄."

"모처럼 좋은 술인데 취향에 맞지 않는다 하시니 아쉽네요. 오라버니께서는 마음에 드시나요?"

세시안은 스푼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그래. 미묘한 단맛이 좋구나. 크리스."

"오라버니께서 분명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오라버니는 원래 술을 즐기시잖아요. 물론 방종하지 않은 선에서요."

리젤로트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어머나, 큰언니도 오라버니도 이 술이 마음에 드신다니 기뻐요. 제가 이 술을 얻어내기 위해 보르디 대공비에게 몇 통의 편지를 써야 했는지 상상도 못 하실 걸요."

크리스틴은 눈을 흘겼다. 황제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잔을 조금 흔들었다. 공기방울이 보글보글 솟아올랐다.

"이번에 리젤로트가 공을 많이 들였지."

"미네트와 어마마마, 이모님께도 많은 도움을 받았는걸요. 저 혼자 한 일이라고 치하하시면 민망해요. 다만 가장 고생하신 어마마마께서 건강 때문에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 하신 게 아쉽지요. 새언니가 너무 섭섭해하지 않았으면 해요. 어마마마께서는 건강이 그리 좋지 않으셔서요."

"물론입니다. 마담 리젤로트."

"그나저나 얼굴이 많이 좋아졌구나, 크리스틴."

"예, 아바마마. 포의 아가씨가 추천해준 의사의 솜씨가 실로 놀라웠답니다."

"여인이란 모름지기 아름다움을 갈고 닦아야 하는 법이다. 이리 다 컸으니 급히 네 혼처를 찾아봐야겠구나. 네 동생 오거스틴도 이미 결혼한 마당이니. 내 그간 수도원에 있는 네 소식을 들으면서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바마마께 심려를 끼쳐 송구할 따름이에요. 어찌 순명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크리스틴은 속으로 웃었다. 크리스틴의 혼사가 치러진다면 리젤로트의 혼사는 자연히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올해 세르의 혼사가 있었으니 다음 결혼식은 아무리 빨라도 내년, 그 다음은 내후년이었다. 대가문에서는 일 년에 두 번의 혼사를 치르는 것을 엄격하게 지양하고 있었다. 리젤로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마담 르와이얄은 저와 같이 이블린의 땅을 밟았습니다. 신앙에 기대어 청빈한 삶을 살다가 세속에 나오니 이 모든 것이 낯설 터인데 너무 이른 결정이 아닐는지요."

억양도 다 틀린 말로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아롈은 말을 할 때 가끔 머뭇거렸고, 억양도 지나치게 딱딱했다.

"아바마마. 친애하는 올케가 보기에는 제 자질이 부족한가 봐요."

"그런 뜻으로 받아들이셨다면 유감입니다만, 다만 걱정될 뿐입니다."

"크리스틴. 나도 오랜만에 본 네가 더 이블린에 있는 게 좋구나."

"비둘기 껍질이 바삭하게 잘 구워졌어. 요리사를 치하해야겠다."

황제는 입맛을 다셨다.

"식기 전에 어서 들거라. 주님께서 주신 신체가 강건해야 모든 것이 잘 풀리는 법이다. 수도원에서 생활하던 크리스틴도 그렇고, 새아가는 그리 가냘파서야 어디 춤이라도 한 곡 출 수 있겠느냐. 크리스틴의 혼사는 황후와 이야기해보고 결정하도록 하겠다."

"예, 폐하."

크리스틴이 보기에 아롈은 가냘프기는커녕 키만 멀대 같이 큰데다가 골격이 커서 거의 거인처럼 보였다. 아롈이 급한 대로 입으라고 빌려줬던 옷은 어깨며 치맛단이 한참 남아돌아 도저히 입을 수 없는 지경이어서, 크리스틴은 결국 쥬스티느의 옷을 빌려야 했다. 지금 입고 있는 저 옷도 내 옷에 든 옷감의 두 배는 썼을 텐데.

"예. 아바마마."

입에서 사르르 녹는 거위간을 음미하고 있는데 한 시녀가 와서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이냐."

"폐하. 마담 르와이얄이 소녀에게 명한 대로 화가를 데려왔사옵니다."

크리스틴은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이제야 왔구나!

화가는 양피지를 가죽 끈으로 철한 스케치북을 올렸다. 시녀는 그 스케치북을 받아 황제에게 넘겼다. 그러나 황제의 반응은 생각과는 달랐다.

"꼭 이걸 식사 중에 확인해야겠느냐?"

탐탁찮다는 황제의 반응에 당황한 크리스틴은 미리 할 말을 생각해두지 않아 말을 조금 더듬었다.

"아, 아바마마. 저, 그림은 주, 중요하니까요. 결혼식이니만큼 확인을 하시고 재가를 내려주셔야 채색을."

리젤로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결혼식이 다 끝나고 그림을 봐도 괜찮잖아요. 음식이 식어버리는 건 싫은 걸요."

신부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리스틴은 애타는 눈으로 오라버니를 쳐다보았다. 그야말로 이 자리에서 황제에 준하는 발언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세시안은 그녀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폐하. 크리스틴의 성의를 봐서라도 한 번 훑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 좋다."

황제는 스케치북을 몇 번 넘겨보고는, 가죽 끈 끄트머리에 묶어놓은 목탄으로 표지에 서명을 휘갈겼다.

"나쁘지 않구나. 너희도 한 번 보겠느냐?"

신랑과 신부를 한 번 거친 스케치북은 크리스틴의 손으로 넘어왔다. 송아지 가죽을 부드럽게 처리한 종이에 목탄으로 그린 그림은 훌륭한 솜씨였지만, 본래 목적은 그림이 아니었다. 이미 기분이 언짢아진 그녀는 무성의하게 그림을 훑어보았다.

생 아델라 성당, 신랑, 신부, 들러리들, 의상, 추기경, 그밖의 귀빈들. 대공들, 대공비들, 공작들과 아가씨들. 그리고 신부의 미뇽. 연회장. 황실 가족들. 특별히 잘 그리라고 미리 지시했던 건배의 그림에 머물러 크리스틴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나 평범하게 그리다니.

"어머, 큰언니. 너무 오래 보시는 것 아닌가요? 저도 좀 보고 싶은데요. 언니께서 특별히 지시하셨다는 그림이 어떤 건지 궁금하거든요."

크리스틴은 리젤로트에게 스케치북을 건네고는 물을 들이켰다.

마담 르와이얄이 돌아왔다. 아직 적응하기도 어려울 텐데 화가들을 섬세하게 챙기는 장녀다운 모습을 선보였다. 실수하지 않고, 말도 더듬지 않고 귀빈들 앞에서 흠잡을 곳 없는 건배사를 외쳤다. 괴물처럼 흉측하던 얼굴도 놀랍도록 깨끗해졌다.

그러나 크리스틴이 내심 기대하던 칭찬은 돌아오지 않았다. 일껏 들은 말이 '나쁘지 않구나'라니.

그녀는 '그 여자'가 있던 자리를 쏘아보았다. 그녀가 분명 이렇게만 하면 칭찬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구슬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없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저 나무 밑에 서 있었는데.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아도 노란 눈의 여인은 보이지 않았다.

 

후식을 다 먹었는데도 남편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남편은 사람 좋은 얼굴로 허허 웃으며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외교관으로서 유창한 남쪽 말을 구사했지만, 마리야는 무슨 말인지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동쪽 말과 남쪽 말이 유사하다곤 해도, 공부 없이 알아들을 수 있는 데에는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었고, 지금 오가는 대화의 수준은 비할 데 없이 높았다. 언뜻 들리는 밀이나 세금, 목재 같은 단어를 통해 내용을 유추하기에는 마리야의 지식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녀는 대화에 끼어들지 못 한 채 식탁에 놓인 술만 홀짝였다.

마담 르와이얄은 마리야가 살살 애교를 떨자 금세 넘어갔다. 마리야는 그녀에게, 남편인 마드리드 공작이 세르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이블린에 와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는 외교관이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보호자 노릇을 하던 잘생긴 남자는 마리야가 편지를 쓰는 걸 엄격히 금지했다. 그래서 그녀는 마담 르와이얄에게 크리스틴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크리스틴은 말벗이 되어주는 이에게 이 정도도 못 해주겠느냐며 흔쾌히 승낙했다.

마리야는 별궁에서 남편을 만나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겼다. 남편이 뭐라고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깐깐하게 굴던 잘생긴 남자는 마리야가 떠나는 걸 막지 않았다.

페드루스는 다시 돌아온 마리야에게 일말의 질책도 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객의 명부에 마리야의 이름을 적어 넣었고, 지난밤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와 몸을 섞었다. 간간이 느껴지는 어색함을 빼면 정말 완벽에 가까운 연기였다.

예전의 마리야라면 부정을 저지르고 부끄럽게도 집까지 나간 그녀를 감싸주는 남편에게 감동하여 어쩔 줄을 몰랐을 텐데, 지금 그녀의 마음은 흡사 돌처럼 싸늘했다.

'알려주지 않았어.'

아버지가, 어머니가, 오라버니들이 비참하게 목이 잘렸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아롈의 시녀가 비웃듯이 말한 바에 의하면 그 때는 분명 마리야가 집을 나가기 전이었다. 냉전기기는 했다. 마리야는 그 때 남편에게 질려서 한동안 잠자리를 거부했다. 그런 마리야를 이상하게 생각한 페드루스는 마리야를 비난했고, 서로가 한참이나 독설 어린 말로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켜야 할 정도와 선이라는 것이 있었다. 어떻게, 그녀의 부모님의 죽음을 숨겼단 말인가?

임종을 지키기는커녕 부고조차 알지 못하고 코시카로 떠나려던 생각만 하면 모골이 송연했다. 코시카로 떠났다면 마리야는 필시 옐레나 대공비-아니 이제 여제라고 했던가-의 손에 잡혀 목이 떨어졌겠지. 생각할수록 분했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오라버니들이 죽어갈 동안 마리야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북쪽에 가기만 하면 포근한 가족들의 품에 안겨 단잠을 잘 수 있으리라고, 지긋지긋한 결혼생활을 끝낼 수 있으리라고 그 믿음 하나만 품고 있지 않았던가.

아롈은 한참 상석인 곳에서 인사를 받고 있었다. 인사를 하려는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옆에 있는 여자가 귓속말을 하자, 아롈이 웃었다. 행복해보였다.

마리야는 벌떡 일어섰다. 앉아있던 남편이 대화를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무 포도주를 많이 마셔서 어지러워요. 조금 걷다 올게요."

남편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지 말라는 말만 하고 다시 대화에 빠져들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따라오겠다고 하면 귀찮아질 뻔했다.

마리야는 시녀 없이 홀로 미뉴에트 행렬의 근처로 다가갔다. 이 연회장에는 오대 조상까지 로렌에서 일한 이만이 하인으로서 일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카스티야 인과 결혼한 마리야가 오대 조상까지 로렌 인인 시녀를 거느릴 리는 없었다.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다른 남자가 춤을 신청해주기만을 기다렸다.

정원은 정말로 떠들썩했다. 식사를 마친 이들은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고, 으슥한 곳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여인들은 주로 앉아 있었고, 사내들은 서 있었다.

마리야는 주변을 정신없이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말을 걸어주는 이가 없어 시무룩하게 돌아섰다. 어쩔 수 없지. 얼굴도 머릿결도 이렇게 많이 상했는걸. 그녀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 마리야의 눈에 웬 노인과 이야기 중인 남자가 띄었다.

그 남자였다. 나바르에서 친절하게 그녀를 도와주고 기사를 빌려주었던. 그가 다녀가고 나자 잘생긴 남자가 마리야에게 내준 방의 질이 달라졌다.

마리야는 그에게 살랑살랑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못 들은 것 같았다. 마리야는 목소리를 더 높였다.

"안녕하세요?"

그제야 남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마리야는 애교 있는 강아지처럼 웃어보였다.

"안녕하세요, 경. 그 때는 정말 감사했어요."

마리야의 짧은 남쪽 말 실력으로는 이런 인사가 한계였다. 남자가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저, 기억 못 하시나요? 전에 저를 도와주셨는데요."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마드리드 공작부인 마리아예요. 그 때는 고마웠어요."

남자는 그 때처럼 말끔하게 웃었다.

"예. 공작부인. 리무쟁 공작에게 들어 무사히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연약하신 몸으로 제 결혼식에 참석해주신 것에 사의(謝意)를 표합니다."

그 긴 말 중 마리야의 귀에 들어간 말은 '제 결혼식' 뿐이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태자신가요?"

마리야는 로렌에서는 황태자 대신 흔히 세르라는 말을 쓴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남자는 진한 초록색 눈동자에 웃음기를 띨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은, 이 사람이 아롈의 남편이라는 뜻이었다. 마리야는 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분명 결혼식 내내 귀빈석에 앉아 있었건만 그녀가 본 것은 신랑의 뒷모습이 전부였으므로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실례했어요.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그 말은 일국의 공작부인쯤 되는 사람이 내뱉기에는 지나치게 비굴했으나 마리야는 길고 고상하게 말 할만한 실력이 아니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귀부인의 몸으로 남쪽에서 고초를 겪으신 데에 대하여 지극히 유감스러울 따름입니다."

마리야는 머뭇거렸다. 알아듣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그런 마리야의 곁에 누군가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카스티야의 국왕 폐하와 그 분의 후계자이신 아스투리아스 여공 전하를 대신하여 다시 한 번 경하 드립니다, 돈 치에르보."

남편이었다. 마리야는 입술 안쪽을 꼭 깨물었다.

"고맙습니다. 마드리드 공작이셨지요."

"예, 전하."

"공작부인께서 이 로렌의 땅에서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하셨다 들어 위로의 말을 건네던 중이었습니다. 심려가 많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남편은 허허 웃으며 자리를 피했다. 마리야는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 나갔다. 인적이 드문 구석에 다다르자 마리야는 동쪽 말로 소리 질렀다.

"놔요! 아파요!"

"제정신이야? 대체 어디에서 누구에게 꼬리를 치는 거야!"

꼬리라고?

"지금 뭐라고 했어요?"

마리야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당신은, 어떻게, 나한테."

잡혀있는 팔목에서 구더기가 기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런 사람을 남편이랍시고 살을 맞대고 삼 년을 넘게 살았다니.

그녀는 기가 막혀 웃음을 터트렸다.

"페드루스.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요?"

"짱알대지마. 내가 틀린 말을 했나? 왜 외국에 나와서까지 얌전히 있질 못 하는 거야!"

"당신은 다른 년이랑 안 잤어요? 내가 당신의 침실에서 놀아나는 계집들을 목격한 것만 열 손가락을 헤아려요! 그리고 정말 할 말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지금 그걸 끄집어냈나? 그 얘기는 이제 안 하기로 했잖아! 얌전하게 일을 돕지는 못 할망정 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주제에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는 거야. 남쪽에서는 함부로 말을 걸면 안 된다는 것도 안 배우고 시집을 왔어!"

"정말 할 말 없냐고요!"

마리야는 조리 있게 따지는 법을 몰랐다. 마리야의 어머니인 헬레네는 항상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 한다'고 했다. 좋은 곳에 시집가려면 예쁘고 어린 게 최고라고. 그래서 마리야는 제대로 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마리야의 고상하신 이복자매라면 틀림없이 비뚜름한 비웃음을 띠고 논리적인 말로 비아냥거렸겠지만, 안타깝게도 마리야에게는 그럴 만한 언변도, 순발력도 모자랐다. 그에 반해 그의 남편은 기름칠을 한 혀로 국가에 봉사하는 외교관이었다.

"나갔다 왔음 철이 들 때도 됐지 않았나? 아무리 당신이 어리다고는 해도 말이야. 세상 험한 건 좀 느꼈을 거 아냐. 당신의 이복 언니는 그렇게나 어른스러운데 보고 느끼는 것 없어?"

그야말로 폭언이었다. 마리야는 분에 겨워 눈물을 글썽였다.

불공평해. 아버지는 어째서 나를 이런 남자에게 시집보내신 걸까. 동쪽으로 시집을 갔을 때 마리야는 열세 살이었다. 조혼 풍습이 있는 코시카에서도 빠른 결혼이었다. 똑같은 아버지에게서 난 똑같은 자매인데.

마리야는 아까 그 황태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남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단정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얼굴도 모난 데 없었다. 키가 좀 작은 것은 흠이었지만, 마리야의 남편과 비교하면 홍학이나 다름없이 컸다. 페드루스는 동쪽의 다른 왕족들이 그렇듯 아주 작고 땅딸막한 남자였다.

사실 성품이 좋다면 외모는 다음 문제였다. 그러나 남편의 심성은 지옥불에서 뛰쳐나온 악마처럼 비열했다. 사람이라면, 주님의 자식이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남편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래. 내 실수야. 말실수를 했어. 미안해. 이만 들어가지. 모레 출발하려면 지금 짐을 싸야 하니까. 돌아가면, 당신이 갖고 싶다고 했던 그거 그냥 사. 에메랄드 팔찌였던가?"

마리야는 눈물을 흘리며 내뱉었다.

"내 아버지."

어깨에 얹힌 손이 잠깐 멈칫했다.

"들어가서 얘기하지. 여기는 듣는 귀가 너무 많아."

"내 아버지 말이에요. 내 어머니. 내 오라버니들!"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페드루스는 고함을 질렀고, 마리야는 그에 맞대 악을 썼다.

"말 하란 말이에요!!"

"누구신진 모르지만 좋은 날에 너무 시끄러우신 것 아닌가요?"

새처럼 발랄한 목소리였다. 마리야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돌렸다. 짙은 갈색 머리를 파란 장미로 장식한 여자였다.

"조용히 해."

"누구시죠?"

튀어나간 물음은 대단히 공격적이었다.

마리야는 HRH 공작부인으로 여기에 왔고 HRH는 HIH 바로 다음의 지위였으므로, 세상에 그녀보다 지위 높은 여성은 얼마 되지 않았다. 따라서 남쪽의 예법을 따져도 그녀가 실수를 할 확률은 낮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곳은 마리야보다 지위 높은 사람이 발에 차이는 얼마 안 되는 곳이었다.

"어머나."

그녀는 유쾌하게 웃었다.

"내가 누군지 묻는 질문은 태어나서 받은 적이 얼마 없는데 말이에요. 안 그래요, 미셸?"

남자는 마리야가 익히 아는 사람으로,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마리야의 탄원을 받아주었던 잘생긴 남자였다.

남편이 다시 동쪽 말로 윽박질렀다.

"제발 조용히 해."

"마드리드 공작, 공작부인. 이 분은."

"아니, 아니. 미셸. 그러실 필요 없는 걸요. 리젤로트는 이제 기억이 났으니까요. 동쪽의 공작님이셨죠. 카스티야 국왕 폐하의 사촌이시잖아요? 직접 초대장을 작성해서 보내드렸으니 잊어버릴 리가 없잖아요. 그저께 별궁 근처의 숲에서도 봤는걸요. 안녕하세요? 나는 마담 엘리자베트 샤를로트라고 해요. 하지만 다들 리젤로트라고 부르죠. 엘리자베트는 너무 따분한 이름이잖아요? 샤를로트는 예쁘지만 흔하고요."

"마드리드 공작 페드루스라 합니다, 전하. 이쪽은 마드리드 공작부인 마리아입니다."

"아하, 따님과 함께 오셨군요?"

페드루스의 나이는 올해 마흔 셋이었고 마리야는 아롈보다 두 달 어려 아직 열여섯이었다.

"제 안사람입니다, 전하. 먼 북쪽 출신인지라 말이 서투르니 부디 너그러운."

여자가 말을 틱 끊었다.

"북쪽! 내 올케도 북쪽 출신이죠. 그녀가 옅은 금발이라 북쪽 사람들은 다 그런 금발인 줄 알았지 뭐예요. 남쪽 사람들은 재미없게 어두컴컴한 색이 많잖아요? 죄다 갈색, 갈색, 갈색! 나는 늘 금발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아, 오해는 하지 말아요. 그 흑발도 아주 멋져요. 사실 난 북쪽에도 흑발이 있는 줄은 몰랐거든요. 혹시 아는 사람인가요? 가서 인사는 했어요? 아직 인사를 하지 않았다면 내가 소개해줄까요? 아, 인사를 했던가요? 숲에서 인사를 했죠. 그래도 다시 신부한테 인사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마리야는 이해를 못 해 머뭇거렸다.

"마담. 대단히 송구합니다만 안사람의 건강이 좋지 않아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도나 치에르바, 아니 귀국의 마담 라 세르께는 따로 연통을 넣어 사죄하겠습니다."

"어머어머! 아직 어린 사람이 몸이 좋지 않으면 안 되죠! 어서 들어가 보세요. 리무쟁 공작이 전해주기로 공작부인의 고초가 심했다고 들었어요. 아바마마, 우리 로렌의 황제 폐하께서도 깊은 심려를 표하시며 나바르 대공을 문책하겠다고 벼르셨답니다. 다른 나라의 공작부인이 그토록 힘든 여정을 겪고 있었는데 모르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고 하시면서요. 동쪽은, 비록 아스투리아스 여공의 일이 있었다곤 해도 우리의 우방인걸요. 안 그런가요?"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여자의 말은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남편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더니 다시 마리야를 끌고 자리를 떴다. 페드루스는 두 번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주어진 숙소로 돌아가 문을 쾅 닫았다.

"제정신이야!"

드디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나와 마리야는 마주 소리 질렀다.

"뭔데요! 대체 뭐냐고요!"

"황제의 딸에게 먼저 말을 걸다니! 내가 조용히 하라고 했잖아!"

"네?"

아까 그 여자는 아롈의 시누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마담 르와이얄의 여동생이고. 하나도 안 닮았는데.

하지만 깨달음도 잠시, 마리야는 비난의 폭풍에 휩싸여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렸다. 공작은 온갖 거친 말을 마리야에게 쏘아 보냈다.

"대체 어디까지 내가 아내를 돈 한 푼 없이 내쫓은 놈팡이라고 퍼트릴 참이야!"

씩씩대던 공작은 온 건물이 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문을 쾅 닫고 나갔다. 마리야는 혼자 남아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항상 이런 식이지. 내일이면 보석이라도 한 개 갖고 와서 아무렇지 않은 듯 굴 거야. 혼자 웃고. 혼자 말을 하고. 그리고 혼자 종마처럼 올라타 씨를 뿌리겠지.

그리고, 결국 아버지에 대한 일은 사과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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