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설익은 혹은 농익은 (7)
당일 치 회의 안건이 모두 끝났다. 세시안은 식사도 제대로 안 주고 이러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고 투덜거렸지만, 그들이 먹은 것은 간소하기는 해도 엄연히 정찬이었다. 바쁘면 저녁 식사는 쉽게 거르고 다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으면서 괜한 말이었다.
아롈은 그 유도에 넘어가 웃어주는 대신 완벽하고 딱딱한 사교용 얼굴로 일관했다.
그러십니까. 그렇군요. 네. 같은.
황제와 황후의 마차가 먼저 출발해야 갈 수 있기 때문에, 센 궁 앞에는 호화로운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중 두 번째의 흰 말들이 끄는 아름다운 공간에 들어앉은 아롈은 단 둘이 되자마자 얼굴에 덮고 있던 사교용 미소를 유감없이 치우고는 옆에 앉아 있는 남편을 노려보았다.
반쯤 녹은 셔벗처럼 흐물흐물해져 있던 아롈이 남편에게 직접적으로 화를 낸 것은 그가 마음대로 앤을 부렸을 때 이후 처음이었다.
“전하. 실수하셨습니다.”
“음. 화났나요?”
아롈이 채 대답을 하기 전에 누군가 마차 문을 두드렸다. 남편이 문을 열라고 하자, 시종이 고개를 숙였다. 아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시녀들은 파악할 수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부리는 시종들이 누구인지까지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세르. 칼레 대공이 누추한 마차에나마 모시고 싶다고 했습니다만.”
주인인 대공에게 높임말을 쓰지 않는 남부의 압존법은 아롈로서는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말을 낮추어도 되는 위치가 아니었더라면 필시 몇 번은 실수했을 것이다. 세시안은 한숨 대신 웃음을 머금고는 아롈의 손등에 입 맞췄다.
“다녀오겠습니다. 이블린에서 보지요.”
앤은 대회의 참석을 마치고 응접실로 돌아온 아롈의 뒤에서 머리를 다시 손질했다. 다소 느슨해진 머리채를 풀어 다시 고정하고, 장신구를 바꾸어 달았다. 머리 장식을 리본에서 꽃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한층 화사해졌다. 남쪽에서 찾아볼 수 없는, 화사하고 밝은 금발은 아롈의 미모를 유난히 돋보이게 했으므로 앤은 머리 모양을 손질할 때 많이 신경을 쏟았다.
옆에서는 다른 시녀가 붙어 손톱을 갈아 손질하고 있었다. 아롈은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었는데, 기르다 말고 물어뜯어 주기적으로 모양이 엉망이 되곤 했다.
얼마 전 열이 나 앓아누웠을 때 물어뜯어 울퉁불퉁해진 손톱은 며칠간 갈고 향유를 발랐지만 모양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아롈은 자유로운 오른손을 들어 펜으로 글자를 죽 써내려갔다. 북부에서 쓰는 딱딱한 모양의 글자는, 북부의 말을 제법 능숙하게 하는 앤으로서도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얼핏 보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문자의 나열로만 보였다. 대회의가 시작한 이후 아롈은 매일 그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손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머리 손질을 마친 앤은 물러나 수반에 손을 닦고, 시계를 확인했다. 코시카에서부터 가져온 아롈의 시계는 대단히 호화로웠다. 시계의 숫자판에는 수 대신 다이아몬드를 박았고, 시침에는 금을 입혔다.
“전하. 시간이 되었사옵니다.”
“그래.”
아롈은 두세 군데에 줄을 치더니, 펜촉을 기름수건으로 닦아서 소중하게 나무상자에 넣었다. 앤과 손톱을 손질하던 잔느는 상전이 손수 물건을 정리하는 데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같은 시녀인 클레르 드 뤼시용이 손을 잘못 댔다가 경을 쳤던 탓이었다.
대회의 둘째 날 클레르는 실수로 잉크웰을 떨어뜨렸다. 다행히 그녀의 발등을 때리고 떨어져 잉크웰은 무사했지만 그 뒤로 아롈의 무시무시한 침묵을 견뎌야했다. 아롈은 화를 간신히 삭이는 듯이 입술을 깨물고는 한참을 있다가, 다시는 손대지 말라고 했다. 그 뒤로 저 문방구만은 아롈이 직접 정리했다.
아롈은 앤이 가져온 초에 손수 쓰던 종이를 불살랐다. 나무 펄프로 된 누런 종이가 연기를 내며 타들어갔다. 덜 탄 종이는 은으로 된 집게로 수반에 넣어, 재를 흩었다. 맑은 물 위로 검은 재가 둥둥 떴다. 주님의 가호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글씨에 무슨 이야기가 있는지는 알아볼 수 없을 듯했다.
앤은 아롈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대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앤을 비롯한 시녀 세 명이 뒤를 따랐다. 일 층 저 멀리 거울의 홀 근처에서 세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단정한 얼굴에는 아롈을 발견하자마자 산들바람 같은 웃음이 어렸다. 그가 신부를 대하는 태도는 이미 시녀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상냥하고, 지극히 정중하게 굴었다. 아롈이 애지중지하는 그 문방구도 세르가 준 것이었다. 매일 밤을 자비관에서 보내고,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는 일도 사라졌다고 했다.
그 세심한 태도에 반했다는 몇몇 시녀들은 대놓고 옷을 벗고 침실에 들어가겠다는 계획을 웃으며 떠들었다. 엄연히 고귀한 가문 출신인 그녀들이 겨우 정부 자리에 만족하려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기도 했다.
앤이 자란 중부-작센에서도 분명히 정부를 두는 남자는 많았지만, 중부에서 왕족의 정부가 되고자 적극적으로 나서는 여자들은 대부분 창녀였다. 하지만 이 남부에서는 어엿하게 고귀한 여인들도 얼마든지 대공이나 황제의 정부가 되려고 나서고, 기꺼이 무도회장을 활보했다. 헤어지고 나서도 부끄러움 없이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선황제인 루이 조제프 황제는 대공의 딸도 정부로 둔 적이 있다고 했다.
앤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는 아롈을 따랐다. 작약으로 장식한 머리카락이 눈부셨다. 아롈의 권유로 앤의 검은 머리에도 대보았지만 앤은 도통 분홍빛이 어울리지 않았다.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며 흐뭇하게 걸음을 옮기던 그 때, 사고가 일어났다.
“마담! 기다려주세요! 꺄악!”
“앗.”
“꺄아아악!”
앤이 반응하기도 전에 아롈은 몸을 반쯤 돌려 손으로 몸을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복도가 십자형으로 이어져 있어, 시야의 사각인 모퉁이에서 웬 여자가 불쑥 튀어나와 아롈과 부딪쳤다.
워낙 거세게 달려오는지라 아롈은 여자와 엉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읏.”
“꺄아아악. 이걸 어째!”
덮쳐진 사람은 따로 있는데, 오히려 덮친 사람이 비명을 내질렀다. 떡갈나무 빛깔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하늘색 옷을 입은 처녀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부산을 떨었다.
“꺄아, 아렐르. 안 다치셨어요? 죄송해요. 제가 실수했어요. 어떡하지요. 피가 나요! 혀 깨무신 것 아니에요? 입을, 입을 좀 벌려보세요. 아아, 어떡해.”
“리젤로트……. 무겁습니다. 일단 위에서 좀 비켜주십시오…….”
“죄송해요!”
앤과 리젤로트의 시녀가 다가가 재빨리 리젤로트와 아롈을 부축해 일으켰다.
“아렐르!”
세시안이 빠르게 달려와 앤으로부터 아롈을 채갔다. 앤은 괜스레 빈 손을 오므리며 손을 내렸다. 아롈의 목에 걸려있는 벨타가 붕 떠올랐다.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피가 나는데요.”
“놀랐을 뿐입니다.”
아롈은 잔느로부터 손수건을 받아 입을 가리고 침을 뱉었다. 붉은 피가 섞여 나왔다. 발음은 상대적으로 멀쩡했다. 입 안의 살이 찢어진 모양이었다.
“조금 아프군요.”
대리석 바닥에 전력으로 달려오는 상대와 부딪쳐 나동그라졌는데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리젤로트가 발을 동동 구르며 눈물을 글썽였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너무 급해서.”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아롈을 이리 살피고, 저리 살펴본 세시안은 리젤로트를 돌아보았다. 그의 말투는 대단히 싸늘했다. 대체 누가 울렸느냐고 앤을 독촉했을 때의 그 얼굴과 그 목소리였다.
“내가 복도에서 뛰어다니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니.”
“하지만 리즈는, 리즈는……. 그냥 늦을 것 같아서…….”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세시안은 흔들리지 않았다.
“사과하고, 반성하렴.”
“새언니, 죄송했어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예요.”
그리고 리젤로트는 대뜸 머리가 흐트러졌다며 시녀를 데리고 다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세시안이 한숨을 삼키는 것이 앤의 눈에도 보였다.
“정말이지, 저 아이는…….”
“전하. 크게 다친 것도 아닙니다.”
앤은 생각했다. 만약 조부님이 조모님에게 주신 것이 저런 달콤함이라면, 궁정을 하루 정도는 버릴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하고. 싸늘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녹았다. 그는 아롈의 볼과 목을 어루만지며 어쩔 줄 몰라하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앞으로 주의 주겠습니다. 등등.
“전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과는 받았으니 되었습니다. 앤.”
아롈이 앤을 향해 눈길을 주었다. 앤은 부리나케 아롈이 눈으로 가리키는 것을 주워다 바쳤다. 카메오가 달린 리본이 풀려 있었다. 아롈은 카메오가 무거워 손을 조금만 움직여도 쉽게 리본이 풀려버린다 불평을 늘어놓곤 했다.
“전하. 부디 손목을.”
“됐습니다.”
아직 언짢은 기색이 가시지 않은 세시안이 앤의 손에서 리본을 빼앗아들었다. 아롈은 순순히 반지를 네 개나 끼고 있는 왼손을 내밀었다. 희고 가는 손목에 리본이 한 바퀴 둘러졌다. 중앙에 달린 카메오가 유난히도 무겁게 늘어지며 손목 아래를 변으로 하는 삼각형이 그려졌다.
크라바트를 매듯 큰 손으로도 용케 리본을 맨 세시안은 아롈의 손등을 자신의 고개까지 올려 입술을 댔다.
“전하. 여기 계속 서계실 겁니까?”
그가 애써 웃는 듯했다.
“그럼 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