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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8. 열 (11)


 아롈은 드물게도 꿈 없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한 번도 죽은 사람들이나 알렉산드르나 용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지 않고, 옆에서 머리카락을 쓰다듬든 뺨을 만지든 입을 맞추든 기겁하지 않고 새근새근 숨을 내쉬며 얌전히 잤다.

쿵쿵쿵. 쿵쿵쿵.

누군가 침실 문을 두드렸다. 끌어안고 있던 사람이 침대에서 빠져나가도 조금 뒤척일 뿐 아롈은 깨지 않았다.

베개에 뺨을 대고 있던 아롈을 깨운 것은 목소리였다.

“조용히 하세요. ……부터 뭐하는 짓인가요.”

“혹시 ……면 깨워 달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 경. 그것도 ……에 따라…….”

“세르. ……의 수석시녀가 찾아와 ……의 행방을 혹시 아느냐고 ……께 여쭈어 달라 청하기에 제가 ……께서 여기 계시다 알려드리기는 했습니다만, 오늘 …… 과 약속이 있는 것을 부디 …… 말씀 전해달라는 부탁이 있었습니다.”

남편의 목소리는 독특한 울림이 있어서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말에 대답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어디서 들었더라. 아롈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멍하니 생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새카만 잠속에서 흐느적거리던 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데에는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 같이 있는 걸 알면서도 그런 겁니까. 너무하지 않나요. 이래봬도 신혼인데.”

“세르, 그에 대해 잠시 드릴 말씀이.”

그리고 갑자기 목소리가 낮아졌다. 입속말에 가까운 웅얼거리는 소리라 반쯤 잠들어있던 아롈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대화가 몇 번 오가고, 남편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런가요. 준비하고 나가겠습니다. 아, ……에 연락 좀 해주겠어요?”

“이미 연락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아.”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문이 닫혔다.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뺨에 축축한 것이 닿았다.

“잠자는 공주님(la Princesse au dormant). 일어나요.”

“Я не ​п​р​и​н​ц​е​с​с​а​(​공​주​ 아닌데)…….”

“예?”

아롈은 간신히 눈을 떴다. 초점이 잘 맞지 않았다. 몇 번 더 깜빡이자 간신히 흐릿한 시야가 걷혔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

“Ваше ​И​м​п​е​р​а​т​о​р​с​к​о​е​ ​В​ы​с​о​ч​е​с​т​в​о​(​전​하​)​…​…​?​”​

“미안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목이 깊이 잠겨 있었다. 아롈은 봄의 눈처럼 녹아버린 머릿속에서 단어를 건져 올렸다.

“전하(Son Altesse ​I​m​p​é​r​i​a​l​e​)​…​…​.​”​

목이 깊이 잠겨 있었다. 뺨에 닿은 것은 입술이었구나.

“더 자게 해주고 싶은데, 일어나야 해요.”

아롈은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질 않았다. 정말이지 죽을 만큼 피곤했다.

“샤를루아 공작부인과 만나기로 했다면서요. 시녀들은 여기로 오라고 했어요.”

잠깐만. 여기?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의 색이 달라졌다. 가구도 다르고, 침대에는 천개가 없었다. 창밖으로 항상 보이던 건물들의 위치가 달라졌다.

“아렐르?”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게으름을 피우고 있던 의식이 순식간에 수면 위로 떠올라 푹 녹아있던 머리를 잠식했다. 바쁘게 돌아가던 머리는 간결한 결론을 토해냈다.

미쳤나봐.

세상에, 정사 직후에 그대로 잠이 들다니. 그것도 정의관에서!

잠깐만 자고 해가 뜨기 전에 자비관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게다가 몸 상태는 어떤가. 몸을 덮은 이불을 슬쩍 치워보니, 남편이 정리한 듯 불행 중 다행으로 깨끗했으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간신히 몸을 가려주고 있었다. 시트도 지저분했다. 당연했다. 자비관에서처럼 미리 천을 깔아둔 것이 아니었으니까! 시큼한 냄새가 아직까지 났다.

그래, 처음 오는 정의관 침실에서 분위기에 휩쓸려 정사를 나눈 것이야 그렇다 치자. 부끄럽게 신음한 것까지도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흔적은 정리하고 옷을 걸치고 잠들었어야 했다. 말하기도 부끄러운 액체들로 더럽혀진 시트 위에서 그대로 알몸으로. 뭐라고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천박하다.

아롈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대체 왜 그랬을까. 자신보다 일을 우선시 해달라고 잘난 척 떠들어놓고는. 팔이라도 자르고 싶었다. 허락하지 않으면 당장 죽어버릴 것 같은 얼굴, 생각만 해도 부끄러워지는 그런 얼굴로 쳐다보며 간절히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 안기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팔이 아니라 눈을 파내야 할 것 같다.

“무슨 일이에요?”

원래 남편과의 밤은 항상 부드러웠다. 그는 꼭 아롈이 뭉개질까 두려운 것처럼 정성스레 어루만지고, 느긋하게 배려해주었다. 심지어 안에 들어올 때에도 그 다정한 빛은 꺼지는 법이 없었다. 일이 끝나면 침착하게 물에 적신 수건으로 뒷정리를 하고 잠옷을 다시 입은 다음 깔아놓은 천을 치우고 깨끗한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그런데 간밤은 달랐다.

온 몸이 욕망으로 뜨겁게 이글거렸고, 질척거렸다. 숨을 잘못 쉬면 속이 까맣게 그을릴 것 같았다.

-목소리 귀여워요.

-조금만 더 보여줘요. 응? 정말 조금만.

살살 구슬리는 목소리에 넘어가 창녀처럼 쾌락에 젖어, 장소도 상황도 잊었다. 자신은 바쁜 남편을 배려해주려 찾아온 것이 아니었더란 말인가. 스스로의 자제력에 회의까지 들었다.

“아렐르.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은데요.”

갑자기 눈앞이 밝아졌다. 침대에 걸터앉은 세시안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길로 아롈의 손을 잡아 내리고 감싸 쥐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부부간에 사석에서 벌어진 일은 고개 숙이거나 수치스러워할 게 아니에요. 침대 위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더욱. 입술 깨물지 말아요.”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순순히 이를 물렸다. 입술을 깨문 게 아니라 입술 안쪽의 살을 떼어내고 있던 것이라곤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안고 싶다고 한 건 저고, 늦게 일어난 것도 아렐르와 있고 싶었던 제가 선택한 일이에요. 아렐르는 책임이 없어요. 알았지요?”

아롈은 남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오른손을 빼서 미간을 문질렀다. 어딘가 변했다. 태도도, 표정도, 말투도, 몇 시간 전과는 달랐다. 아예 딴판이라고 할 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착각이라고 넘길 만큼 미미한 변화도 아니었다. 영문을 모르겠다.

“하지만 전하. 그 말씀은 궤변입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롈은 미간을 문지르던 손을 내려 남편의 손 위에 겹쳤다.

“청하신 것은 전하이나 허락한 것은 저입니다. 그 순간 저 역시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간밤에 전하께 드린 말씀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 순간 세시안의 입매와 눈매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그 ‘변한’ 표정은 무심코 손끝으로 만져보고 싶을 만큼 빛이 났다. 입 안에 침이 말랐다. 가슴 끄트머리의 봉오리가 딱딱하게 곤두섰다. 물색없이 가슴이 뛰었다.

왜 신은 사람을 만들 때 심장을 몸속에 담은 걸까. 하다못해 심장을 밖에 빼놓을 수 있었더라면 들킬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이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하고 싶어, 뭐라고 말을 뱉으려는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안타까웠다.

“하아, 정말이지 협조를 안 해주는군요.”

세시안은 평소와 같이 아롈의 손등에 키스하고는 손을 놓았다.

“준비할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좀 짧네요.

P.S.  잠자는 공주님의  la Princesse au dormant는 ​P​r​i​n​c​e​s​s​e​가​ 아니라 la Belle au bois dormant로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되어야 맞습니다만 작중에서 변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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