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열 (2)
“언제 오셨습니까.”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사실 남편이 소리도 없이 들어와 앉아있는 건 충분히 익숙해졌다. 왜 허락을 받지 않고 들어오느냐고 볼멘소리를 해도 그는 유들유들하게 웃으면서 적당히 넘어가곤 했다. 시녀들은 막을 생각은 안 하고 오히려 차까지 끓여다 갖다 바쳤다.
곁눈질로 남편이 항상 앉아있는 자리를 보자 아니나 다를까 다과와 책이 놓여 있었다. 망할 것들.
“그게 중요한가요?”
아롈은 손수건을 받아 스스로 코를 눌렀다. 진한 초록빛 눈에는 걱정이 한껏 어려 있었다.
“요즘 잠을 잘 못 자나요?”
잠이야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사람이 생긴 이후 자주 깨는 편이었고, 정사라도 있는 날에는 더 늦게 잠들었지만 그만큼 늦잠도 늘어서 코시카에 있을 때에 비하면 수면 시간이 두 배에 가까웠다.
“아닙니다.”
코피 몇 방울 흘린다고 쓰러지는 것도 아니고 그리 큰일도 아니다. 사실 아롈은 코피보다 남편의 발밑이 훨씬 신경 쓰였다.
분명 저쯤에 펜이 떨어졌다. 상아펜대에 은촉을 끼운 것으로 딱히 구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가진 펜이 하나밖에 없었다. 거의 하루 종일 펜을 잡고 있는 만큼 필기구에 까다로운 취향을 가지고 있는 아롈이 열 다스쯤을 퇴짜를 놓은 끝에 살아남은 유일한 물건이었다.
망가졌다면 꽤나 가슴이 아프겠지.
대체 이 남쪽 사람들은 뭐 하나를 시켜도 세월아 네월아. 상아말 하나 만드는 데에 2주일을 달라고 했으니 새 펜은 꼬박 사흘은 걸릴 것이다.
허리가 아프고 목도 뻣뻣했다. 점심을 먹은 후 자리에 앉아 한 번도 자리에서 일어나질 않아 엉덩이도 쑤셨다.
하지만 아롈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소리 없이 웃었다. 아프다고 걱정해주는 것이 기분 좋아서,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에 호들갑을 떨어주는 것이 기뻐서 가슴이 간질거렸다.
“씻고 오겠습니다.”
“괜찮아요?”
코피는 금세 멎었다. 앤의 시중을 받으며 는질거리는 핏덩이를 부드러운 수건에 풀어내고, 내친 김에 화장까지 지웠다.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남편은 바로 그것을 내려놓고 다가와 아롈의 손을 잡아 받쳤다. 지금은 꼭 끼는 구두가 아니라 실내화를 신었는데도.
“괜찮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자연스럽게 나오는 배려는 사실 특별할 것도 없었지만 어쩐지 부끄러운 나머지 말투가 한층 딱딱해졌다. 아롈은 붉어진 목을 어쩔 줄 몰라 더 볼 것도 없는 실내를 둘러보았다.
이제 보니 방 안이 밝았다. 아직 해가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이 시간이면 방이 조금은 어두워져야 정상이었다. 어느 새 샹들리에가 켜져 있었다. 사슬을 당겨 샹들리에를 바닥으로 내리고, 양초에 불을 붙여 다시 올리는 소란을 피웠는데 몰랐단 말인가.
한 번 집중하면 누가 몇 번이고 불러도 모르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좀 심했다. 남편은 제법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편이었고, 늦는 일이 있으면 항상 전갈을 보내주었다. 평소 일정과 지금의 시간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제법 오래 기다렸을 터였다.
“부르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냥요.”
이 대답도 항상 비슷했다. 그는 언제나 오래 기다렸노라고 으스대거나 생색을 내는 법이 없었다.
세시안은 자리에 앉자마자 버릇처럼 아롈의 손등에 한 번, 반지의 진주 위에 한 번 입술을 댔다. 여기까지는 항상 있던 일이었는데 그 다음이 달랐다. 짙은 눈썹이 잠시 꿈틀하더니 커다란 손이 이마를 덮었다. 서늘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는 뺨이며 목에도 손등을 대보고는 정말이지 별 것도 아닌 내용을 세상이 멸망하는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라도 된 양 무거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열이 있는데요.”
“그렇습니까.”
미열이야말로 코피보다 자주 있는 일이 아닌가.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의사를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
아롈은 기겁했다.
“고작 미열입니다.”
“열 뿐만이 아니라 갑자기 코피도 나잖아요. 진찰이라도 받아보는 게.”
“월경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럴 뿐입니다.”
“월경 중이면 몰라도 끝나고 열이 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군요.”
아롈은 달거리 주기가 제멋대로였다. 초경을 한 지 얼마 안 된데다가-유폐 당했을 때 시작했다- 심기가 불편한 일이 있으면 그대로 거르곤 해서, 시작한 지 일 년 가까이 됐는데 바로 그저께 네 번째 월경이 끝났다. 혼행길 내내 피가 비친 것은 한 번 뿐이었다.
시집온 지 한 달 반이 되도록 월경이 없자 몇몇 시녀들은 은근히 임신이 아니냐며 설레발을 쳤지만 며칠 으슬으슬하더니 그대로 피가 터졌다. 그마저도 이틀 비치더니 그대로 끊겼다.
“저는 원래 그렇습니다.”
사실 아니었다. 그러나 남편의 눈빛을 보건대 병명을 하나라도 꺼냈다간 정말로 아롈의 손목을 끌어다 의사에게 던져줄 듯했다.
“정말인가요?”
“예.”
북쪽에는 남쪽 의사는 멀쩡한 사람 이를 생으로 뽑고, 치료랍시고 손을 베어 피를 줄줄 뽑아대는 돌팔이라는 속설이 있었다. 아롈도 북쪽에서 나고 자란 만큼 그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이 말을 들은 소피는 박장대소를 하더니 루이 조제프 황제가 의사를 시켜 형제들을 암살했다는 이야기 쪽이 훨씬 신빙성이 있다고 속삭였지만 그 쪽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북쪽에서도 어지간한 고열이 아닌 이상 의사를 부르지 않았다. 하물며 남쪽에서야.
“알겠습니다. 하룻밤 두고 보지요. 그래도 일은 쉬는 게 좋겠어요.”
“예?”
“그렇잖아요. 연회 준비를 맡은 이후부터 갑자기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고, 하루 종일 신경을 써서 그런 게 아닌가요. 가벼운 산책도 일절 나가지 못 하고 있고요.”
아니다. 오히려 로렌에 와서 늦잠이 늘었을 뿐 원래 코시카에서 일어나던 대로 새벽 5시에 일어날 뿐이었다. 더군다나 밤을 새는 일이 잦았던 체사레브나 시절과 달리 요즘은 일절 그러지 않는다.
가끔 하던 산책을 하지 않는 것은 더운 날씨와 불편한 신발 때문에 꼼짝하기 싫어서이지 바빠서가 아니었다.
“무리한 부탁을 해서 미안합니다. 날이 밝는 대로 제가 크리스틴에게 가서…….”
“전하.”
아롈은 대번에 얼굴을 굳혔다.
“고작 미열이나 코피, 둘 다 가벼운 것입니다. 조금 쉬면 나을, 병이라고 칭하기도 민망한 것을 가지고 이미 맡은 일을 팽개치라 하십니까.”
더군다나 일을 맡은 요 며칠 아롈은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멍하니 앉아 시계만을 쳐다보고 있던 멍청한 나날들과는 다르게. 비록 하던 일이 아닌 낯선 ‘여자의’ 일이라 하더라도 할 일이 있다는 사실에 물살을 헤치는 물고기처럼 신이 났다.
“어차피 차후에는 제가 하게 될 일, 지금 미룬다 해서 나중이 없어집니까. 평생 미룰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제 일이라고 전하께서도 말씀하셨잖습니까. 빼앗지 말아주십시오.”
단어를 고를 틈도 없이, 말투를 가다듬을 틈도 없이 말을 내뱉고 나자 숨이 찼다. 너무 말투가 강했을까. 아롈은 맞는 말을 뱉어놓고도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남편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놀랄 정도로 진지한 얼굴로 생각을 하더니, 녹아내릴 것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아롈의 손등에 정중하게 다시 입술을 눌렀다.
“그렇군요. 생각이 짧았습니다. 못 들은 것으로 해주겠어요?”
“기꺼이.”
“그래도 아프니까 당분간 쉬면서 하겠다고 약속해주겠어요? 식사는 여기로 가져오라고 할까요?”
응접실에서 식사를 한다는 건 오늘은 따로 자겠다는 말일까. 아롈이 직접 고사했던 사흘을 제외하면 남편은 항상 시간을 내서 밤에는 자비관에서 자고 갔다.
정사(情事)가 없는 날에는 어머니와 붙어있는 날이 없었던 파블 1세와 달리 손만 잡고 자는 밤도 많았지만.
“혼자 쉬고 싶다면 정의관으로 가겠지만요.”
“괜찮습니다.”
아차. 대답이 너무 빨리 나왔다. 아롈은 새빨갛게 익어버린 채로 손을 내저었지만 이미 늦었다. 세시안은 아롈을 끌어안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혼자 잘 웃는 사람이다. 품은 포근했다. 웃음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부끄러움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바짝 힘이 들어갔던 어깨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아롈은 턱을 어깨에 괴고는 멍하니 생각했다.
이래도 덥지 않고 시원한 걸 보니 열이 있긴 한가보다. 원래 남편의 몸은 항상 아롈보다 뜨겁게만 느껴졌다.
웃음을 그친 세시안은 아롈을 끌어안은 채로 물었다.
“내일 누굴 만날 일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