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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6. 가시 장신구 (6)


 샤를루아 공작 필리프는 그의 아버지인 보르디 대공이 와병 중인 탓에 실질적으로 신부의 친정 그 자체였다. 그는 자리에 서서 대화를 나누는 한편 주요 인사들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파악했다. 장녀 소피가 그를 도와주었다. 그녀는 미혼의 아가씨답게 활발하게 춤을 추고 돌아다니면서 인사라는 명목 하에 한 명씩 필리프에게 정보원을 보냈다. 방금도 그는 마드리드 공작이 마담 리젤로트에게 한소리를 듣고 돌아갔다는 중요한 가십을 손에 넣은 참이었다. 마드리드 공작과 그 부인은 마담 르와이얄과 함께 필리프가 설정한 요주의 인물이었다. 소피는 그의 당부를 듣고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오늘은 절대 망칠 수 없었다. 그리고 마드리드 공작부인이라던 그 소녀, 아니 부인은 오늘의 신부가 가장 쉽게 이성을 잃어버리도록 만들 수 있는 화약이었다. 필리프는 다시 한 번 신부의 위치를 확인했다. 아롈은 자신의 자리에 그림처럼 얌전히 앉아 있었다.

아까 마드리드 공작부인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소피는 눈치껏 나바르의 쥬스티느와 함께 아롈이 공작부인을 발견하지 못 하도록 필사적으로 말을 걸었다. 덕분에 무사히 넘어갔다. 잠시 후 불꽃놀이가 시작되면, 모든 것이 끝난다.

필리프는 가슴 깊이 만족했다. 아롈은 그가 지켜본 한에서 성질을 부리지도, 짜증을 내지도, 빈정거리지도, 사람의 이름을 틀리지도 않았다. 어머니인 옐레나 여제를 입에 올리는 일이 있어도 절대 화를 내지 않았다. 가끔 주먹을 꼭 쥐긴 해도 시종일관 입술에 미소를 띠었고, 최대한 상냥한 어투로 말하려고 노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페란토 어로 말하는 것은 절대 삼가라는 조언을 잘 지키고 있었다. 필리프는 누누이 강조했다. 다소 느리게 말을 할 지언정, 반드시 갈리아 어로 이야기 하라고.

동쪽 말을 할 줄 아는데 남쪽 말을 아예 못 할 이유가 없었다. 카스티야 어와 갈리아 어는 그 어족이 같아 단어의 철자나 발음은 다를지언정 규칙만 이해하면 익히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외국어를 잘 못 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남쪽의 아가씨들도 카스티야 사람들과는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아롈은 혹독한 훈련을 시키자 굉장한 속도로 말을 배워냈다. 쉴 새 없이 발음이 이상하다고 불평을 하면서도, 어쨌거나 외우라는 이름들은 전부 외웠다. 억양과 발음은 단시간에 교정이 불가능했지만, 외국인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일상 대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올라오는 데에 겨우 한 달이 걸렸을 뿐이었다. 그런 아롈을 막고 있는 건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안녕하세요, 샤를루아 공작."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부르고뉴 대공비 전하(HIH)."

필리프는 허리를 깊게 숙여 여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부르고뉴 대공비는 황제의 둘째 딸로, 마담 오거스틴이라고 불리던 몸이었다. 그녀는 황가의 일원으로서 대공가에 시집을 가서도 처녀적처럼 HIH라 호칭, 지칭될 권리가 있었다. 그 특권을 과시라도 하듯, 그녀는 이 연회장에서 시녀를 두 명이나 거느리고 있었다. 아까 만찬에서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 막 나온 것이리라.

"늦게 나와 민망하군요. 저도 식을 꼭 보고 싶었는데, 제 건강이 그를 허락하지 않았어요."

오거스틴은 슬하에 아들 딸 쌍둥이를 두고 있었는데, 출산 후 몸이 약해져 이블린이 아닌 부르고뉴에서 요양 생활을 한 지 오래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얼굴은 어두침침해 빈말로라도 안색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부르고뉴와 보르디는 검은 상복의 신부 에스델 이후로 오랜 앙숙이었지만, 두 가문 모두 상대 가문 출신의 마담 라 세르가 나왔다고 해서 결혼식에 참석을 하지 않거나 자리를 비울 만큼 졸렬하지는 않았다. 이리 말하는 것은 정말 그녀의 건강 때문이리라.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대공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그이는 오라버니와 함께 있어요. 아무래도 들러리이니, 한 명은 곁에 붙어있어야지요. 저 쪽에 있군요."

부르고뉴 대공 카트르는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세르와 한껏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일까.

"그나저나 올케에게 ​소​개​해​주​시​겠​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필리프는 시녀를 물리치고 손수 대공비를 부축했다. 신부는 아주 얌전히 앉아 있다가 다가오는 그들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곁에는 방금 칼레 대공녀와 교대한 나바르의 쥬스티느가 붙어 있다가 긴 옷자락을 추슬러주었다.

"필리프. 이 숙녀분은 누구십니까."

"부르고뉴 대공비, 마담 오거스틴입니다. 마담, 마담 라 세르십니다."

아롈은 미소 지었지만 정말이지 어색했다.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엘리엔 필리피느 소피 아델라이드입니다. 병중의 몸으로 참석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부디 오거스트라고 불러주세요."

오거스틴이 한 발짝 다가가 신부의 양 뺨에 자신의 뺨을 대는 동안, 아롈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비쥬는 가족끼리 흔히 나누는 인사였고, 특히 축하할 일이 있을 때는 이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이처럼 어여쁘신 분이라리곤 미처 생각지도 못 했답니다. 어쩜, 이렇게나 반짝이는 금발이시라뇨."

"칭찬이 과하십니다."

필리프가 듣기로만 오늘 신부의 백금발을 칭찬한 이가 열 손가락을 열 번 헤아렸다. 신부의 얼굴엔 조금 지긋지긋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오거스틴은 눈치 채지 못했다.

"주님의 축복이 깃들어 하루 빨리 사랑스러운 아들을 잉태하시길 바라요."

"예."

피융, 하고 작은 소리가 들렸다.

 

릴레벨트는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앤은 살짝 들어와 목걸이를 서랍에 넣어두고 나갔다. 그러면 그렇지. 그 성격에 훔친 거나 다름 없는 목걸이를 오래 걸고 뽐낼 수야 있었겠는가. 릴레벨트는 서랍의 이중 바닥에서 목걸이를 가져다 앤의 짚으로 된 침대 매트리스를 들추고 바닥에 깔았다. 몇 번 팡팡 시트를 손으로 내려치자 감쪽같았다. 그녀는 하품을 하며 사람의 형상을 흩트렸다. 이내 그녀는 작은 용의 형상으로 변했다.

바깥에서 화약이 터지는 펑펑 소리와 함께 오색 빛이 물결쳤다. 누구의 기억인지, 언젠가 잡아먹은 이의 기억이 흙탕물처럼 떠올랐다. 그 기억에 의하면, 지금 저 불꽃놀이는 굉장히 성대한 축에 속했다. 그녀는 침대 시트 위에서 꼬리를 둥그렇게 말고 고개를 묻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아득바득 모은 마법을 오늘 전부 소진해버렸다.

어리고 자제력 없는 아이들은 꿈을 꾸면서도 기원을 담기 때문에 가까이에 있으면 마법을 질질 흘리고 다니기 마련이었다. 이 때문에 어른 마법사의 통제가 없는 어린 아이는 기원을 감당 못 해 일찍 죽곤 했다. 그런데 아롈은 정말 치사할 정도로 아예 마법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릴레벨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아롈의 삶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마법과, 바다에서 집어삼켜서 본체가 소화 중인 사람의 기억으로부터 뽑아내는 마법, 그리고 그 곰보 아가씨의 마법뿐이었다. 곰보가 준 마법을 이용해 아렐의 악몽을 강제로 촉발시키고 받아먹어 보았지만 양은 그대로였다. 벨타는 마법의 질이 조금 더 나아진 걸로 만족해야 했다.

그나마 아롈은 남쪽에 들어온 이후 강박적으로 벨타를 멀리 했고, 거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전송 효율은 극악에 가까워졌다. 게다가 곰보 아가씨의 마법은 처음에는 꽤 괜찮았지만 얼굴이 나아지면서 기원의 간절함이 점점 줄어들었다.

별 수 없이, 당분간은 쥐죽은 듯 지내며 애교나 부려야 할 신세였다. 괜찮다. 그녀는 예지가 알려준 모든 안배를 다 해두었으니. 이젠 정말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녀가 깨어나면서 받은 예지는 지금 이렇게만 하고 기다리면 대단히 강력한 마력을 받아먹을 수 있으리라고 알려주었다.

바다 밑에서 깊이 잠들어 있던 그녀를 깨운 이가 하필 예지력을 지닌 마법사였음은 릴레벨트에게 있어 크나큰 행운이었다. 그 빨간 놈이 예쁜 계집아이기만 했어도.

릴레벨트는 곧 펼쳐질 만찬을 기대하며 입맛을 두어 번 다시고는, 몸을 완전히 말아 보석의 형태로 돌아갔다. 그녀는 자신의 거대한 위 안에서 소화되고 있는 노예의 기억에 완전히 빠져 들어갔기 때문에, '빨간 놈'과 함께 돌아온 앤이 목걸이를 찾지 못 해 울음을 터트리는 걸 알지 못했다.

 

아롈은 신발에서 발을 빼자마자 선 채로 기절할 뻔했다. 발이 아프다고 속으로 욕을 하는 건 오전으로 끝났다. 정오를 넘기면서는 차라리 발가락을 잘라내고 싶어졌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아롈은 자신의 몸에 발이라는 부위가 달려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아롈의 들러리들은 흔한 일이라며 상냥하게 웃었다. 그녀들은 조심스레 아롈의 옷을 하나하나 벗겼다. 허리를 죄는 스테이가 떨어져 나갔을 때 아롈은 발 뿐만 아니라 허리도 되찾았다. 반환의 대가는 순수한 고통이었다.

결혼식 의상은 지금까지의 다른 옷과는 달리 아예 남쪽에서 준비했다. 치수는 미리 견본을 재어 준비했으니 큰 문제가 없을 줄 알았건만, 허리가 아주 약간 작았다. 아롈은 전날 의상을 입어본 뒤 하루 종일 굶고 허리를 꽉 졸라맨 끝에 옷 속에 몸을 욱여넣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힘들었지만 약간 작은 옷이 가장 큰 문제는 아니었다.

아롈을 가로막고 선 난관은 바로 신발이었다. 로렌에서 준비한 신발은 여섯 켤레 전부 아롈의 발에 맞지 않았다. 가죽이면 억지로 늘려 신기라도 하련만, 흰 새틴으로 된 신발은 늘어나지도 않았다. 다른 신발을 신어보겠다고 가진 신발을 다 뒤집어엎었지만, 흰 신발은 없었다. 결국 아롈은 그나마 가장 큰 신발에 억지로 발가락을 접어 넣어야했다. 하루 종일 혹사당한 발은 불쌍하게도 종아리까지 퉁퉁 부어올라 마치 괴물처럼 보였다.

들러리들은 황후로부터 직접 전달받은 잠옷을 아롈에게 뒤집어 씌웠다. 황후는 키스는커녕 축복의 말 한 마디 남기지 않고 무뚝뚝하게 나와 잠옷만을 전달하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면으로 된 헐렁한 잠옷은 얼굴과 손을 제외한 신체 부위를 노출하지 않는 정숙한 옷이었다. 치맛자락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소피의 부축을 받으며 곁방-앤의 방의 반대쪽에 있는-에서 나와 휘장이 쳐져있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다리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썩어문드러져 있어도 놀라지 않으리라.

아롈은 시체처럼 죽은 눈으로 멍하니 앉아있었다. 온 로렌의 귀족들이 모여 잠옷 차림의 자신을 보고 있는데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쓰러져 자고 싶었다. 눈이 가물가물 감기는 걸 들어올리기도 힘겨웠다.

건넛방에서 신랑이 황제에게 건네받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 황제는 황후와 달리 아들을 포옹하고, 축복의 말을 던진 다음에야 잠옷을 건네주었다. 부부가 침대 위에 모두 자리하자 신랑 들러리 중 한 명인 부르고뉴 대공이 침대 옆에서 밧줄을 당겨 휘장을 내렸다. 침대 옆에 놓인 촛불 빛이 얇은 휘장 너머로 부부의 그림자를 그려냈다.

입회인을 두지 않는 약식이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예를 표하고 환호성을 지른 다음 황제를 필두로 모두 침실을 나갔다. 이제 그들은 연회가 준비된 거울의 홀로 내려가 수백 개의 양초가 빛나는 샹들리에 불빛 아래에서 두 번째 연회를 즐기리라.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발소리가 저 멀리 사라져가는 게 들렸다. 아롈은 어색함에 못 이겨 눈을 내리깔았다.

아롈은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소녀였고, 아침까지만 해도 앞으로 벌어질 모든 것에 대해 미리 떠올리고 대비하려 노력했다. 게다가 이미 코시카에서 필리프를 대리 신랑으로 두고 교회 식 결혼식을 한 번 겪어보지 않았던가.

덕분에 성당에서 이름을 잘못 말한 것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무난하게 흘러갔다. 아롈은 마리야를 본 척도 하지 않았고, 부르고뉴 대공과 대공비에게는 조금 딱딱하게 굴었고, 필리프와 소피에게는 누구보다도 친밀하게 행동했고, 마담 르와이얄 크리스틴이 뜻밖에 이유 없이 시비를 걸어도 상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리 고심해도 대비할 수 없었다. 아롈은 알렉산드르처럼, 마리야 여공처럼 자신도 연애에 빠져 도망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고 조부가 생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연회에 나가 놀 때에도 남자와 단 둘이 있는 것은 철저히 피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시녀를 한 명 이상 대동하고 다녔다. 그래서 시집 간 알렉산드라 주코바가 아기를 안고 인사를 올리러 찾아왔을 때 미혼의 시녀들이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들을 때 멀리서 귀를 쫑긋 세워 얻은 정도가 지식의 전부였다.

게다가 들러리들은 아롈을 준비시키면서 똑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그저 가만히 있으면 다 알아서 하실 거라고.

통렬한 후회가 온몸을 감쌌다. 최소한 어떻게 하면 되는지는 좀 알아둘걸 그랬다.

"음."

나지막한 음성이었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그는 아롈의 무릎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손을 가져다 손등에 입술을 댔다. 구토도 하지 않았는데 손끝이 유독 찼다.

문득 눈이 마주쳤다. 로렌에 도착한 다음에도 아롈이 남편의 얼굴을 온전히 마주할 일은 거의 없었다. 따로 일정을 수행하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긴 데다, 식사라도 같이 하게 되면 자리는 나란히 바로 옆에 있었다. 부러 빤히 쳐다본다 해도 옆모습밖에는 볼 일이 없었다.

그가 눈웃음쳤다. 아롈은 황급히 눈을 피했다. 대체 어디를 봐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조금 더 당겨 앉아서는 아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숨결이 바로 귀에 와 닿았다. 세상에, 사람의 숨소리가 이렇게까지 컸던가. 지금이라면 촛불 흔들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겁이 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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