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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8. 열 (12)


 

아롈은 자비관에서 불려온 시녀들의 시중을 받아 무사히 자비관으로 돌아갔다. 남편은 데려다주겠다고 했으나 아롈은 거절하자 그는 두 번 묻지 않았다. 정말 바쁜 것 같았다.

지나가는 남자들의 시선이나 수군거림은 각오했던 일이므로 아롈은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응접실에 도착한 아롈은 미리 약속했던 대로 샤를루아 공작부인 이본느를 만나서 보르디에서 구매할 수 있는 포도주의 종류와 물량에 대해서 상의했다.

필요한 술을 한 산지에서만 구매해서 양을 충당할 수도 없거니와 한꺼번에 사들이면 가격이 폭등하게 된다. 그걸 생각해서 적당히 부르고뉴, 보르디, 수입산을 섞어 사용해야 했는데, 아롈은 가장 수익성이 좋은 것은 보르디에서 고를 생각이었다.

보르디에서 대회의 때문에 이블린으로 올라온 이본느는 그녀의 남편인 필리프의 깐깐한 얼굴과는 달리 아주 순한 인상의 부인이었는데, 그녀는 전 보르디 대공의 셋째 아들의 딸로서, 필리프의 사촌인 동시에 아롈의 사촌이었다.

이야기를 끝내고 바로 보내기도 뭣해서 차라도 한 잔 더 하고 가라고 권했다.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루한 사람이라고 박힌 인상은 완전히 변했다.

이본느는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으면서도 선을 잘 지켜 농담을 하는 재주가 있었다. 둥그런 눈에 힘을 주고 필리프의 흉내를 내는 걸 보고 아롈은 배가 아플 정도로 소리 내서 웃었다.

필리프의 뒷담을 늘어놓으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해가 졌다. 긴 의자에 거의 눕다시피 하고 깔깔거리던 아롈은 마침 들어오던 세시안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이본느와 시녀들이 와르르 일어났다.

복잡한 이유로 붉어진 뺨에 입을 맞춘 그는 식사라도 같이 하자며 이본느를 붙잡았지만, 이본느는 신혼부부의 밀월을 방해하는 눈치 없는 짓을 할 순 없다며 사양했다.

결국 단 둘이 식당에 간 아롈은 오리 다리 ​콩​피​(​C​o​n​f​i​t​)​를​썰​어​ 입에 넣으면서도 의아한 심정이었다. 원래 아롈의 손님에게 남편이 관여하는 일은 일절 없었다.

-무슨 일이에요?

붉은 포도주가 찰랑이는 잔을 만지작대며 마실까 말까 고민하던 남편이 생긋 웃었다. 언제나 그렇듯 다정한 웃음이었다. 짧은 의문이 스쳤다. 아침과는 다른. 대체 그건 뭐였을까. 그 한없이 말랑말랑하고 따뜻하고 부끄럽던 그 얼굴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후식이 나올 때쯤 세시안은 느긋하게 물었다.

-혹시 아렐르는 불을 켜두면 잠을 못 자나요?

오히려 반대였다. 오랜 시간 적응한 끝에 불을 끄고도 잘 잘 수 있게 되었지만, 가끔은 무서워서 불을 켜놓곤 했다. 괜찮다고 대답하자 그는 아주 다행이라는 듯이 웃었다.

-그럼 앞으로 제가 밤에 불을 써도 괜찮을까요?

일감을 들고 오겠다는 뜻이었다. 아롈은 단박에 승낙했다. 식사를 다 하고, 양치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침실에 들어가자 남편은 책 대신 서류철을 펼쳐들고 있었다.

그는 아롈더러 극구 먼저 자라고 권했으나 아롈은 앤을 시켜 응접실에 있던 일감들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종이가 산처럼 쌓였다. 며칠 더 두어도 되지만 당장 다음날까지 해야 하는 일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 양을 본 남편은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하지요. 같이 밤을 새야 할 것 같은데요.

이틀째 거의 잠을 자지 못한 남편에게는 미안하게도, 그 말은 달콤하기만 했다. 당연하게도 ‘같이’라고 한 것이다.

밤새 침대에 머리 한 번 대보지 못했지만 아롈은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일 때문이 아니었다. 그토록 일에 집중을 못 해본 적도 얼마 없었다.

혹시 고개를 들면 눈을 마주칠까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한참 집중하는 진지한 얼굴이 보이는 게 좋았다. 거짓말처럼 그가 고개를 들고 웃어줬을 때는 내내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마치 우연인 양 어깨에 손을 올리고 목을 풀거나 금세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멍청한 짓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이게 뭐예요?

겨우 집중하고 있던 아롈은 보랏빛 글자 두 줄을 보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무렇게나 펼쳐놓은 상아색 종이 중 한 장이 남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대체 왜 저걸 들고 있는 거지? 서류 하나를 끝내놓고 한눈을 파는 사이 발견한 게 틀림없었다.

-단순한 낙서입니다.

빼앗으려고 손을 뻗는 것은 중요한 종이라고 광고하는 일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하곤 다시 계산을 이어나가려 했다. 하지만 남편의 다음 말에 고개를 튕기듯 들 수밖에 없었다.

-이 LSJX는 전가요?

-다른 사람입니다!

-아하, 사람 이름이긴 하군요.

아롈은 남편의 놀림에 우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게나 뻔한 ​유​도​신​문​(​誘​導​訊​問​)​에​ 넘어가다니. 정치에 손 뗀 지도 근 10개월 가까이 되어 간다. 빙빙 돌리고 긴장하는 대화는 필리프와 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므로 당연히 감각이 녹슬어갔다.

-그 다른 사람이 누군데요?

당장 떠오르는 이름이 있을 턱이 없었다. 끼워 맞추고 싶어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이라곤 루이즈 세바스티엔 조제핀 자비에라 같은, 웃기지도 않은 이름뿐이었다.

-전하의 성함이 맞습니다만. 그건.

-약속대로 편지 써준 거로군요. 고맙게 잘 받을게요.

거기서 더 아니라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반항에 불과했다. 종이가 곱게 접혀 남편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걸 눈 뜨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롈은 그나마 ‘그 단어’가 글자조차 다른 자신의 모국어로 쓰여 있다는 데에 위안을 삼았다.

동이 텄다. 마지막으로 간 촛불들이 다 타서 가물거리다가 하나씩 꺼질 즈음이었다. 그 때 일을 거의 다 마친 세시안이 이마를 쳤다.

생각해보니 ​주​일​(​主​日​)​이​라​고​.​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여해야 하는 날이고, 시녀든 하녀든, 시종이든 하인이든 예외적으로 두는 당직이 아니면 일을 시킬 수 없는 날이기도 했다.

그는 ‘우리 둘 다 바보라는 건 비밀로 하자’고 했다. 비밀. 그 말이 언제부터 그렇게 낭만적인 말이었을까. 아롈은 원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잡고 같이 성당에 갔다. 아롈은 잠을 설치는 데에 익숙해서 머리가 좀 아파도 참을만했지만, 세시안은 눈 밑이 검게 물들어서는 대단히 힘들어했다.

추기경의 지루한 설교를 들으며 성교회와 정교회의 교리가 다른 점을 세고 있던 아롈은 아무래도 남편이 편지라고 우기는 종이가 신경 쓰여 곁눈질을 했다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성당으로 오는 길부터 불안하다 했더니 졸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자세에 눈만 살짝 감고 있는 것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일어나거나 눈을 떠야 할 때마다 세시안은 눈을 뜨고 아무렇잖게 움직이다가 잘 틈이 있으면 바로 졸았다. 맨 앞자리라는 자리의 덕을 보아 용케 들키지 않았다.

성체는 모시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비관에 돌아와 낮잠을 잤다. 아니, 낮잠은 남편 혼자 자고 아롈은 가만히 안겨 심장 소리를 들었다.

덜컹, 덜컹, 덜컹.

그 날 뒤로 같이 있는 시간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세시안은 해가 졌는데도 일이 끝나지 않으면 정의관에서 잔무를 처리하는 대신 자기 일거리를 자비관에 들고 오기 시작했다.

둘은 저녁을 먹고 일을 하다가, 지치면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기운이 차면 또 다시 일을 했다.

펜을 놀릴 때, 차를 마실 때, 혹은 침대 위에서 문득 문득 수많은 말들이 시침과 분침 위를 오갔다.

-정말이지, 대회의만 끝나면 아무 것도 안 하고 놀 거예요.

-뭘 하실 겁니까.

-글쎄요. 가면무도회? 밤새 술 마시고 춤춰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군요. 북쪽에서도 가면무도회가 있나요?

-아뇨, 없습니다. 평범하게 춤을 추는 연회라면 있었습니다만.

-그럼 이 지긋지긋한 연례행사만 끝나면 같이 갈까요? 정신없지만 가끔 가면 재미있어요.

-예.

가면무도회에 가려면 가면이 있어야지요? 같이 골라요. 아렐르는 말을 탈 줄 안다니까 마차는 놔두고 근교에 있는 호수에도 가고요. 점잔 빼고 정장을 걸친 다음 렌에 있는 극장에 가서 요즘 유행한다는 오페라를 보는 것도 좋겠네요. 아, 발레가 더 좋아요? 전 발레 재미없던데요. 이블린 연회는 절대 안 갈래요. 그건 노는 게 아니잖아요. 남이 열어주는 판에서 편하게 놀 거예요.

항상 농땡이를 칠 약속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평범한 취향 이야기도 했다.

-북쪽에서는 차를 이렇게 안 마셔요? 정말이요?

놀라는 그에게 레몬을 띄운 차에 과일잼을 곁들여 내놓았더니, 그는 너무 달다고 하면서도 끝까지 다 마셨다.

남편의 취향을 따라 설탕을 넣지 않은 차나 커피도 맛을 보았다. 아롈은 쓴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얼굴을 찌푸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남편은 아롈의 얼굴을 바라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혼자 쿡쿡 웃어댔다.

그 다음부터는 차를 마실 때는 항상 차를 두 종류 준비시켰다. 티포트 하나는 진한 차나 커피를, 다른 하나에는 달콤한 향이 나는 차를.

사실 영롱한 반딧불이 같은 약속이나 식도를 타고 내려가 뱃속을 데우는 찻물보다 더 확실히 몸을 데우는 건 정사(情事)였다.

둘 다 바빠 좀처럼 관계를 가질 틈을 찾기 어려웠지만, 한 번 몸을 얽었다하면 집요하게 타올랐다. 남편은 아롈이 신음하거나 매달리는 건 창녀 같다 생각하며 움츠러들 여유조차 없어질 때까지 몰아붙이곤 했다. 알몸으로 안겨 만져질 때마다 속부터 달아올라 허덕이다가, 정사가 끝나면 푹 녹아내려서는 간신히 옷을 걸치고 기절하듯 잠들기 일쑤였다. 온화하고 여유 있던 관계를 가졌던 일이 거짓말 같았다.

부끄럽게도 그 때마다 가지가 잎사귀를 좋아라 흔들며 게걸스레 뿌리를 뻗었다. 세상에 남편과 아롈 단 둘만이 남은 듯 온전히 집중하는 그 눈빛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게다가 가끔씩 그 ‘변화’가 눈에 띄었다. 정사 중에, 아침에 일어나서, 일을 하던 중에, 혹은 손등에 입 맞추고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는 그 순간. 정말 규칙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뜬금없는 곳에서 그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편을 발견할 때면 아롈은 둘로 나누어졌다. 연유를 모르겠다고 불안해하는 아롈이 있고, 여름 바람처럼 무더운 표정에 반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롈이 또 있었다.

때마침 아롈을 둘러싼 주변 상황은 흡사 폭풍 전야처럼 고요했다.

리젤로트는 여전히 칩거 중이었고, 황후는 아롈이 아프다며 약속을 취소한 이후 다른 약속을 잡지 않았다. 황후가 조용하니 미네트도 따라 조용했다.

크리스틴이 가끔 와서 도와주겠다며 얼쩡거렸지만 아롈은 크리스틴이 자신을 적대하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한 뒤였으므로 일하는 방식이 달라 힘들 것 같다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필리프는 딸인 소피를 통해 여러 가지 잔소리를 전했지만 예전처럼 짜증이 나질 않았다. 들어줄 수 있는 것은 바로 들어주고, 들어주기 어려운 것은 머릿속에 넣어놓았다.

황제는 아롈이 ‘여자의’ 일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식사를 같이 할 때마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좋은 시아버지인 것처럼 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롈도 웃었다.

가장 큰 방해꾼인 벨타는 계속 잠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상하다 싶어 계속 신경이 쓰였으나 사람은 계속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생물이었다. 목에는 계속 걸고 다녔지만 가끔 쇄골을 만질 때를 제외하면 아롈은 벨타를 반쯤 잊고 있었다.

그래서 아롈은 자신의 감정을 실컷 만끽했다.

양분인 다정함과 상냥함은 무서울 정도로 충분히 주어졌다. 대상은 그 결벽에도 걸릴 것 없이 완벽한 사람이어서 혼란도 없었다. 가장 큰 방해물인 결혼의 시작은 이미 체념이 되어 깔린 지 오래였다.

애정에 간절히 굶주려있던 열여섯 소녀의 연정은 지독히도 간단히 꽃피고, 시작보다 더 쉽게 부풀었다. 첫사랑이었으므로, 감정의 기반이 부실하여 위태롭다는 것 따위는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대회의 기간이 단 일주일도 남지 않았을 때, 아롈은 더 이상 달콤한 감정에 취해 있을 수 없었다. 지독하게 머리를 때리는 현실에 괴로워했다. 양분이 떨어지거나, 완벽에 흠이 간 것은 아니었다. 아롈의 평화를 끝장낸 것은 고작 한 장의 서류였다.

일하던 중 서류가 잘못 잡혔다. 눈으로 보지 않고 대강 손을 뻗은 탓으로 순전히 실수였다. 원래 아롈은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로렌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보고서를 쓰고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남편의 서류를 들여다보지 않으려 애썼다.

아마 자비관까지 들고 나올 정도라면 기밀문서는 아닐 테고 중요한 기밀이라면 암호화 되어 있을 테니 봐도 괜찮으리라는 유혹은 쉽게 떨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손톱을 손바닥에 박아 넣으면서도 참았다. 그런데 그 노력이 한 순간 물거품이 되었다.

아렐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자마자 눈을 돌리고 서류를 남편에게 돌려주었지만, 이미 눈은 첫 장을 완전히 훑은 뒤였다. 불행히도 아렐은 제목과 개요의 일부를 가지고 상황을 대강 추측할 수 있을 정도로는 명석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해결 불가능한 고민거리가 생기자 단번에 열이 올랐다. 그간 평온했던 날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 굉장한 고열이었다. 물수건을 이마에 대고 있어도 열은 쉽게 내리지 않았다.

무력감과 죄책감에 휩싸였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롈은 이제 체사레브나가 아니었으니까. 여긴 남쪽이고, 아롈은 영영 북쪽에 돌아갈 일이 없을 테니까.

로렌의 대회의는 예정대로 열렸다.

오늘 올린 부분은 나중에 조금 다듬을 수도 있어요.
다음 한두 편 정도면 열 챕터가 끝나고 가지와 열매(가제) 챕터로 들어갑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개인 사정으로 주말까지는 올라오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다음 주에 뵈어요.

(8월 18일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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