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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9. 설익은 혹은 농익은 (6)


 “알고 싶어요?”

남편은 아롈을 놀리면서 즐거워하곤 했다. 가끔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하는 건지 궁금할 정도로, 아롈에게는 생소한 장난이나 농담들이었다. 아롈은 최대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하긴, 미리 말하면 재미가 없겠군요."

그런 뜻이 아닌데. 하지만 아롈은 남편의 보기 좋은 입술을 바라보느라 지적할 틈을 놓쳐버렸다. 진초록 눈이 가늘어지면서 소년처럼 청량한 웃음이 불어왔다. 괜히 손을 오므렸다가 폈다. 손에 끼고 있는 반지 두 개가 햇살을 뿜어냈다.

여기까지 자랐으면 더 자라지 않겠지. 느긋하게 생각할 때마나 가지는 높이 뻗고 뿌리는 깊이 파고들었다. 대체 이 감정의 끝은 어딜까, 과연 끝이 있기는 할까. 고민하는 동안에도 점점 커졌다. 이제 마음이 갈비뼈 사이를 비집고 나와 부드러운 피부를 꿰뚫고 나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혼자 소리 내어 웃다가 멈춘 세시안은 천천히 손을 뻗어 아롈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는 언제나 아롈에게 손을 뻗을 때에는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움직였다. 손가락이 발간 뺨이 조금 들어갈 정도로 눌렀다.

"아직 열이 있군요. 쉽게 안 떨어지네요."

타는 듯한 열이 올라 잠들다 깨다를 반복하던 밤들, 아롈은 악몽에 쫓겼다. 아는 것이 많으면 근심할 것도 많은 법이었다.

설마 어머니가 외국 군대를 이용하여 자국 군대를 숙청을 할 정도로 강수를 꺼내지 않으리라고 믿고 싶었고, 순식간에 추측한 모든 것들을 전부 부정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의 한 갈래에서는 어머니의 조국이 로렌이라는 것도, 결코 군부가 어머니를 만만하게 인정해주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차라리 예가체프 장군 같은 이는 낫다. 옛날 아롈을 가르쳤던 스승은 일단 강력한 사람이고 자신의 무거움을 알고 있으니 함부로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다.

코롤프 중령이나 샤마노프 장군 같은 자들은 위험했다. 특히 샤마노프 장군이라면 어머니의 얼굴에 침을 뱉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롈이 유폐된 육 개월 동안, 그는 잠잠했다. 나름대로의 순응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침묵이 발돋움을 위한 도움닫기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간과했다.

자신의 황제를 유폐할 각오까지 하며 아롈의 아래에 무릎 꿇었던 이들이 전부 죽은 채 아롈을 찾아와 똑같이 목 졸라 죽이고, 밧줄에 묶어 화형 시키고, 통에 넣어 물에 던지는 등 입에 담기도 어려운 갖가지 처형 방법을 하나하나 몸으로 당하다 보면 아롈은 흠뻑 젖은 얼굴로 잠에서 깼다.

속눈썹과 눈가에 맺혀 있는 눈물을 눈을 깜빡여 떨어내고 나면 어김없이 등대처럼 절실한 빛이 보였다. 남편은 옆에 앉아 아롈의 손을 잡아주고 있을 때도 있었고, 서류에 집중하는 얼굴로 골몰할 때도 있었고, 허공을 보며 알 수 없는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도 있었지만 아롈은 어떤 모습의 아롈을 보든 그를 발견하자마자 깊이 안심하곤 했다. 저릿할 정도로 굳어 있는 몸에 맺힌 식은땀이 천천히 기화되면서 차가워진 몸에 사뿐한 깃털처럼 이성이 내려앉으며 촉촉하게 따스해졌다.

아롈은 그래서 희미하게 웃었다.

"곤하면 흔히 있는 일입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모두 아롈의 잘못이었다.

어머니도, 남편도, 남편의 아버지도, 당연하게 자신이 원하고 해야 할 일을 했다. 만일 입장을 바꿔 아롈이 로렌 황위 계승에 중대한 짐을 지울 수 있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조부에게 고개 숙여 반드시 그리 하시라 청했을 것이다.

아롈이 미숙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도와주겠다고 했을 때 아무런 의심 없이 믿어버렸기 때문에. 안나 콘스탄티노브나가 첩자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근위대를 장악하기에도 역량이 모자라 항구 근처에서 이상한 배가 떠다닌다는 보고를 그저 무시해버렸기 때문에. 그 많은 이유 때문에 아롈은 졌고, 모든 것을 감내해야 했다.

남편은 그는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아롈에게 잔인하게 굴 수도 있었는데도 아롈에게는 다정했다. 아롈은 그를 원망하지 않았지만 괴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갈 곳 잃은 자괴감은 온전히 아롈 스스로에게 향했다. 그들 역시 자신의 선택으로 아롈을 지지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면서도 죄책감이 들었다. 논리와는 다른 감정이었다.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시간은 어느 감정에든 약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괴로워도 나중에는 희미해지지 않을까 하는 체념만이 희망이었다. 제발, 아무 것도 하지 말았으면. 그저 복종했으면. 아롈은 망설이다 덧붙였다.

"가면무도회에 가서 논다든가……."

사실 몸에 걸친 옷 취향이나 머리칼만 봐도 누구인지를 알아 맞추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얼굴만 가리는 가면무도회가 과연 얼마만큼 재미있을지에 대해 아롈은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세시안은 굉장히 고대하는 듯이 보였다. 그렇다면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을 테지.

세시안은 아롈의 머리칼을 쓸어넘기고는 웃었다.

"끝나면 꼭 같이 가요."

얼마 있지 않아 휴게 시간이 끝나고 루이 오귀스트 황제가 다시 입장했다.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일어서 군주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아롈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아롈의 군주는 코시카 황제가 아니라 로렌 황제였으므로, 한 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다음은 아모랭 백작의 혼인에 관한 안건입니다."

휴식 시간 다음도 시시껄렁한 안건들이 이어졌다. 당사자 둘 다 귀족이었으므로 딱히 말을 들어볼 것도 없었다. 로렌에는 법적으로 귀천상혼 금지 조항이 없다고 했다. 기실 황족 직계의 남성은 대공의 딸, 손녀, 외손녀하고만 결혼할 수 있었으므로 실질적으로 통치 가문의 사람하고만 결혼할 수 있었고, 대공가문에서는 알아서 자기들끼리 혼맥을 조절했으므로 없어도 지켜지지 않는 일은 거의 없었다.

코시카의 경우에는 법적으로 귀천상혼 금지가 못박혀 있었으므로 아롈의 아버지인 파블은 그가 대공이었을 시절 대공의 지위를 내놓지 않고는 그의 사랑하는 자식들을 인지할 수 없었다는 점이 다른 점이었다.

죄책감으로 인한 우울감에 다시 발을 담그고 있는데, 다시 귀에 목소리가 다가왔다.

"아렐르."

"예?"

"소리 지르면 안 돼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라고 묻기 위해 입술이 채 벌어지기도 전이었다. 마른 입술이 귀걸이 침의 머리를 이루며 반짝이는 작은 다이아몬드를 덮었다. 주먹을 꼭 쥐자 반지들이 살결을 파고들며 요동을 쳤다.

과즙을 핥듯이 촉촉한 혀가 귓불을 맛보는 순간에는 목부터 어깨까지 이어지는 근육줄기가 피부 위로 억세게 도드라졌다. 그 모든 장면이 손바닥에 가려져 있었다.

어디까지나 밀어를 속삭인 것에 지나지 않는 듯 남편은 바로 떨어졌지만, 아롈은 너무나 어이가 없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가뭄처럼 시들시들하던 진초록빛 위로 비 온 다음날처럼 반지르르 윤기가 흘렀다.

장난에 미리 경고씩이나 하는 자비로운 짓을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롈이 대회의 기간에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미리 종이에 써두고 유연하게 나올 수 있도록 달달 외운 그 수많은 대사 중에 '남편이 나름대로 신성하다는 자기 나라 대회의 중에 장난이랍시고 귓불을 핥았을 때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표시하면서도 영영 관계 지속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만하면서도 충분히 자신의 기분을 전달할 수 있을 만한' 말은 없었던 탓이었다.

뺨이라도 갈겨야 하나. 아롈은 공기가 부족한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다가, 화낼 때를 놓쳐버렸다. 남편은 흰 손등을 두어 번 건드리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앞을 보았다.

작약처럼 달아오른 얼굴을 탁상으로 돌렸다. 우울함은 씻은 듯이 밀려나가고 당혹스러움과 경악과 약간의 분노만이 남아 가슴이 뛰었다. 그러다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당장이라도 찍혀 죽을 것 같은 살기로 아롈을 노려보는 사람과.

황후였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챕터 12 완결 예정인데 갈 길이 머네요... 빨리 달려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만 워낙 이번학기 스케줄이 빡세서요... 느긋하게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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