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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7. 꽃과 별과 수수께끼 (10)


 앤은 명령이 떨어진 즉시 자비관 꼭대기로 올라가 로르쉘의 아가씨인 샤를루아 공작녀 소피의 방에 찾아갔다. 마침 소피는 포의 아가씨인 나바르의 쥬스티느와 함께 담소를 나누며 수를 놓는 중이어서 두 번 움직일 필요가 없어졌다.

새 마담 라 세르에 대해 호의적인-다분히 정치적으로 비슷한 방향성을 띠는- 가문 출신의 두 아가씨들은 흔쾌히 약속 취소를 이해해주었다. 오히려 병문안을 가야겠다는 호들갑을 말리느라 진이 빠질 정도였다.

앤은 인사를 올리고 물러나 계단을 통해 이층으로 내려갔다. 시간이 늦어 자비관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꽤 잦아들었다. 이 큰 건물의 대계단을 내려오는데도 겨우 두 명을 마주쳤을 뿐이다. 연회가 없는 날에는 조용하다고들 했다.

결혼식에는 그토록 떠들썩했건만 그 뒤로는 본관에서는 단 한 번의 연회도 없었다. 다른 별관이나 이블린 소도시 쪽의 저택들, 수도의 귀족가문들로부터 매일 같이 무도회며 티파티, 만찬 초대장이 날아왔지만 아롈은 시큰둥한 기색을 하곤 모든 초대장을 서랍에 처박았다.

모서리를 두 번 돌아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문이 세 개 나왔다. 하나는 곁방, 하나는 응접실, 하나는 침실. 황후의 방이라기엔 지나치게 초라한 침실 문 앞에 선 그녀는 몇 번이고 문을 두드리려다 그만두길 반복했다.

앤이 아무리 정세 판단에 서툴다고 해도 아롈의 명령도 받지 않은 채 황후와의 선약을 깨는 것이 결코 아롈에게 좋을 리 없다는 판단 정도는 내릴 수 있었다. 한참을 서성이던 앤은 결국 마음을 굳혔다. 앤의 주인은 아롈이지 아롈의 남편이 아니었다. 첫날밤에도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

-내가 아닌 그 누구의 명령도 듣지 마라.

‘그 누구’에서 세르는 예외라는 말은 없었다. 다른 아가씨들과의 약속을 취소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사죄하면 된다.

앤은 돌아섰다. 바깥으로 나갈까 싶었다. 지금 그녀의 방으로 돌아가 봐야 어차피 말을 나눌 상대도 없었다. 항상 수다를 떨던 벨타는 결혼식 이후 갑작스레 조용해졌다. 소금물을 부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깨우지 말라고 몇 번 잠꼬대를 하더니 이제는 아롈의 명령으로 맹물을 부어도 조용했다.

걱정이 물밀듯 밀려왔다. 벨타는 맞장구를 아주 잘 쳤고,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듣다가 끼어들어 농담을 던지곤 했다. 밤새 소곤소곤 잡담을 하면서도 질릴 줄을 몰랐다. 가끔 피를 먹이고 물을 갈아줘야 하는 것만 빼면 그녀가 용이라는 사실도 잊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왜 갑자기 일어나시질 않는 걸까. 소금물의 농도가 맞지 않아서? 아니면 온도가 틀렸을까? 바다생물에 대한 책이라도 찾아 알아봐야 하는 걸까.

아롈은 벨타가 이상해지자 이참에 바다에 내버리고 오라 해야겠다고 이죽거렸지만 앤은 그리 냉정하지 못했다. 벨타에 대한 걱정에 젖어 걷고 있던 앤은 두 번째 모서리를 돌자마자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숨을 참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타오르는 붉은 머리였다. 붉은 머리는 순수한 금발만큼이나 드물었다.

클라리 경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앤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번개처럼 기억해냈다. 황후의 방 근처에 사는 사람은 마담 미네트 밖에 없다는 것.

앤은 등 뒤의 문으로 뛰어들었다.

창문도 없는 방은 어두웠다. 아마 창고로 쓰이는지 온갖 잡동사니며 낡은 가구들이 대중없이 놓여있었다. 이블린에 이런 주인 없는 방은 많았다. 아마 이 방을 사용하고 있던 시녀가 쫓겨나든가 시집을 가서 방이 비었는데, 다음 주인이 오지 않은 것 같았다. 곁방을 항시 쓰는 시녀는 측근 시녀 정도고, 보통은 주인의 방과 좀 떨어져 있는 다른 방에서 지낸다. 그러니 이런 곳에 이런 시간에 들어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숨을 좀 죽이고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숨어있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앤은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선 채로 얼어붙었다. 어둠에 제대로 적응하지 않은 눈으로 봐도 틀림없이 알 수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둘. 그들은 너무 놀라 나가라는 말도 못 하고 앤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슴이 내려앉은 것은 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귀까지 붉히고 뛰는 가슴에 손을 댄 채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뭐라고 말하지?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이건 아니잖아! 앤은 속으로 절규하며 뒤돌아섰다. 그리고 희게 염색한 레이스 스카프로 감싼 드넓은 가슴팍과 마주쳤다. 시선이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의아한 빛을 띠는 새파란 눈이 있었다. 앤은 반사적으로 문을 쾅 닫았다.

어쩌지, 어떡하면 좋지.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진퇴양난이다.

“레르헨펠트 양?”

앤은 쓸모가 없어진 탈출구를 등지고 힘없이 웃었다.

“안녕하세요. 클라리 경.”



처음에는 술이 없다고 버텼지만 방에는 앤이 남겨두고 간 브랜디가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망할 것. 빨리 좀 치울 것이지.

종을 울려 잔 두 개와 적당한 안주를 가져오라고 시킨 아롈은 도망치듯 앤의 방으로 들어가 잠옷을 벗었다. 옷을 갈아입겠다는 구실이었지만 사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술은 무슨 술.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미 잔뜩 화난 얼굴이었기 때문에 딱히 끈적이는 어깨에 뜨끈한 공기가 들러붙었다.

잠옷에 맨발인 채로는 아무리 진지하게 화를 내봐야 받아들여질 리가 없지 않은가. 짙은 색의 옷과, 알이 굵어 위압적으로 보이는 장신구를 애용하던 아롈에게 목에 리본과 프릴이 달린 잠옷은 벗은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러나 마땅한 옷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일단 전에 앤의 방에 들어와 본 일이 없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 리가 만무했다. 겨우 옷 궤짝을 찾아낸 다음은 시중인 없이 혼자 스테이로 허리를 죄는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결국 스테이와 파니에를 포기하고 아무 옷이나 골라 팔을 꿰어 넣었지만 몸에 꼭 끼는 옷은 땀 때문에 끈적이는 몸을 들여보내기를 격렬하게 거부했다.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치밀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몸을 집어넣는 데에 성공한 다음에야 남쪽 옷은 스테이가 없 맨살에 스토마커를 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북쪽에서는 드레스가 통으로 되어 있어 그걸 뒤집어쓰고 옷 위에 스토마커를 달았는데.

아롈은 분통을 터트리며 옷을 다시 벗어 팽개쳤다. 소매의 솔기가 터져있었다.

술은 무슨 술. 옷은 무슨 옷.

생각을 정리하겠다는 원래의 목적은 사라진 지 오래. 결국 궤짝 구석에 처박혀있던 루바쉬까와 사라판을 꺼내 몸을 집어넣었다. 서늘한 면으로 된 옷을 걸치자 눈물이 날 정도로 시원하고 편했다. 붉은 천에는 흔히 쓰이는 꽃 대신 건강을 기원하는 주문 수(繡)가 놓여있었다.

아롈은 미하일이 태어나기 전까지 이반 3세의 유일한 손녀였으므로 나이가 열 살을 넘긴 지 오래인데도 장수와 건강을 비는 수를 써야 했다.

내친 김에 머리를 한 갈래로 땋고 베일까지 뒤집어쓰자 완전히 고국에서 밤을 새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앤의 방에는 몸을 전부 비출 수 있는 큰 거울이 없었지만 격식 있다고는 말 못 할 모습일 것임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본국에서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사라판을 입지 않는다. 혼자 있을 때에나 편하게 입던 옷이다. 만에 하나 입는다 해도 이런 면으로 된 옷은 아니다. 비단으로 옷을 짓고 보석과 금과 은으로 장식한 관을 쓰고 값비싼 베일을 얹는다.

지금 쓰고 있는 베일은 소피야 황후의 유품인 진주 베일도 아니었을 뿐더러 고리를 걸어 고정시킬 관도 없어서 베일이 계속 흘러내렸다.

그나마 잠옷보다는 낫다고 해야 할까.

아롈은 손목의 끈을 조이며 심호흡을 한 뒤, 자신의 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부산을 떠는 동안 해는 지평선 끝으로 넘어가 있었다. 초여름이라 해가 길어졌다는 걸 감안하면 꽤 늦은 시간일 것이다.

남편은 탁자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하녀가 들어와 준비를 하고 나갔는지, 탁자에는 메추리구이와 치즈 몇 조각과 술, 잔 두 개가 놓여있었다. 하녀가 샹들리에를 켤 시간까지는 없었는지 초 다섯 개짜리 촛대만이 빛을 냈다. 아롈은 바짝 허리를 폈다. 그는 지난 새벽에 나간 모습 그대로 답답한 정장 차림이었다.

“앉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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