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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7. 꽃과 별과 수수께끼 (3)


 세시안은 샤를루아 공작이 내민 금액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튕겨본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샤를루아 공작. 이게 말이 되는 금액이라고 생각합니까?"

"안 될 것은 또 무엇입니까?"

세시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이는 이미 보르디의 후계자가 아니라 보르디 대공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샤를루아 공작 필리프는 편안히 등을 등받이에 기대고는 여유 있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세르. 늦었습니다만 어여쁜 신부를 맞으신 걸 다시 한 번 경하 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공작께서도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랄 게 있겠습니까. 마담 라 세르께서는 제 사촌 여동생이시고, 또 이 세상에서 몇 찾기 어려울 정도로 고귀하신 분 아닙니까."

마담 라 세르라는 용어가 이블린에서 사용된 건 삼 년 만의 일이었다. 그는 어린 아내를 떠올렸다. 그녀-아렐르는 화려하게 꾸민 숙녀들이 나비나 벌처럼 돌아다니는 이블린에서도 정말 드물게 예쁜 소녀였다. 이블린의 사람들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그녀를 두고 '침대에서 목을 베이지 않도록 조심하세요'라고 수근거렸지만, 지난 이주일 동안의 그녀는 차가운 얼굴과 달리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제 어머니가 결혼식에 참석해서는 마담 리젤로트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군요. 야무지고 사랑스러운 아가씨라고 말입니다. 약혼한 분만 아니었다면 나이 찬 제 장남과 맺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워했지요."

"리젤로트와 리무쟁 공작과의 약혼은 오래된 일이니까요."

"예,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제 아들딸 중 아직 짝을 찾지 못 한 아이가 셋이나 됩니다. 리무쟁 공작은 훌륭한 젊은이이니 제가 자식 교육을 잘못 시켜 그러려니 마음을 다잡고 있습니다만, 아시잖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그리 쉽게 되지 않는다는 걸 말입니다."

황실의 혼사를 주관하는 건 황후였다. 때문에 황후는 보르디에서 들어오는 청혼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보르디는 총 세 번 거절당했다. 확실히 과한 처사였다. 그러나 황제는 황후에게 대단히 관대했다. 실제로 이번에 국혼 얘기가 나오기 전까지 황제가 황후에게 싫은 소리를 한 적은, 세시안이 알기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혼사라는 것이 어그러지는가 하면 금세 붙기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 여동생 중 둘도 아직 미혼이지만 두 분 가장 신실하신 폐하께서는 느긋하게 마음을 드시는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아비로서는 걱정이 될 밖에요. 후사는 중요한 일. 그렇잖습니까."

세시안은 굳이 이야기가 빙빙 돌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렇지요."

"제 어머니도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보르디의 술 창고에 있는 와인을 아낌없이 마담 리젤로트에게 내주었지요. 세르의 혼사만큼이나 이 로렌과 여섯 가문에게 의미 있는 일이 있을까요."

"질 좋은 발포주였습니다. 간만에 입이 호사를 하더군요."

"보르디의 술 창고에 남아있는 얼마 안 되는 ​그​랑​-​투​르​넬​이​었​지​만​ 로렌과 코시카의 결합을 위한 자리에 무에 아깝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삼 년 전의 일로 보르디에는 술을 빚을 여력이 남아있지 않은 터라."

"보르디의 포도주 분수가 말라붙었다는 말을 저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만."

"세르께서는 부족한 저를 과대평가 하시는 듯합니다. 병환 중에 있는 제 아버지라면 모를까, 우둔한 저로서는 식민지를 통하지 않고 일전과 같은 가격으로 밀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도저히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식민지에 터진 전염병을 입에 올리고 있었다. 세시안은 결국 식민지로부터 식량을 수입하는 것을 전면 금지했다. 자신이 즉위했을 때 식민지를 새로 복속시키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칙령으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것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세시안의 할아버지이자 선대 황제인 루이 조제프 황제는 포도주에 중앙세를 물리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보르디와 부르고뉴가 반대했으나, 이미 물밑작업에 넘어간 다른 네 명의 대공은 찬성을 표했다. 때문에 보르디와 부르고뉴의 세금은 줄고 중앙에서 걷는 세금의 금액은 늘어났다.

보르디는 부족한 예산을 메우기 위해 농작지의 상당수를 포도밭으로 전환시키는 정책을 장려했다. 결국 식량 자급률이 낮아졌지만 로렌 식민지에서 대단히 싼 가격에 밀을 수입할 수 있었으므로, 보르디는 부르고뉴와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를 빠른 속도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시안의 수입 금지령으로 인해 보르디는 기껏 쌓아온 예산을 단숨에 소모해버렸다. 덕분에 천천히 좁혀지고 있던 다른 대공국과 보르디의 거리는 단숨에 멀어졌다.

"샤를루아 공작.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백만 루아르를 당장 예산에서 빼내는 건 무리입니다. 세수가 줄어든 건 보르디만이 아니라 본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루아르는 금 1루아르짜리 금화로, 로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화폐의 일종이었다. 로렌의 모든 공문서에서 쓰는 액수는 루아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다. 올해 재정 의회에서 책정한 금액은 약 삼억 루아르였다.

"꼭 올해 이 정책을 실현시켜 달라 청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여름에 있을 예비비 편성 회의에서 한 번쯤 떠올려주신다면 영광일 겁니다."

그리고 세금과 결혼과 식량 문제 등으로 인해 이미 균형이 깨져있다는 걸 상기해주면 더 좋을 것이고.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공작."

필리프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물러났다.

머리가 아팠다. 세시안은 예비비 편성 회의를 앞두고 모든 대공이 그의 집무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데 질리고 말았다. 칼레 대공은 이번에 반드시 전열함 두 척을 새로 건조해야 한다고 하질 않나-아직 용에 대한 사실을 공표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오를레앙과 나바르 대공은 기사단 정원을 늘리고 지원금을 내려달라고 징징거렸고, 오베르뉴 대공은 코르크에 지방세를 물릴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부르고뉴 대공 카트르는 코르크에 세금을 물리는 걸 막아준다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결혼식에서 언급했다. 하지만 그 중 가장 어이없는 걸 한 가지만 고른다면 보르디의 필리프의 청이었다.

그는 막무가내로 대공국에 분배되는 예산 중 보르디의 예산만을 늘려달라고 온 것이었다. 세시안은 이백만 루아르는 무리더라도 적어도 백만 루아르는 허하리라고 마음을 굳혔다. 이번에도 보르디를 홀대했다간 저 노회한 공작이 대체 무슨 일을 벌일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이제 보르디를 지원해줄 때도 되었다.

올해 세수가 예상보다 많이 걷혔을 때, 그는 부채를 일부 해소할 생각이었다. 아직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신경이 쓰일 만한 액수이긴 했다. 부황은 흑사병 때 황실 직할령 일부의 조세권을 이자로 대신 지불하고 재정난을 해소했다.

하지만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았다. 세시안은 메모를 휘갈겨놓고 차근차근 오늘 봐야 할 서류들을 정리했다. 그 와중에 영수증만 모아 올려놓은 철이 눈에 들어왔다. 리젤로트를 만나면 여동생이 다시 토라지는 한이 있어도 한 마디 잔소리는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는 오늘 아침 집무실에 오자마자 리젤로트가 청구한 액수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세시안은 설마 리젤로트가 결혼식 따위에 십만 루아르를 써버리리라곤 꿈에도 몰랐다. 과소비를 하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지금까지는 세시안 자신의 연금에서 떼어 메꿀 수 있을 정도에 그쳤다. 북쪽에서 온 지참금이 생각 외로 후하지 않았더라면 과장을 좀 섞어 황실이 파산 선언을 해야 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어디서 전쟁이라도 터졌다간 재정이 정말 위험한 상태까지 치달으리라. 돈을 달라는 곳은 많은데 돈은 항상 부족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는 차마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머리를 싸쥐었다. 누구든 들어와 예산을 가지고 왈가왈부한다면 창문으로 뛰어내릴 용의도 있었다. 매년 있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한 번 더 노크가 들렸다. 그는 창문을 흘끔거리곤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그러나 뜻밖에도 시종이 열어준 문으로 들어온 이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폐하."

"간만에 아들과 저녁이나 한 끼 할까 해서 말이다. 일어나라."

로렌의 황제가 아들의 집무실을 찾은 건 필시 단순히 '정을 쌓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루이 오귀스트는 세시안이 스무 살이 넘은 이후에는 아들을 차기 황제로서 대우했으므로, 집무실에 찾아와서 가타부타 하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냥 저를 부르시지 그러셨습니까."

"지나가던 길에 갑자기 생각났단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절대 그럴 리 없었다. 부황인 루이 오귀스트가 충동적인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정의관을 드나드는 모든 사내들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가 인생에서 유일하게 충동적으로 변하는 곳은 침실뿐이라고 공공연히 사람들이 떠들어댔다. 모후인 마르그리트 황후가 그의 큰형인 루이 페르디낭을 가진 채 대관식을 올린 걸 비꼬는 말이었다.

"폐하, 제 아내와 석찬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만 그녀를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녀는 매일 밤마다 잠들지 못 하고 한참을 뒤척였다. 세시안은 그런 신부가 걱정되어 자비관에 매일 드나들었다. 벌써부터 장모에게 고개를 조아리느냐는 조롱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또 죽는 건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나도 며늘아기와 저녁을 먹고 싶긴 하지만 오늘은 우리 둘이 먹도록 하자꾸나."

필시 무슨 일이 있었다. 세시안은 짚이는 일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무슨 용건인지 감도 잡지 못했다. 그는 곧 마음을 정했다. 하루쯤이야 별 문제가 있겠는가.

"알겠습니다. 벨망 경. 가서 말을 전해주겠어요?"

세시안의 시종은 허리를 깍듯이 숙이고 계단 쪽으로 사라졌다. 세시안은 빙긋 웃었다.

"그래서 어느 식당에 식사를 준비해 놓으라고 이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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