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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7. 꽃과 별과 수수께끼 (11)


 그는 아마도 처음 볼 북쪽의 차림에 별 말을 얹지 않고 술을 따랐다. 호박색 술이 찰랑였다. 안 그래도 예쁜 빛깔인 액체는 촛불 빛을 품자 환상적으로 달콤해 보였지만, 한 번 마셔보아서 안다. 저 술은 지독하게 쓰다.

아롈은 단숨에 들이켰다. 아니나 다를까 한 모금 넘길 때마다 혀가 아팠다. 목부터 뱃속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처럼 화끈하게 타올랐다. 머리가 핑 도는 취기는 그 다음이었다.

눈앞에 불쑥 각설탕이 담긴 종지가 나타났다. 아롈은 조금 망설이다가 손을 오므리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남편은 별 말 없이 설탕 종지를 치우고는 아롈의 잔을 다시 채웠다.

“건배도 않고 먼저 마시긴가요?”

아롈의 입술은 두어 박자 늦게 움찔거렸다. 아, 취했나보다. 그러나 그는 딱히 대답을 바랐던 건 아니었는지, 자신의 잔을 흔들었다.

“조금 독하군요. 다른 술을 가져오라고 할까요?”

술기운이 이렇게 무거울 수가. 한 잔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누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아까는 한 잔을 마시고 그대로 잠들었다. 아롈은 안간힘을 써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아뇨. 괜찮습니다.”

겨우 제 때 대답이 나갔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지 않았나요?“

"잠이 오지 않을 때는 간혹 마십니다.“

며칠 동안 밤을 새면 자고 싶어도 잠들지 못 할 때가 있다. 머리가 아파 죽을 것 같은데, 온몸이 피로를 호소하는데, 정신은 오히려 샘물처럼 명료해질 때. 그럴 때면 괴로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보드카를 딱 한 모금 마신 다음, 혹여 무슨 잠꼬대를 할까봐 입을 꼭 다물고 기절하곤 했다.

"그렇군요.“

아롈은 말없이 따라놓은 술을 다시 마셨다. 한 번에 잔의 바닥이 보였다. 겨우 진화(鎭火)된 목구멍에 다시 불이 붙었다.

남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잔이 찼다.

아롈은 다시 마셨다.

또 잔이 찼다.

다시 한 번 잔에 손이 가려는 순간 그는 팔을 뻗어 손목을 잡아챘다. 아롈은 돌 같은 속눈썹을 치켜 올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무례하십니다.”

“쉬었다가 마셔요.”

“고작 술 석 잔에 취객 취급이십니까.”

아롈은 허세를 부리며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깊이 잠겨있었다. 더군다나 혀도 조금 굳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져 자고 싶다. 하지만 여기서 순순히 말을 따른다면 뭐가 되는가.

“급하게 마시는 건 좋지 않아요.”

눈이 마주쳤다. 화려한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녹색. 어머니의 서리 낀 냉정함과는 다른 고요한 심록(深綠). 항상 차분하게 가라앉아 존재감을 숨기는. 이 사람 역시 오랜 기간 자신보다 높은 사람이 없는 지위에서 살아왔을 텐데, 어떻게 사람을 참아주는 여유가 남아있을까.

조금이라도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면 마주 화낼 텐데. 무엇이든 이 잡듯 트집을 잡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분을 풀 텐데. 그의 아버지가 아롈에게 준 모욕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표출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는 한숨 한 번 쉬지 않았다.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이 와중에도 조금은 잘 보이고 싶다. 잔을 놓고 싶다. 다리 벌려 아이를 낳는 씨받이 취급을 당한 지 일주일도, 한 달도, 일 년도 아니고 겨우 여섯 시간 남짓 지났는데. 어떻게 목줄에 매여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비굴해질 수 있을까.

곰곰이 더듬어보아도 자존심이 적게 다친 건 아니다. 오히려 으스러지고 뭉개져 흔적도 찾을 수 없을 지경이다. 지금도 그 싸늘한 눈빛과, 덜덜 떨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생생한데. 삶의 의미를 부정(否定) 당한 분노는 용암처럼 뜨거웠다. 그 자리에서 아무런 반발도 하지 못하고 정말 하찮은 것처럼 기어 나와서 요강에 구토나 하고 있었던, 무력한 자신에 대한 실망이 꿀렁거리며 손끝까지 약동했다.

그럼에도 아롈은 한편으로 끊임없이 변명거리를 찾고 있었다. 그의 잘못은 아니라고. 그런 말을 한 것이 그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이 사람에게 화를 낼 이유는 없다고. 어이없는 생각이다.

손에 힘이 풀렸다. 이렇게 사람이 미쳐가는구나. 멍청한 옐레나 파블로브나. 아롈은 손목을 잡힌 그대로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만 마시지요.”

취기는 빠르게 몸을 잠식했다. 점차 촉각이 둔해진다. 대신 온각은 선명해진다. 손이 뜨겁다. 아랫배가 뜨겁다.

몸이 허공에 붕 떠있는 것 같다. 발가락으로 몇 번이나 바닥을 더듬어보았지만 확실히 아롈의 발은 바닥에 찰싹 붙어있었다. 하지만 날고 있는 것 같다. 혹은 어디론가 빠져드는 것 같다. 깊은 바다나 진흙탕으로. 하염없이 가라앉아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오늘 정의관에 왔다고 들었는데요.”

아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손목은 아직 붙잡힌 그대로였다. 정의관, 정의관. 그래. 정의관.

벌써 둔감해지기 시작한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찍었다. 호 모양의 자국이 남았다. 후벼 팠다. 투명한 물이 나오고, 곧 새빨간 피가 맺혔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꼴불견인 이야기를 술술 뱉을 생각은 없었다. 정 궁금하면 직접 황제를 찾아가 물어보든가.

“들렀다 가지 그랬어요.”

입술이 벌어졌다. 숨에 술 냄새가 섞여 새어나왔다. 잘못 들었나?

"생각해보니 식 올린 지 보름이나 지나도록 정의관 안내를 해주지 않았군요. 언제든 생각나면 집무실에 들러요."

잠시 머리가 멈추었다. 대답하기 싫습니다, 라는 말이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왜 울었느냐고 앤을 족쳐 물어보지 않았던가. 당연히 그 이야기를 할 줄 알았다. 안내해 줄 테니 놀러오라는 말은 전혀 생각지도 못 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냥 말 돌리기일까. 남쪽 사람들은 도통 시간 아까운 줄을 몰라 말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빙빙 돌려댄 다음에야 본론을 꺼낸다. 그럼 말 돌리기에 응해주어야 하는 건가.

​"​바​쁘​시​잖​습​니​까​.​“​

무거운 머리를 부랴부랴 굴려서 꺼낸 변명은 취한 스스로가 듣기에도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필리프는 두 달 뒤에 일 년에 한 번 있는 대회의가 있다고 했다. 예산 편성부터 법률 개편, 작위 승계 등 다양한 것들을 논하고 몇몇 사항은 대공과 황실의 표결에 붙이는 중요한 회의라고.

아롈은 대체 어떻게 그토록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나라가 돌아가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롈의 이해와는 별개로 그런 회의를 준비하려면 어마어마하게 바쁠 것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뿌듯함도 잠시, 세시안은 빙긋 웃으며 변명을 깨트려버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렐르에게 줄 시간 정도는 얼마든지 낼 수 있어요.”

그러니까 꼭 와요, 알았지요? 그는 손톱 위에 입술을 대고 손을 놓아주었다. 어찌나 뜨거운지 화들짝 놀라 뿌리칠 뻔했다. 간신히 풀려난 손목을, 아롈은 다시 잡힐세라 아랫배 위에 붙였다.

잠깐.

“아렐르?”

“생각해보니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소개하지 않았던가요. 아렐르라고.”

그렇게 부르면 안 되느냐는 말에는 할 말이 없었다. 아롈은 다시 한 번 멍청했던 첫 만남의 자신을 탓했다.

“저는 아렐르가 아니라 아롈입니다.”

쓸데없는 사족을 붙였다는 생각에 귀가 화끈거렸다. 하지만 그는 타박을 하는 대신 몇 번이고 이름을 불러보더니 어려운 발음이라며 어깨를 으쓱하고 웃어버렸다. 아롈은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남편은 술을 홀짝이며 잡담을 늘어놓았다. 저 튤립은 리젤로트가 가져온 것이냐, 붉은색이 잘 어울린다-옷 모양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머리를 한 갈래로 땋아도 예쁘다 등의 시시껄렁한 것들이었다.

아롈은 술잔에는 더 손을 대지 않고 안주로 나온 치즈만 오물거리며 간간이 대답을 했다. 아렐르, 그가 그렇게 부를 때마다 어깨와 목이 딱딱하게 굳었다. 분명 크리스틴이 부를 때에는 멍청한 발음이라고 생각했다. 미셸은 제대로 발음하는 사람들이 왜 아롈은 발음하지 못 하느냐고.

저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보들보들하고 폭신폭신한 이름이 아닌데. 내 이름은.

어지러웠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손가락에 낀 반지가 반사하는 빛과, 붉은 사라판 위로 도드라지는 흰 살결 때문에 저기가 손등이구나, 간신히 짐작할 따름이었다.

“피곤해요?”

“예에.”

“가서 자겠어요?”

세시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아롈은 손을 잡는 대신 멍하니 그의 얼굴을 찾았다. 눈이 어디쯤에 있지. 아까까지는 눈이 보였는데 지금은 그냥 커다란 덩어리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저기가 얼굴일까.

취기가 이미 머리끝까지 차있었다. 아롈은 눈을 마주치는 걸 포기하고 충동적으로 물었다.

“안 물어보십니까?”

“뭘요?”

“왜 울었는지.”

“물어보면 대답해줄 건가요?”

​“​н​е​т​(​아​뇨​)​.​”​

너무 단호했을까. 눈치를 보고 싶어도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잖아요.”

눈을 가늘게 뜨자 겨우 얼굴이 어슴푸레 보였다. 방금까지 얼굴이라고 생각했던 건 손바닥이었다. 어쩐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알 수 있었다.

“이야기하고 싶어지면 그 때 말해 줄래요?”

이번에는 소리 내어 웃었다. 뺨에 입술도 닿은 것 같았다.

“이제 가서 잘까요?”

그 손을 잡으려고 했는데, 아롈의 손등이 딸깍 떨어졌다. 몸이 조금 흔들렸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쿵. 쿵. 쿵. 초침 대신 심박이 울리며 시간을 알려주었지만 그마저도 점차 멀어졌다. 모든 감각이 잦아드는 가운데 음색이 풍부한 목소리만이 신탁처럼 울렸다.

“아렐르?”

치사하다.

그런 목소리로 말하고, 그런 눈빛으로 보고, 그런 말을 해버리는 건. 도망갈 여지도 주지 않고. 이만큼 떨어져 있으니 이제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목전에 닥쳐 생글생글 웃고 있다.

비열하고, 악랄하고. 또 무슨 말이 있더라. 원래 이러려던 게 아니었다. 화를 내려고 했다. 아주 많이, 오래오래 기억하고 있으려고 했는데. 발아한 지 얼마 안 된 싹의 뿌리에 증오라는 독을 부어서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자요?”

아닙니다.

눈이 감겼다. 뿌리가 한 번 더 팔을 뻗었다.

 

학기가 끝나고, 성적도 다 나오고, 일주일간 푹 쉬었습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P.S. 본격 방학 연재물이 되는 것 같아 부끄럽네요...
여름 눈송이는 이북 계약을 했고 12월 31일까지 마감하기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총 12챕터 예상 중이며, 늦더라도 내년 2월 28일까지는 완결낼 예정입니다.

P.S.2. 그간 비축분이라도 털어서 찾아뵐까 고민했는데 그래도 쌓아놓는 게 좋을 것 같아 ​아​껴​두​었​어​요​ㅠ​ㅠ​ㅠ​ㅠ​ 챕터 한 개 반 정도의 비축분이 있는데 퇴고하면 금세 없어질 것 같아서 두렵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온한 밤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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