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꽃과 별과 수수께끼 (8)
연음으로만 이루어진 부드러운 이름인데도 어색하게 혀끝에서 굴러 떨어졌다. 새삼 세시안은 그가 신부의 이름을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뭐야. 처음 들어? 그럼 대체 뭐라고 부르는데?”
“글쎄.”
아리따운 숙녀분이라고 부른 적이 한 번. 그 이외에는 직접 호칭할 일이 없었다. 신부는 다분히 정치적인 네 개의 세례명-엘리엔 필리피느 소피 아델라이드- 중 무엇으로 불러달라고 특정하여 말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피했던가.
“아롈, 아니 비전하(妃殿下)는 너를 뭐라고 불러?”
그것만은 바로 답이 나왔다.
“전하.”
미셸은 발에 밟힌 반죽 같은 얼굴로도 훌륭하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잘 지내는 거 아니었어? 매일 자비관에 드나든다고 리즈가 전해주기에 그런 줄 알았는데.”
“잘 지내고 있어. 그렇게 걱정할 이유가 없는데.”
결혼식으로부터 이제 겨우 보름이 지났다. 심지어 그 결혼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걸 누구나 안다. 십이 년의 차이, 출신지의 차이,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 그 모든 벽을 뛰어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어색한 말투로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약속을 하는 배려가 귀여웠다. 애처롭게 떨 정도로 겁을 먹었으면서도 먼저 입맞춰오는 용기가 사랑스러웠다. 막연히 살을 섞고 살다보면 정이 들고, 아이가 생기고, 이럭저럭 남들이 사는 것처럼 살게 되지 않을까 희망찬 미래를 그릴 정도로.
“어떻게 처음부터 완벽할 수 있겠어.”
물론 간밤에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 애달픈 눈이라니. 당장이라도 뛰어내릴 듯했다. 계단을 온 힘을 다해 뛰어올라가면서 또 무얼 잘못했을까, 조금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를 되풀이했다.
큰 눈을 말똥말똥 뜨고 그의 무례를 지적하는 신부를 마주했을 때 그는 진심으로 안도했지만, 별을 보고 있었다는 대답을 듣자 볼이라도 꼬집어주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이 신랑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겠지.
“그러니까 네 혼사에 먼저 신경 쓰는 게 어떨까. 급한 일은 이쪽이니까.”
“미안하다. 참견이 과했어.”
엄격한 분위기가 많이 희석되었다곤 해도 여전히 로렌에서 다른 가문의 일에 참견하는 건 무례였다. 그걸 아는 미셸은 사과했다.
“파혼장이 날아가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 하지 않을까. 부황께서는 아직 의중을 정하지 않으신 듯해.”
만일 마음을 완전히 정했더라면 세시안에게 물어보는 대신 통보했겠지.
“올해 결혼하지 않는 한 어머니는 오를레앙에서 파혼장을 날리는 위험도 감수하실걸.”
황가가 얽힌 결혼에서는 황가가 먼저 파혼장을 날리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도 그만큼의 비난을 감수할 각오가 서 있다면 세시안으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내년 초에 바로 결혼하겠다고 하는 건?”
“그 정도는 벌써 말 해 봤지. 크리스틴, 미네트. 리젤로트의 위로 둘이나 있으니 안 된대.”
크리스틴이 돌아옴으로써 혼인의 일정이 꼬인 것은 사실이었다. 만일 미셸이 외동아들에 스물일곱 살만 아니었더라면 황가에서 오를레앙에 혼사를 좀 미루자고 제안했으리라. 하지만 크리스틴은 벌써 혼기를 한참 넘긴 스물일곱 살이었고, 오를레앙은 방계 가문도 남아있지 않아 일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세시안은 이미 말했듯이 여동생을 데려온 것에 대해 사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상대는? 상대 가문이 올해 안으로 결혼을 다 끝마칠 준비가 되어있는 건가. 상당한 금액의 지참금을 어음이 아닌 현물로 마련해야 할 텐데.”
“지참금이 공짜라도 결혼시키려 하실 테지만 그 점은 문제가 안 될 걸. 그 쪽 아가씨도 나이가 차서.”
“누군데?”
“로르쉘의 아가씨.”
“샤를루아 공작녀?”
세시안은 등을 곧게 폈다. 그 노회한 공작에게 한 방 얻어맞았다.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대공가의 직계가 결혼을 하는 데에 드는 지참금은 약 오십에서 백만 루아르. 실로 막대한 돈이었다. 때문에 로렌에서는 겹사돈과 족내혼이 성행했다. 무려 이백만 루아르를 어디에 쓰려 하나 했더니.
이 모든 정황을 파악했지만 세시안은 보르디에 그 돈을 내 줄 수밖에 없었다. 이미 검토해보겠다고 한 이상 이유 없이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불가결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공사(公事)이므로 미셸에게 이야기해줄 수는 없었다. 사적으로는 친구이나 리무쟁 공작은 엄연히 그가 황위에 오르면 견제해야 할 대공가의 후계자였다. 세시안은 반사적으로 몸에 배인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뭐야. 그래서 아까 날 비난한 건가. 뜬금없다 했지.”
“그래. 그 아가씨가 혼기만 안 놓쳤어도. 내가 떠나기 전부터 이미 말이 다 되어있던 모양인데.”
샤를루아 공작에게는 아들도 둘이나 있었다. 크리스틴이 돌아올 거라는 건 그도 알 수 없었겠지만, 리젤로트보다 손위인 미네트가 미혼이니 상관없었을 테지. 아들을 미네트와 결혼시키겠다고 한다면 미셸의 순서가 밀려버린다. 부황만큼이나 손자가 다급한 오를레앙 대공비로서는 파혼을 시킬 당위가 충분했다.
“생각 좀 해보자.”
미셸은 수건으로 입술을 닦았다. 빨간 피가 묻어나왔다.
“네가 날 죽이지만 않는다고 약속하면 방법은 있어.”
설마. 옛날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부부 한 쌍이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허락을 받아냈던가.
세시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검 좀 빌려주겠어? 당장 목을 쳐야 할 놈이 하나 있어서.”
“살려달라니까.”
시종의 안내를 받아 들어온 로렌 황제의 집무실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벽은 산뜻한 붉은 비단으로 도배했고, 천장은 천사의 그림과 황금으로 장식했다. 게다가 진귀한 도자기에는 수십 송이의 꽃이 꽂혀 있어 진한 향기를 내뿜었다. 엄숙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코시카와는 이질적이었다.
이러한 대조가 눈에 띌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문득 아파왔다. 아롈이 밟고 선 이 땅이 하늘에 뜨는 별자리조차 낯선 다른 나라라는 걸 상기시켰다.
황제는 무거운 책상 대신 손님 접대용 의자에 앉아 며느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롈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거라.”
“가장 신실하신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그래. 일어나려무나.”
자리에 앉자 다과가 나왔다. 설탕과 계란 흰자를 넣어 부풀린 달콤한 과자는 어머니가 좋아해서 북쪽에서도 많이 접했다. 하지만 아롈은 손도 대지 않았다.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이 정도의 간단한 말은 머뭇거리지 않아도 충분했다. 그러나 황제의 말은 엉뚱했다.
“Aedificate domos et habitate et plantate hortos et comedite fructum eorum.”
페란토에 익숙한 머리는 제깍 해석을 토해냈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다음 구절을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구절을 듣고 성서임은 알아챘지만, 그 두꺼운 책을 줄줄 외울 정도로 신학에 조예가 깊지는 않았다. 황제가 눈짓하자 그의 시종이 무릎을 꿇고는 작은 책을 아롈에게 바쳤다. 겉표지에 금박과 은박으로 천사가 휘감긴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다.
“내가 요즘 눈이 침침하구나. 찾아서 읽어라. 표시를 해놓았으니.”
내지에 빨간 리본을 책갈피 삼아 끼워놓았으므로 아롈은 바로 읽어야 할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페란토 어로 쓰여 있었다. 페란토와 북쪽 말 양쪽의 판본을 모두 인정하는 정교회와 달리 성교회의 교황은 페란토 어가 아닌 판본은 일절 인정하지 않았으며 성서의 출판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Accipite uxores et generate filios et filias date filiis vestris uxores et filias vestras date viris et pariant filios et filias et multiplicamini ibi et nolite esse pauci numero.”
점차 목소리가 떨렸다. 겨우 한 절을 다 읽었는데 목이 메었다. 아롈은 필사적으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et audierunt…….”
황제가 손을 들었다.
“그만.”
입술을 깨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야했다. 치맛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손등에 핏기가 가셨다.
너무 나쁘게만 해석하는 걸까. 그런 의도가 아닐 수도 있다. 그저 정말로 성서를 듣고 싶어서 그랬을 가능성은 없을까.
하지만 시부(媤父)의 눈은 써느랬다. 이것만은 익숙했다.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니 받아들이라는 강요. 그리고 오만.
“갑자기 그 구절이 듣고 싶어져서 말이다. 다음 알현이 있으니 그만 가 보거라.”
무슨 정신으로 인사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인사를 하기는 했던가. 시종이 아롈을 가로막지 않았으니 무릎을 꿇었을 터였다. 그런데 갈리아 어로 말했던가. 페란토나 모국어로 말한 건 아닐까. 아롈은 힘이 빠진 다리로 비틀비틀 복도를 걷다가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다. 얼굴 표정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이반 3세가 계집인 네 능력이 별 수 있느냐고 비아냥거릴 때에도 아버지가 여성으로부터 정통성을 이어받았음에도-아롈의 증조모는 안나 여제로, 당연히 여성이다- 정부에게 황후 자리를 주기 위해 ‘아들이 황위를 잇는 게 더 옳다’는 헛소리를 지껄였을 때에도 황당했을 뿐 이런 모멸감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자비관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앤을 비롯한 시녀들을 죄다 내보내고 먹은 아침을 전부 올렸다. 요강 안 토사물 범벅이 된 자존심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클레르는 뤼시용 백작의 딸로, 그녀의 아버지는 오베르뉴 대공의 가신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렵게 그녀를 마담 라 세르의 시녀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그녀의 주인은 다른 시녀들을 멀리하고 자신이 데려온 시녀만을 싸고 돌았다.
안(Anne)이라는 중부 출신의 백작녀는 미혼의 처녀로서는 이례적으로 마담 라 세르의 수석 시녀를 맡고 있었는데, 자주 다른 시녀들과 신경전을 벌였다. 그끄제 아침만 해도 나바르 출신인 잔과 말다툼을 하는 통에, 클레르는 식사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클레르는 수석 시녀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와 내려놓은 다음, 하녀를 불러다 요강을 치우라고 명령했다. 침실에는 시큼한 악취가 감돌았으므로 사향이 든 향수를 곳곳에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주인은 입술에 핏기가 사라진 창백한 얼굴로 가만히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다.
바쁘게 가벼운 귀중품들을 치운 그녀는 하녀가 고개를 숙이고 기다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중년의 하녀는 굽실거리는 태도로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저, 아가씨.”
아가씨(mademoiselle)는 대공의 딸, 혹은 대공의 장남의 딸에게나 주어지는 칭호였으나, 그걸 알 리 없는 천한 이들은 백작의 딸인 클레르를 아가씨라고 불렀다.
클레르는 다소 으쓱해진 채 되물었다.
“예. 말해요.”
“요강이 깨끗한뎁쇼. 사용한 적이 없는 것처럼 말입죠.”
다른 하녀가 먼저 치웠나? 클레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쩌면 향수를 가지러 간 사이 다른 시녀, 잔이나 마리가 치우라고 명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알았어요. 가보도록 해요. 요강은 원래 자리에 갖다놓고.”
그 때 안이 클레르를 불렀으므로, 클레르는 이 일을 까맣게 잊고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