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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7. 꽃과 별과 수수께끼 (5)


 아롈은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그래, 알았네."

하지만 벨망 경이 나가자마자 그 웃음은 단숨에 시들어버렸다. 앤은 놓던 수틀을 내려놓고 재빨리 따뜻한 차에 과일잼을 풀어 내놓았다. 하지만 아롈은 손끝으로 찻잔을 밀어버렸다.

"전하, 무언가 언짢으시옵니까?"

"아니다. 옷이나 갈아입겠다. 저녁은 거르련다."

아롈은 몸을 일으켰다. 다른 시녀를 부르지 않는 건 앤에게 모든 시중을 다 들라는 암묵적 의사의 표현이었다. 앤으로서도 그 편이 마음 편했다. 앤 다음의 지위를 가진 시녀는 다름 아닌 노아이유 부인이었는데, 그녀는 아직도 앤을 보면 잡아먹으려 들었다. 아롈이 억지를 써서 앤에게 수석시녀 지위를 내려준 탓이었다.

앤은 홀로 파닥파닥 뛰어다니며 겹겹이 쌓여있는 옷과 속옷과 파니에를 다 벗겼다. 가벼운 침의를 걸친 아롈은 머리를 풀어 내리고 신발을 갈아 신었다. 그녀는 발이 시리다며 이 더운 남쪽에서도 항상 모피로 안을 덧댄 실내화을 고집했다.

옷을 치우고 곁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오자 아롈은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었다. 앤은 옷자락이 바스락거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조심스레 옆자리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전혀 떫거나 쓰지 않았다. 은은한 단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좋은 차였다.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에도 마셔본 적 없을 정도로.

녹봉을 받아 생활하는 귀족의 삶이란 다 고만고만한 법이었다. 가끔 싸웠고, 많이 웃었다. 그림으로 그려 액자에 끼워놓은 듯 평범한 가족이었다. 그런 부모님이 생전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사망했을 때, 앤은 시름시름 앓아누워 굶어죽기만을 기다렸다. 앤은 영지도, 작위도, 재산도, 약혼자도 없는 그냥 끈 떨어진 두레박에 불과했다.

할머니가 앤을 데려간 다음에도 이런 차를 마음껏 먹을 만한 형편은 아니었다. 할머니는 항상 돈이 부족하다고 불평을 했다. 연금이 모자라면 빚을 내어 생활하고 연금을 타면 갚았다. 전당포에 보석을 맡겼다가 찾아오기도 했다. 앤이 배가 고프다고 할머니를 조르면 그녀는 턱을 치켜 올리고 앤을 훈계했다.

-앤 마리아 폰 레르헨펠트. 배가 고프다고 해서 그걸 티내는 건 고상하지 않다고 항상 말하지 않았니?

덕분에 앤은 교육을 잘 받은 처녀로 자랐다. 아말리에 왕비는 간혹 앤을 불러들일 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열일곱 살이 되면 앤을 시녀로 들여서 좋은 곳에 시집보내 주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할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자랑했더니, 할머니는 코웃음을 쳤다.

"앤."

-잘 들어라. 사람의 행복은 돈이나 지위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란다.

-하지만 배가 고픈 걸요, 할머니.

앤은 미소를 머금었다.

"예, 전하."

"앞으로 일정이 어떻게 되지?"

"내일 마담 리젤로트와의 약속이, 사흘 뒤 로르쉘의 아가씨와의 약속이, 닷새 뒤 포의 아가씨와의 약속이, 일주일 뒤에 황후 폐하와의 티타임이 예정되어 있사옵니다."

"그렇구나. 따로 들어온 초대나 방문 요청은 없었느냐?"

"예."

아롈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는데."

절대 클라리 경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 기사는 결혼식 날 밤 앤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롈은 창백한 입술을 조금 달싹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세상이 너무 조용하지 않으냐."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앤이 보기에 이블린은 너무 시끄럽게 돌아가 눈이 팽팽 도는 곳이었다. 다른 시녀들이 앤을 붙잡고 어떻게든 깎아내리려 애쓰는 것만 상대해줘도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귀한 손님들의 까다로운 입맛에 맞춰 다과를 준비하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다 보면 또 오후가 갔다. 저녁이 되면 아롈은 몸이 피곤한 탓에 한층 더 예민해져서 그녀의 옷시중을 들고 방에 들어가면 녹초가 되곤 했다. 지난 이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벨타를 좀 데려와라. 물어볼 것이 있다."

 

아롈은 잠을 못 이루고 계속 뒤척였다. 요와 이불이 사락사락 스치는 소리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불면은 아주 어릴 적부터 아롈과 함께 한 악우였다. 한참 잠들려 애써보아도 별 진척이 없자, 아롈은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코시카에서는 책을 보곤 했다. 하지만 리젤로트가 예쁘게 꾸며놓은 침실에 책장 따윈 없었고, 있는 책이라곤 아까의 그 남우세스러운 서사시뿐이었다.

무료함을 견딜 수 없었다. 오죽하면 필리프가 다시 과제라도 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친애하는 사촌은 아롈에게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답시고 모든 과제를 거두어갔다.

예쁘게 꾸미는 일도, 아가씨들과 수다를 떠는 일도 그리 싫지는 않았다. 코시카에 있었을 때는 그런 만남이 바쁜 일과 사이에 낀 활력소였다. 새벽부터 일어나 성장한 차림으로 서류를 눈에 핏발이 서도록 보다가, 나가서 춤을 조금 추고 다시 들어와 마저 처리를 했다. 손톱 밑에 잉크가 지워질 날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일상의 전부였다. 겨우 이주일 만에 아롈은 질려버렸다.

게다가 이렇게나 기이한 답답함. 바위가 가슴을 틀어막고 있는 듯했다. 체사레브나 시절, 아롈은 세상의 모든 일을 문서로 손에 잡힐 듯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비록 역량이 모자라 모든 일에 다 신경을 고루 쏟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알고자 한다면 관련 부서 장관을 불러 서류를 올리라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처지였다. 아가씨들과 하하 호호 웃으며, 혹시 말을 놓칠 세라 귀를 쫑긋 세우고 정보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아롈은 실내화에 발을 밀어 넣고 화장대에 가 앉았다. 앤이 소금물을 딱 적당하게 타놓은 유리잔에는 목걸이가 퐁당 담겨 있었다. 희한하게도, 수다쟁이 용은 빠져나오지 않았다. 그저 흰 허리띠 모양의 줄이 희미해진 채 가만히 물에 잠겨만 있었다. 맹물을 타보아도 파란 물이 들 뿐 벨타는 나오지 않았다. 겁이 난 앤이 금방 소금을 타자 물은 다시 투명해졌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앤은 결혼식 전날까지만 해도 이 짐승이 분명 멀쩡했다고 주장했다.

그냥 이 참에 저 먼 바다에 갖다 버리고 오라고 시킬까. 저 흉포한 생물이 입을 나불거리지 않는다는 확신만 있다면, 철로 된 금고에 넣고 잠근 다음 쇠사슬로 칭칭 감아 대포에 넣고 쏘아버릴 텐데. 아니면 여기서 죽여 버릴까.

서랍을 뒤져 편지 칼을 꺼냈다. 은으로 된 칼은 한 쪽은 뭉툭하고 한 쪽은 날카로웠다. 날을 손가락에 살짝 대자 금속 특유의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괜찮지 않을까. 피를 받아서 한꺼번에 끼얹어버리면.

한참을 잔을 노려보았다. 손이 떨렸다.

아롈은 마음을 접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릴레벨트가 갑자기 몸집을 키우기만 해도 이 건물은 무너져 내리리라.

조용히 칼을 집어넣고 유리잔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통. 통. 맑은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귀가 녹아버릴 것처럼 예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체 이 안에 용이 살고 있는 게 맞긴 한 걸까. 다른 마법사를 찾아 훌쩍 떠나버린 건 아닐까. 하지만 결혼식 이후 앤은 항상 아롈의 옆에 붙어있었고, 그 때마다 그녀는 손목이나 목에 벨타를 걸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작센에서 용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필리프를 최대한 높이 평가해도 그 많은 사람들의 입을 다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선은 '아롈에게 마법사일지도 모르는 의혹이 있다' 정도로 소문을 축소시키는 데까지다. 용의 재등장이라는 굉장한 사건을 숨길 수는 없을 터였다.

상식에 비추어 보면 지금쯤 온 세상이 뒤집어져야 맞았다. 아롈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남국의 밤은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아롈은 가만히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본관에 연회가 없는 날이어서 상대적으로 조용하기만 했다. 본관 앞에 있는 흰 분수대는 꺼져 있었다. 그리고 분수대 앞에는 리젤로트가 그토록 자랑하던 튤립들이 무리지어 피어있었다. 저 멀리 불빛이 반짝이는 건물이 몇 개. 그 위로는 새카만 밤하늘이었다.

아롈은 익숙한 별자리를 찾아보았다. 별은 불면만큼이나 오랜 시간 아롈과 밤을 함께 보낸 벗이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하늘의 모양은 지독히도 낯설었다. 코시카의 하늘은, 황도에서 보던 아롈의 하늘은 이렇지 않았다. 바닷가의 모래만큼이나 많은 저 별 중에 아는 별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쓰게 웃으며 고개를 내리자마자 그 사람이 눈에 띄었다.

저도 모르게 상체를 내밀었다. 단번에 알았다. 검은 머리가 달빛을 반사했다. 아롈은 이유도 없이 숨을 죽였다. 그는 특유의 느긋한 걸음걸이로 분수대로 다가갔다. 걸터앉았다. 그는 툭툭 발장난을 했다.

혼자였다.

오늘 그가 못 온다는 소식을 시종이 전하자마자, 갓 빤 빨래처럼 보송보송하던 기분이 진흙탕에 처박혔다. 방 안에 활짝 피어있는 튤립이 미워서 짓이기고 싶었다. 그리고 겨우 파투 한 번에 상심하는 자신을 직시하고 한없이 작아져 어쩔 줄을 몰랐다. 다른 생각을 하려 애썼지만 생각은 금세 되돌아왔다. 이 먼 거리에서 저렇게 희미한 형체만을 보았는데도 마음속의 진흙이 박박 씻겨나갔다.

문득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초록색 눈이었다. 그의 누이들의 갈색 눈과는 달리, 그의 홍채는 짙은 초록색에 가까웠다. 갈색은 화분의 흙처럼 동공 둘레에 조금만 있어서 아침 햇살이 환하게 비쳐야 겨우 볼 수 있었다. 가슴을 옥죄는 다정함으로 빚은 색깔이었다.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본관으로 달려왔다. 그러면서도 계속 목을 꺾어 올려 아롈을 주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금방 시야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롈은 창틀에 엉덩이를 걸치고 고개를 살짝 내밀어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예 건물로 들어가 버린 듯했다.

눈과 달리 귀는 쿵쿵거리는 발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과장을 좀 보태어 건물이 무너지는 것처럼 큰 소리였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아롈은 창틀에 몸을 기댄 채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문이 벌컥 열렸다.

"전하?"

어디서 흘렸는지 머리를 묶은 끈이 풀려, 검은 머리가 산발이 되어 있었다. 그는 엉망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항상 차분하게 머금고 있던 웃음은 간 곳 없었다.

"창문, 좀, 닫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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