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문화 콘텐츠 사이트 삼천세계

여름 눈송이


8. 열 (3)


 “내일 누굴 만날 일이 있나요?”

“없습니다.”

매일 밤마다 일정을 캐묻는 통에 없다는 걸 제일 잘 알 만한 사람이 새삼스레 왜 다시 묻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럼 내일 오후는 제게 주겠어요?”

“오찬이라도 함께 하시겠습니까.”

“안타깝게도 선약이 있어요. 크리스틴과 함께 황립과학발전위원회 회원들의 알현을 받기로 했지요. 이번에 대단한 발견을 했다고 해서 치하할 겸. 끝나고 보아도 괜찮을까요?”

“무슨 발견입니까.”

“그걸 들으러 가는 거라서. 듣고 와서 ​얘​기​해​주​겠​습​니​다​.​”​

“그 때 뵙겠습니다. 부디 재미있는 이야기이길 바랍니다.”

아롈은 짧게 망설이다가 사족을 덧붙였다.

“기대는 하지 말아요. 틀림없이 재미없을 거예요. 다들 괴짜들이니까.”

아롈은 돈을 달라고 청하는 수많은 서류들을 봐 왔지만 소위 과학을 한다는 사람들의 탄원서만큼 황당한 사연을 보내는 집단은 손에 꼽았다. 망원경 비슷한 것을 만들어 물속에 있는 자그마한 생명체를 보고 싶으니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를 내려달라는 신청서야말로 압권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있는지도 모를 생명체를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다이아몬드를 쓰겠다고?

쓴웃음이 나왔다.

“알겠습니다.”

잠시 뜸을 들인 세시안은 아롈을 놓아주고는 일어나 종을 울렸다. 앤을 부르는 종이 아니라 하녀를 부르는 종이었다. 하녀가 달려와 식사라도 가져오라는 명령을 받아갔다.

하녀가 나가자마자 세시안은 손을 뻗어 아롈의 귓불을 건드렸다.

“그런데 못 보던 귀걸이로군요.”

“새로 맞췄습니다.”

앤이 오늘 찾아온 루비 귀걸이는 생각보다도 훨씬 앙증맞았다. 코시카에서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겠지만 사자마자 뜯어 귀에 달았다. 노란 옷 위에 붉은 보석이니 확 튀리라 생각했다. 어떤 평이 나올까 두근거렸다. 매일매일은 시험이었다.

“붉은색이 노란 옷과 잘 어울리네요. 오늘도 예뻐요.”

칭찬만큼이나 달콤한 이마에의 입맞춤.

추파를 던지는 잡놈이나 늘리지 별 쓸모없다고 여기던 반반한 낯짝에 감사하게 된 건 다 이 사탕발림 덕이었다. 어머니를 닮은 얼굴을 거울에서 볼 때 곱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얼굴로 사람을 잡을 수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냐고 여겼을 뿐이다.

미모로민 따져도 어머니가 헬레네-옐리자베타 유리예프스카야 공비-보다 비교할 수 없이 우월했는데도 아버지는 헬레네를 사랑했다. 차라리 아롈은 타고난 금발이며 녹안, 이목구비가 죽은 이반 파블로비치를 닮았다는 이유로 알렉산드르의 흥미를 끌 수 있었다는 점을 더 높이 평가했다.

그 때는 예쁘다는 말이 이렇게나 달콤하고 자랑스러운 말인 줄은 미처 몰랐다. 잘 어울린다, 예쁘다 하는 칭찬이 한 마디 한 마디 쌓일 때마다 거울 보는 시간이 조금씩 늘었다. 다만 일 초라도 시선을 더 끌고 싶어서. 비록 알량한 외모나마 마음에 든다 말하고 웃어주는 목소리가 두근거려서.

아롈은 심장 소리가 부끄러워 손끝을 움츠렸다.

설마하니 들릴까. 들리면 안 되는데.

몸이 뜨거웠다.

 

“어마마마.”

미네트는 탁자에 엎드려 잠들어있는 황후를 흔들어 깨웠다. 그녀는 손에 트럼프 카드를 꼭 쥔 채로 잠들어 있었다. 검의 3. 심장을 찌른 세 개의 검이었다.

“어마마마. 일어나세요.”

황후는 눈을 찌푸리고 몸을 일으켰다. 미네트는 밤새 베고 자서 저리게 아플 황후의 팔을 정성스레 주물렀다.

“들어가서 주무셔야지요.”

“다른 부인들은 다 어디로 갔니?”

“벌써 다들 돌아갔답니다. 벌써 해가 떴어요.”

“인사도 하고 가지 않다니!”

“모두 난처해했어요. 어마마마께서 잠드셔서 도통 깨어나지 않으시던 걸요. 피곤하시면 일찍 끝내시지 그러셨어요.”

“몇 판이나 졌단다. 다들 통 예의가 없어. 한 판 정도는 져주는 게 예의 아니니?”

“네. 네. 다음에 오면 다른 걸로 혼을 내주세요.”

미네트는 탁자에 널려있는 루아르 금화를 도로 가죽 주머니에 쓸어 담고 카드를 모아 갑에 넣었다.

“다음엔 주사위 놀이를 할 거란다. 전부 박살내고 보석들을 다시 찾아올 테야.”

“그러세요. 그러시면 되지요. 자, 일어서세요.”

황후는 미네트의 팔을 짚고 일어섰다. 황후는 크게 절뚝거리며 몇 걸음 떨어져 있지 않은 침대에 앉았다. 어린 아이처럼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미네트는 미리 데워둔 물을 부은 대야를 가져다 놓고 어머니의 신발을 벗겼다. 꼭 끼는 굽 높은 신발을 벗기자 발이 훤히 드러났다. 퉁퉁 부은 왼발은 별다를 것이 없었지만 오른발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완전히 하나의 살덩어리 같은 발에는 보랏빛 멍이 여기저기 들었고 끄트머리에는 네 줄기의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아주 오랜 상처인 듯 보였다.

까만 피와 누런 고름이 섞여 악취를 풍겼다. 미네트는 더운 물에 적신 수건으로 천천히 그 발을 닦았다. 그 동안에도 황후는 정신없이 떠들었다.

“너는 내가 못마땅해서 죽겠지? 미간에 벌써 주름이 졌구나. 그래도 내가 심심해서 살 수가 있어야지. 일단 살아야 할 것 아니냐. 자식들이라고 있는 것들이 생전에 찾아올 생각을 않잖니. 한 명도 곁에 붙어있는 것이 없으니 원. 몇 명을 낳았는데 다들 헛키웠어.”

한 명도. 미네트는 고개를 숙이고 서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발을 닦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진물을 꼼꼼하게 닦아낸 미네트는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걷어내고 얇은 천으로 발을 싸맸다.

“무료하시다면 꿈을 꾸시면 되잖아요.”

“꿈에서 뭘 본단 말이냐. 엘리엔 그 년이 얼마나 잘 사는지 구경할까? 여제의 옷을 두르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면 내 속이 참 잘도 편하겠구나! 하!”

여기에서 말하는 엘리엔이란 미네트의 올케 언니이자 황후의 며느리를 뜻하는 말이 아니었다. 보르디 대공녀이자 얼마 전 코시카 여제로 즉위한 옐레나 1세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네트는 알고 있었다. 황후가 종종 옐레나 여제의 삶을 엿보고 즐거워했다는 것을. 그 대가로서 며칠 동안 잠을 못 자면서도 꿈에 들어가 저주의 말을 퍼붓고 나왔다는 것을. 마르그리트 황후는 그런 말들을 자랑스레 미네트에게 떠들곤 했다.

어리고 예쁘다고 그렇게 젠 체를 하더니 결국 팔자를 보라며. 자신은 황후요 그 계집애는 대공비, 혹여 아들에게라도 황위가 바로 넘어갔다간 평생 황후는 못 될 거라고 숨이 넘어가게 웃곤 했다.

“아니면 네 오라비 신방이라도 엿보리? 내 아들이 그 년의 딸년 좋아 죽고 지내는 걸 내 눈으로 보느니 눈을 찌르고 말지.”

“사이가 좋은지는 어찌 짐작하시고요.”

사실 사이는 좋았다. 세시안이 뻔질나게 자비관을 드나든다는 것은 이젠 얘깃거리도 되지 않을 정도였으니.

황후는 입술을 삐죽였다.

“뻔하지. 난데없이 뺨 맞았던 이 어미 마음은 생각지도 않고 먼 곳에서 시집온 어린 계집애만 불쌍하다고 싸고돌 것 아니냐. 하여튼 사내들이란 젊든 늙든 예쁘고 어린 여자가 불쌍한 척을 하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

미네트는 말도 안 되는 푸념에 대한 반박 없이 발을 다 싸매고 매듭을 지었다. 황후는 다리를 침대 위로 올리고 몸을 누였다. 미네트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생각만 하면 가서 머리털을 다 뽑아놓고 싶은데 내가 아들의 면을 봐서 참는 거란다.”

“네, 그럼요. 그럼요. 어마마마께서 가장 자비로우시죠. 이만 편히 주무세요.”

“거스를 만나러 갈 거란다.”

아까까지 꿈을 싫다고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는 언제고, 황후는 온화하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꿈을 꾸러 가는 것이다. 꿈 속에서 황후는 아무에게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발이 없어도 자유롭다. 미네트는 이불을 토닥이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세상은 정말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