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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7. 꽃과 별과 수수께끼 (2)


 옆을 돌아보자, 앤이 얌전히 대답했다.

"따로 잡혀 있는 일정은 없사옵니다."

"그럼 우리 같이 옷이나 맞출까요? 사실 오늘 저녁에 재단사를 부르기로 했는데, 괜찮으시면 내일 오라고 할게요. 영 입을 만한 옷이 없는 거 있죠. 작년에는 대체 뭘 입고 살았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아롈은 잠시 자신이 쓸 수 있는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따져보았다. 여름옷을 몇 벌이나 맞출지는 모르지만 결코 적은 돈이 들지는 않을 터였다.

지참금은 황실 재산에 귀속되는 것이므로, 아롈의 개인 재산이 아니었다. 또한 혼수품 또한 아롈이 사용하지만 소유권은 로렌 황실에 있었다.

"마담 리젤로트. 제가 아직 전달받지 못했습니다만, 제가 일 년에 받는 연금의 액수가 어느 정도 됩니까?"

"글쎄요? 그걸 알아야 하나요?"

리젤로트는 눈을 천진하게 깜빡였다.

"그냥 청구서에 서명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복잡한 지불은 아바마마나 오라버니께서 다 알아서 하실 거예요. 너무 많이 썼다고 잔소리를 하시는 일은 가끔 있어도 돈을 안 내주시는 일은 없는 걸요."

따로 정해진 액수의 연금을 받지 않고 되는 대로 쓴다고?

북쪽에서 아롈이 매일 하던 일 중 하나가 보고서에서 예상 비용만 뽑아 조부가 보기 편하게 나열하는 것이었다. 아롈은 당황을 금치 못 했지만 일단 웃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그럼 재단사는 내일 오라고 할게요. 혼자 맞추는 것보다는 여럿인 게 더 재미있으니까요!"

"그럼, 크리스틴도 부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녀도 수도원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만큼, 의상이 필요할 텐데요."

"음, 새언니는 큰언니가 왔으면 좋겠어요?"

"나쁘지 않지요."
"네, 그럼, 새언니 마음대로 하세요. 자, 이제 이 튤립 꽃병을 어디다 놓는 게 좋을지 고민해볼까요? 빨리 놓고, 저는 미셸을 보러 가야겠어요."

그녀의 측근 시녀가 화들짝 놀랐다.

"마담 리젤로트. 죄송해요. 제가 기억을 못 한 듯해요. 리무쟁 공작 전하와 약속을 잡으셨던가요?"

"아니. 그냥 만나러 가고 싶어서 가는 거야. 음, 어디가 좋을까?"

리젤로트는 아롈의 응접실에 꽃병을 배치해놓고는 부리나케 사라졌다. 아롈은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앉았다. 활기찬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짙은 꽃향기가 남았다.

아롈은 탁자에서 아까의 책을 집어 들어 표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제목도, 인장도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전하. 다과라도 올리는 것이 좋겠사옵니까?"

"지금이 몇 시냐?"

"네 시를 조금 넘겼사옵니다."

"그럼 차만 조금 내오너라."

아롈이 마지막으로 읽은 부분을 찾기 위해 책장을 들춰보는 사이, 앤은 따뜻한 차를 끓여왔다. 남쪽의 차는 잼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설탕만 조금 넣었다.

책은 중부의 서사시를 갈리아 어로 번역해둔 것이었다. 한 페이지에 나란하게 페란토와 로렌의 갈리아 어가 배열되어 있어, 번갈아 보면 유사한 단어를 금세 알 수 있었다.

남편은 부드럽게 웃으며 권했다.

-동부 말보단 페란토가 훨씬 유사할 텐데요. 페란토를 잘 하니까 갈리아 어도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아롈은 단어를 번갈아보며 눈에 익혔다. 사실 이렇게 보니 두 언어 사이에 비슷한 부분이 많긴 했다. 철자만으로 보면 금방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아롈이 문제시하는 건 발음이었다. 이제 읽고 쓰는 건 곧잘 했지만 듣고 말하는 건 아직도 어려웠다. 그리고 이 책이 아롈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아롈이 읽다 만 부분은 지독히도 재미없었다.

태양처럼 아름다운 금발을 타고난 주인공이 성검을 받아 용을 무찌르러 떠날 때만 해도 흥미진진하게 책에 빠져들었던 아롈은, 성에서 그를 맞이하여 환영의 입맞춤을 건네는 귀부인들의 의상 묘사에 그만 질려버렸다. 대체 왜 책에서까지 의상을 고르는 걸 봐야 한단 말인가? 간혹 묘사가 이상한 부분도 있었다. 앞에서 여왕은 금강석으로 번쩍이는 관을 쓰고 있다고 했는데, 바로 다음 줄에서 화려한 머리띠를 쓰고 있다는 말이 나왔다. 관과 머리띠를 같이 쓰면 틀림없이 우스꽝스러울 텐데.

아롈은 대충 대충 묘사를 흘려 읽고 다음 내용으로 넘어갔다. 눈으로 책장을 훑다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한 쌍의 팔과 한 쌍의 다리가

오래된 덩굴처럼 서로 얽혔네.

겨우 이슬이 한 방울 떨어질 동안

천 번의 달콤한 입맞춤이 오갔고,

꽃봉오리는 피지 않았으되

기사는 흰 꽃봉오리에 입 맞추었네.

창문을 두드리는 건 산들바람이나

연인을 흔드는 건 거친 폭풍이더라.

 

아롈은 앤에게서 부채를 빼앗아들고 얼굴을 식혔다. 글 몇 줄일 뿐인데 너무 적나라한 광경을 떠올려버리고 말았다. 따뜻한 체온이나, 부드러운 손길 같은.

앤이 내민 찬물을 단숨에 비운 아롈은 한 잔을 더 마시고야 겨우 진정하고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주인공이 다음 장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밤을 보낸 귀부인에게 약속의 증표를 쥐어주고 용이 산다는 험준한 계곡으로 향하고, 마침내 용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을 때까지 간간이 기억이 톡 튀어나왔다.

오늘 아침에도.

갈리아 어는 본 척도 않고 페란토를 통해 단숨에 내용을 읽어버린 아롈은 책을 덮고 다시 부채질을 시작했다. 그 바람에 공들여 고정해 둔 머리칼이 흐트러져, 석찬을 위해 다시 머리를 손질해야 했다.

 

용건을 전한 미네트는 두 층 아래로 내려가다가 올라오는 사람을 마주쳤다. 그녀는 가볍게 인사했다.

"안녕, 앙투안. 오랜만이구나."

"마담 미네트. 인사 올립니다."

멘 공작 앙투안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자비관엔 어쩐 일이니?"

미네트는 황후가 앙투안의 여동생을 독살하는 걸 방임한 사람이었다. 그 어렸던 아이가 이토록 장성한 청년으로 자라 나타나자 기분이 묘했다.

"신병(身病)으로 인해 마담 라 세르께 인사 올리지 못했습니다. 오늘 늦었지만 인사드리려 합니다."

"그래? 예복이 잘 어울리는구나."

그는 금박으로 장식한 연청색 재킷에 풍성한 레이스 스카프를 매고, 상아색 조끼를 걸치고 있었는데, 짧게 자른 머리만 가발로 가리면 지금 당장 연회에 참석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차림이었다.

"앙리에트 전하. 송구하오나 해가 지기 전에 하례를 끝내고 싶습니다. 먼저 물러가는 것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아니. 허락 못 해주겠는데?"

앙투안의 눈이 흔들렸다. 어린 아이를 괴롭히는 건 색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미네트는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놀라지 말렴. 방금 마담 라 세르를 뵙고 오는 길이지만, 올케 언니는 리젤로트를 만나고 계신단다."

"그렇습니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젤로트는 앙투안을 정말 싫어했다. 세시안이 붙잡고 몇 번이고 사이좋게 지내라며 타일렀지만 듣지 않았다.

"그나저나 결혼식을 못 봤다니 안타깝구나. 너도 신부를 모셔오는 길에 따라갔다고 알고 있는데."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이것 봐라? 미네트는 언뜻 떠본 바늘에 물고기가 낚여 올라오자 눈을 빛냈다.

"그래. 덕분에 마담 라 세르께서 무사히 로렌에 오셨지. 소문에 의하면, 커다란 용이 나타났다고 하더구나. 용으로부터 숙녀를 지켰으니 칭찬받을 만하지. 실로 미남왕 앙리에 준하는 공적이 아닐까. 폐하께도 치하해달라고 청하려무나."

앙투안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마담 미네트. 송구합니다만, 그건 아직 기밀사항입니다."

"어머, 뭐가? 용이 나타났다는 것? 아니면 네가 치하를 받을 예정이라는 게 기밀인가?"

"전하!"

"우리, 아니 내 외가가 오를레앙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닐 테지. 이모부께 편지 두어 장만 써도 금방 알 수 있단다."

"어중이떠중이가 돌아다니는 복도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

"어머, 그럼 나도 어중이떠중이라는 거니? 나도 이곳에 서 있잖아?"

"그런 말씀이 아니잖습니까!"

"소리 지르지 말렴. 천박하게 출신을 드러낼 필요는 없잖아?"

"마담 미네트."

간만에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 같은 만족감을 느낀 미네트는 웃었다.

"내가 차라도 한 잔 마시자고 하면 마실 거니?"

앙투안의 파란 눈은 금세 이글거렸다. 어쩜 이렇게 쉬운 아이가 다 있을까.

"내 방으로 가자꾸나. 갑자기 흥미가 돋아서 듣고 싶은 얘기가 참 많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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