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설익은 혹은 농익은 (5)
인간들의 ‘대회의’ 이틀 째, 벨타는 ‘렌’이라고 부르는 도시의 센 궁전에 와 있었다. 정확히는 아롈이 렌에 있었고 벨타는 아롈의 목에 걸려 있었다. 아롈의 손가락이 벨타를 톡 건드렸다.
그녀는 진작 깨어나 있었으나, 도무지 빠져나올 수 있는 시간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앤에게 앞으로도 다시 잠들어 있겠다고 한 말은 거짓이었다. 벨타는 몸을 동그랗게 만 채 답답한 일상을 견뎠다.
아롈은 벨타를 항상 목에 걸고 있었고, 반드시 틈이 날 때마다 만지작거렸다. 몸에 달라붙어 있어 전송 효율이 나아진 것은 좋았지만 쓸 수 있어야 축적한 마법도 의미가 있었다.
마법사의 마법이란 반드시 무언가를 실현해야만 발출되는 것이 아니었다. 마법사가 무언가를 바라기만 해도, 가령 배가 너무 고프니 빨리 음식을 먹고 싶다 수준의 욕망이나, 배가 아프니 용변을 보고 싶다 같은 바람만 가져도 희미하게나마 마법은 흘러나왔다.
마법사 역시 인간, 아무런 욕망조차 품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 의미에서 벨타는 요즈음 바다를 떠난 뒤 최고의 호황을 누리는 중이었다. 사랑에 빠진 소녀의 마음은 방향성만 제시해주면 단숨에 물화(物化) 할 수 있을 정도로 피어났다.
다소 하찮다 할 수 있는 소망, 고개를 들고 웃어주었으면 한다거나 끌어안아주었으면 한다거나 하는 것부터 다른 여자를 보지 않고 자신만을 사랑해 주었으면 하는 열망 등이 나비를 탐하듯 꽃잎을 벌리고 꿀을 줄줄 흘렸다.
점차 욕망이 줄어들어 빠른 속도로 쓸모없어지고 있는 크리스틴과는 달랐다. 아롈의 마음이 점점 깊어질수록 굶주림도 간절해졌다.
그러나 벨타는 인내심이 바닥났다. 그냥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리고 크리스틴에게 가 볼 다른 방법을 찾을까 몇 번이고 생각했다. 잠자리를 같이 하는 장면까지 고스란히 바라보는 것이 아주 짜증났다.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하는 목소리는 귀여운 맛에라도 들어줄 수 있었지만, 어깨도 크고 시커먼 사내놈이 욕망에 달뜬 얼굴을 하는 건 못 봐줄 노릇이었다.
조금만 마법의 순도가 낮았더라면 콱 잡아먹었을 텐데. 탐욕스러운 용은 쩝쩝 입맛을 다셨다. 남자보다는 여자가 취향이긴 하지만 간혹 집어먹으면 나쁘지 않았다. 벨타는 이제 자신의 이름을 아는 자와의 약속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었다.
애초에 아롈과의 약속은 ‘새로운 마법사’를 찾을 때까지가 기한이었으므로, 벨타는 크리스틴과 이름을 교환한 직후 얼마든지 사람을 잡아먹어도 괜찮았다. 수습이 귀찮아질까봐 포기했을 뿐.
계약을 한 마법사의 남편을 그 눈앞에서 날름 집어먹는 즐거운 상상을 하는 동안은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영혼이 마법으로 충만한 기분이었다. 벨타는 아롈이 시커먼 사내의 손을 붙잡고 계단을 오르는 동안 속으로 키득거렸다.
사실 아직 모자랐다. 감질났다. ‘예지’에서 본 그 맛이 아니라는 사실이 한없이 괴로웠다. 당장 본신을 드러내고 겁박해서 순도 높고 강렬한 기원을 죽죽 빨아먹고 싶었다.
참자. 참자. 조금만 더 참으면 언젠가 틈을 보이겠지. 샹들리에를 갈러 오는 하녀 중에서 맛있어 보이는 아이가 있던데, 그 때가 되면 바로 나가서 그 애를 잡아먹어야겠다. 이번에는 잘 소화되도록 오독오독 잘 씹어서 삼켜야지.
“다음은 알렌 가문의 후계자 건입니다.”
아롈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을 했다. 소리도 없이 숨처럼 내쉰 하품이었는데도 코끝이 찡하고 메말라 있던 눈이 금세 촉촉해졌다. 둘째 날부터 본격적으로 열린 ‘회의’는 닷새째가 되도록 지루하기 짝이 없는 말만이 나왔다. 나흘째 시시껄렁한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국외의 사정이라도 주워들을 수 있을까 하여, 여자는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회의장에 나와 앉았건만 하는 일이 귀족 가문의 후계자 승인이나 가계가 단절된 가문의 작위 회수라니.
대체 이런 걸 왜 일 년에 한 번 처리한단 말인가? 공작이나 공쯤 되는 속국의 군주면 몰라도 백작이나 남작 따위, 코시카에는 그야말로 천 명이 넘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일은 중앙에서 처리하게 된 지 오랜 세월이 흐른 데다 귀족의 사병 소유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었으므로 지방의 귀족들이 하는 일은 그야말로 하찮았다.
그에 비해 황제의 시간은 황금보다도 귀중한 것, 일일이 가계도를 검증하는 것은 보석을 분변에 빠트리는 것과도 같은 낭비였으므로, 특별히 서류에 문제만 없으면 코시카에서는 황제가 작위 계승에 대체로 서명을 해주는 분위기였다.
대체 왜 고작 백작이나 남작, 그리고 자작-아롈은 여기에서 잠시 이름이 이상하다고 투덜거렸다. 코시카에서 백작 바로 밑의 작위는 남작이었으며 자작이라는 작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위의 계승을 이렇게 공들여 검증하는 거지?
황제의 앞에서 자신이 더 적법한 후계자라고 소리 높여 악악대도록 놔두는 거지? 대공과 주요 귀족들이 모여 표결에 부치는 거지? 심지어 표결에 의미도 없었다. 와병 중인 보르디 대공(아롈의 외숙부)을 대신해서 자리에 앉은 필리프는 계속 기권표만을 던졌고, 그건 다른 대공들이나 세시안도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승인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야말로 요식행위의 절정이었다. 이런 걸 하자고 보름간이나 대회의를 연단 말인가. 보름이라는 긴 시간의 연회를 준비하면서 힘들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울컥했다. 겨우 닷새면 충분할 것을!
로렌 출신의 여인들은 전부 알고 있었는지, 대공비와 ‘아가씨’ 칭호를 받은 여인들의 자리는 전부 비어 있었고, 리젤로트나 크리스틴, 세시안의 사촌들도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 이 자리에 앉은 여자는 아롈과, 자리를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황후와, 황후를 부축해서 나온 미네트, 자신의 가문 승계 때문에 따라온 상속녀 들 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남성이었다.
곧 휴식시간이 되었다. 단숨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천장이 납작한 센 궁의 홀은 예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오히려 센 궁이 이블린보다 늦게 지어졌는데도 그랬다. 이블린은 계속 최신 유행으로 개보수를 했으나 센 궁은 지어진 그대로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정도 크기로 건물을 지어놓았으면서 일 년에 한 번, 대회의 때밖에 열지 않다니 낭비의 극치였다. 결혼식 때만 열린다는 이블린의 왕의 서재도 그렇고, 로렌에서는 특정한 조건에만 열리는 무언가를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휴게실도 없는 거울의 홀에서 복작거리느니, 여기에서 연회를 열어도 나쁘지 않을 것을. 이 홀은 아롈이 아는 대형 홀의 구조에 충실해서 황제 전용의 휴게실이 두 개, 여성 휴게실이 네 개, 남성 휴게실이 두 개 있었다. 거울의 홀이 암만 호화로우면 뭘 하란 말인가. 준비하는 사람이 피로해 죽을 것 같은데.
작은 은(platina, 백금) 반지를 낀 손이 아롈의 손등을 건드렸다. 옆을 보자 남편이 희미하게 웃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남부 갈리아 어가 아무리 늘었다곤 해도 독순술을 할 수준은 못 되었다. 왜 말을 않고 저러지. 멀뚱멀뚱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눈썹을 찌푸리자, 귓가에 입술이 다가왔다. 하지만 속삭이는 말은 밀어가 아닌 단순한 잡담이었다.
“오늘도 지루하지요?”
“괜찮습니다.”
지루한 것이야 사실이었지만, 아롈의 선택이니 참아야 마땅했다. 대회의 둘째 날인 처음에는 모르고 나왔지만 오늘은 알면서도 남편과 같은 마차를 타고 렌에 왔다. 렌에서의 첫날, 황제가 용의 뼈를 깎아 만들었다는 검을 들고 7인의 맹세를 갱신한 것 이외에는 정말이지 볼 것 없다는 실망은 이미 다 한 뒤였다.
어차피 대회의에서 ‘관례상’ 황후는 자리를 반드시 지켜야 했다. 아롈이 평생 해야 할 일이라면 지금부터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고 익숙해지는 것이 나았다. 필리프가 원한 것이 저 자리일까. 대대로 로렌의 황후는 대공가들의 균형을 잡기 위해 되도록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다지만-물론 그런 침묵이 ‘미덕’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롈은 차라리 참석하지 않으면 몰라도 시어머니처럼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아롈 자신과 자신을 받쳐주는 외가를 위해서.
“아렐르는 굉장하군요. 저는 여기 이십삼 년 째 앉아있는데도 초반은 심심해서 몸이 꼬이던데요.”
아롈 역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세시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전하. 그런데 왜 갑자기 귓속말이십니까. 지금은 회의 중도 아닙니다만.”
세시안은 생긋 웃었다. 여유 있고 느긋한 미소는, 빳빳하게 풀을 먹여 다린 자줏빛 의상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부르고뉴의 조제핀, 에모주 공작부인의 뒷말을 늘어놓으며 짜증에 받쳐있던 그는 백일몽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갑작스레 피곤한 기색을 비추었던 것은 첫날 평화의 홀에서가 마지막이었다. 아롈이 머리를 쓰다듬자 나른하게 한숨을 쉬고는, 갈리아 어로 일부터 육십까지 천천히 셀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투정 한 번 하지 않고 어김없이 일어났다.
그 뒤로는 계속 저런 얼굴이었다. 언제 연약했었냐는 듯이, 언제 찔렸느냐는 듯이 유연한 입술의 곡선.
“갑자기 재미있는 장난이 생각나서요. 신성한 대회의 중에 그랬다가는 혼날 테니 이걸로 참고 있는 거랍니다.”
“무슨 장난 말씀이십니까?”
되묻고 나서야 아차 했지만 또 늦었다. 다음에는 절대 당하지 않으리라 거듭 다짐하고 있는 동안 잠시 멀어졌던 입술이 귓가로 다가와 귓바퀴에서 종잇장 한 장 거리를 두고 멈추었다. 목덜미며 귓불의 솜털이 한 올 한 올 곤두섰다. 웃음기가 가득 배어나는 목소리가 유독 산뜻했다.
“알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