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설익은 혹은 농익은 (8)
세시안의 조부인 루이 조제프 황제의 가장 큰 업적은 포도주에 중앙세를 물린 것이나 중앙 상비군 충원 및 대공가문의 상비군 축소가 아니었다. 바로 ‘세르’에게 대회의 표를 안긴 것이다.
발루아 가문의 조상인 카페 가문은 올랑 가문의 왕이었으며 7인의 맹세의 맹주였으니 황실 역시 대공가문의 자격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것이 개편의 요지였다.
하지만 요지만 가지고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세상 정치의 99%는 물밑에서 일어난다. 물 위에 드러나는 것은 다만 빙산의 일각일 뿐이요, 어둠 속에서, 휘장 속에서, 은밀하게 오가는 쪽지 사이로 오가는 말들이 세상을 지배한다.
세시안이 아직 나이 어릴 무렵 조부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는 어떻게 자신의 조부가 그런 굉장한 일을 해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어쨌거나 조부의 업적 탓에, 세시안은 다섯 살 때부터 대회의장에 앉아야 했다. 어린 시절에는 부황이 적어주는 대로 표를 던졌고, 나이가 든 다음에는 직접 교섭을 해야 했고, 시간이 지나자 부황의 몫까지 어깨에 올라왔다.
그는 식사 자리나 술자리, 카드놀이를 하는 자리에서 우아하게 웃고 때로는 얼굴을 굳히고 이야기를 나누며, 충분히 발을 뺄 길을 남겨 둔 애매모호한 말들로 약속을 하는 지루한 작업을 이미 대회의 전에 끝내 두었다.
대뜸 회의장에 교섭도 안 된 안건을 던지는 멍청이는 없다. 최소한, 이 로렌에는 없다. 서로 물어뜯으려 몸을 낮춘 채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기세가 굶주린 사자처럼 등등한 나라가 아닌가.
정의관 남성 휴게실에서 카드가 뒤섞였다. 담배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가슴을 반 넘게 드러낸 창부가 나이프로 카드를 커팅했다. 번쩍이는 루아르 금화며, 다른 나라에서도 사용하는 여러 종류의 은화, 보석 달린 단추 같은 것들이 테이블 위에 작은 산처럼 쌓였다.
세시안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금화 세 개를 쌓아올려 중앙으로 밀어놓았다. 근래 식민지에서 은광이 발견된지라-물론 국비였고, 그 망할 용의 알보다 비할 수 없이 중요한 발견이었다- 조만간 금과 은의 교환비가 폭락할 예정이었다. 물론 막 은광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실제로 시중에 은이 그만큼 풀려나오지는 않는다. 다만 ‘은광이 발견되었으니 은이 시중에 풀릴 것이다’라는 예측이 은의 가치를 훨씬 더 많이 하락시키기 마련이었다. 다들 금을 미리 사두었다가 은으로 바꾸려고 할 테니까.
때문에 황실은 금을 은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작업을 미루고 있었고, 이 정보를 한두 군데 대공가에 팔아서 표를 사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큰돈에나 적용되는 일. 루아르 금화 다섯 개 정도는 세르로서 그가 받는 연금의 액수에 비하면 푼돈이었고, 굳이 루아르를 은 시세 변동 가격으로 계산해 봐도 격차는 얼마 나지 않았다. 잃어도 굳이 아쉬울 금액도 아니었다.
카드를 뒤집자 심장 세 개짜리가 나왔다. 그가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심장과 잔이 섞여 쓰였는데 요즘은 심장을 사용하는 분위기가 대세였다. 지금 돌아가는 게임은 아주 단순한 위-아래 게임으로 위나 아래만 맞으면 그만이었다. 기준카드가 각각 잎새8과 검의 5였으므로 위에 건 세시안이 이기기 위해서는 심장 5 이상이 필요했다.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졌다고 팔짱을 끼고 등을 기댔다. 질 것을 대강 알고 베팅을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티가 나면 누가 모르나.
보르디의 아를랭 공작이 잔뜩 뽐을 내며 판돈을 쓸어갔다.
아를랭 공작은 샤를루아 공작의 장자로, 그의 아내와는 오촌인데도 생김새는 전혀 딴판이었다. 물론 성격도 그랬다. 쿡 찌르면 발갛게 변해 허둥대는 귀여움까지야 바라지 않겠지만, 그 얼음장 같은 결벽함이 아를랭 공작에게는 없었다. 공작은 킬킬 웃으며 금화를 입에 문 채 옆에 끼고 있는 창부에게 그를 받아가도록 했다. 갸름한 뺨이 불룩해지면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다들 적당히 취한 가운데, 세시안은 술을 마시는 척 분위기만 맞추고 거의 마시지 않았다. 술을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세르. 어떻게 그 사실을 지금까지 숨기셨습니까.
같은 마차를 타고, 출발한 다음 한참 뒤에야 나온 칼레 대공의 말에는 빈정거림이 아닌 순수한 감탄만이 어려 있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아모랭 공작.
세시안은 대공들에게 숨기고 있는 사실이 하도 많아 오히려 무덤덤한 얼굴을 해보일 수 있었다. 짚이는 것이 너무 많다보니 뜨끔할 수도 없었다. 온화한 미소를 세워두고 머리는 맹렬하게 돌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이지.
-용 말씀입니다.
이번에야말로 뜨끔했다. 칼레 대공은 손수 마차의 창문을 덮은 커튼을 내렸다. 붉은 커튼 사이로 통과하는 약간의 빛을 제외하면 앞도 보기 힘들 정도로 어두워졌다.
그의 미소는 파묻혀버렸다.
-전설 속의 용을 이르시는지?
칼레 대공은 과장된 동작으로 성호를 그어보였다.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사악한 생물이지요.
사실 몇 번째인가 공회에서 악마조차 신의 창조물인 것은 이미 공언되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세시안은 정확한 숫자를 떠올릴 수 없어 반박을 관두었다.
-예. 그리하여 7인의 맹세가 맺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담 라 세르께서는 오늘도 참으로 아름다우시더군요.
-새신부께서 그런 고초를 겪으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게 가능할 리가 없을 텐데. 미셸과 필리프에게 입단속을 철저히 시켰다. 또 어쩌다가 들통이 날까 두려워 그들을 죄다 보르디와 오를레앙으로 내려 보냈다. 그들이 용을 숨겨야 예산 분배가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다 협박했으므로 보르디나 오를레앙 대공자가 그 일을 발설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신부가 작센에서 그 일을 알려주었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대공가에는 외교권이 없었고, 로렌은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나라였다. 작센에 시집간 대공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소식이 이렇게 빠를 리가 없었다. 물론 한두 달 뒤면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보 교란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저는 이미 믿을 만한 사람 두 명을 통해 교차 검증을 끝냈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 두 명이나 있을까. 세시안은 찬찬히 검토해보았다. 미셸이 리젤로트에게 말하고, 리젤로트에게서 정보가 샜을까. 충분히 있을 만한 일이었다. 칩거 중이라곤 해도 시녀는 곁에 두고 있을 테니.
세시안은 사랑하는 여동생이 입이 가볍고 주의력이 부족하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칼레 대공은 몇 가지 말을 덧붙이다가 도착할 쯤 되어 여유작작하게 서류철에서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한 번 훑어보기라도 해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해안선 방비를 위한 전열함 구축 건에 대하여’라는 서류는 지금 정의관 집무실에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또 사람을 구슬린다. 무엇보다 지금 거울의 홀에서 공식 정부를 끼고 계신 부황께서 들으시면 불벼락이 내리겠지.
아, 생각만 해도 억울하다.
금방 끝난 카드 판에 다시 끼어 이번에는 은화 스무 개를 차분한 손놀림으로 카드 위에 쌓아올리고 웃으면서, 세시안은 정말 진심으로 억울해졌다.
심장 소리가 그리웠다. 작은 평화의 홀, 둘만이 있는 공간에서 그 무뚝뚝한 소녀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머뭇머뭇 머리카락을 쓸어내렸을 때 세시안은 그대로 눈을 감고 잠들고 싶었다. 보드라울 살결 아래로 물결치는 심장과 휘파람처럼 울리는 숨소리를 붙잡아 가두고 시간을 독점하고픈 욕망이 일어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도 딱 일 분만에 일어났건만 세상은 온통 피곤한 일투성이였다.
아직 토라져 있을까.
또 잃었다. 세시안은 오늘 패가 잘 안 붙는다며 킥킥 웃고 술을 들어 잔을 뱅글뱅글 돌렸다. 아직은 초반이라 적포도주였다. 투명한 잔 위로 와인이 찰랑이다가 벽에 맺히며 손자국처럼 흘러내렸다.
오베르뉴 대공의 조카가 판돈이 떨어졌다며 가져오겠다고 하다가 붙들렸다. 그는 판돈을 술로 받겠다고 허세를 부리다가 브랜디를 병으로 받고 기겁했다.
세시안은 그 모습을 보며 즐거운 척 하면서도 그리워서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다고 느꼈다. 거울의 홀, 아니면 평화의 홀. 어디든 찾아보면 있을 텐데, 바로 한 건물 한 지붕의 지척에 있으면서도 보고 싶어졌다. 끌어안고 토라져 화를 내는 모습이든, 발갛게 볼을 붉히는 모습이든, 미숙하기 그지 없는 사교용 미소든 눈에 담고, 끌어안고, 손등과 입술과 뺨과 이마에 입 맞추는 상상을 하다가, 그는 비참한 생각에 한숨을 술에 띄워 삼켰다.
그러니까, 그놈의 전열함을 대체 어떻게 수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