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설익은 혹은 농익은 (9)
로렌의 여자 신발은 굽이 가늘고 높다. 코도 뾰족하다. 발을 작아 보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쓴 탓에 신을 신고 오래 걷거나 서있는 게 불가능했다.
따라서 홀에 내내 서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은 휴게실과 홀을 드나들며 발을 쉬어주어야 했다. 하지만 그래도 두세 시간 정도 지나면 발은 후끈 달아오른다.
아롈은 예의 우스꽝스러운 카메오 리본을 그대로 손목에 묶은 채 평화의 홀이 아닌 다른 여성 휴게실들을 오가며 수다를 떨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머릿속에서 죄다 꺼내고, 그간 쌓인 먼지를 탈탈 털어낸 다음 이리 저리 짜 맞추었다.
아롈은 자평하는 것보다 훨씬 사교성이 떨어졌다. 특히 로렌처럼 나긋한 아부와 일상적인 칭찬이 당연한 곳에서 아롈의 무뚝뚝함과 오만함은 유난히도 두드러졌다. 하지만 지위를 앞세워 곤란한 기색을 무시하고 뻔뻔하게 끼어든다면 거부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본디라면 한 푼 가치도 없다고 씹어댔을, 기밀이라고 할 것도 없이 별 것 아닌 이야기였으나 약 1년 전까지의 코시카의 특급 기밀을 꿰고 있는 아롈은 많은 것을 짐작해냈다.
예를 들어, 북쪽으로 포도주를 더 많이 수출하게 되었다는 오베르뉴 출신 어느 백작부인의 이야기는 아롈을 착잡하게 만들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코시카는 지나치게 비싼 남쪽 산 포도주 가격을 좀 흥정하고자 동쪽 및 신대륙 산 포도주의 관세를 낮춰주는 정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저급 포도주라면 몰라도 값비싼 고급 포도주는 사치품 관세의 대표 품목으로서 다소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수출을 늘렸을까. 갑자기 같은 가격에 대한 포도주의 수요가 급증했을까? 날씨가 좋아서 생산량이 급등했을까? 아니다. 고급품은 보통 수년에서 수십 년을 묵혀서 먹으므로 당해의 생산량에 가격이 영향을 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 관세를 일정 기간 감해주거나 면제해줬겠지. 오히려 로렌은 더 많은 이득을 보고, 코시카의 중앙 수입은 줄어들었을 것이다. 아롈 자신의 비약일까.
그 외에도 아롈은 어머니가 넘겼을 이권의 잔재를 몇 개고 발견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다른 이권들을 몇 개나 로렌에 ‘대가’로 넘겼을까. 안 그래도 선심을 잘 쓰던 사람이었다. 하나 뿐인 딸과, 그 굉장한 액수의 지참금만으로는 보병 연대 한 개에 대한 값이 나오질 않았던 걸까, 라고 빈정거리다가 아롈은 대화 중이라는 것도 잊고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보병 연대.
아롈이 우연히 보게 된 남편의 서류는 중앙 기사단-로렌은 예스럽게도 아직 군대에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제1 연대의 비밀 임무 연장으로 인한 제8 연대의 조기 징집 요청이었다.
물론 아롈은 정권 교체의 날, 강제로 아롈을 잡아 억지로 무릎 꿇리던 그 군대가 어느 소속인지 정확하게 아는 바가 없었다. 로렌 군대라는 것밖에는. 하지만 ‘비밀 임무의 연장’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그들이 바로 그 군대라는 걸 추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분명 허술할 수 있는 추측이었다.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세세하게 따진다면 지금까지 아롈이 하는 작업은 모두 헛수고였다. 아롈은 성기게 짜인 추측의 그물 위에서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설마 지금까지 피아스트를 밟고 있을까. 피아스트는 속국이다. 충성을 맹세한 국가를 상대로, 그것도 국력이 그렇게나 차이나는 소국을 상대로 전쟁을 장기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적당히 밟았으면 자비로운 척 빠져야 한다고 했는데. 너무 잔인하게 굴면 주변의 속국들이.
어머니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겠지. 피아스트를 대놓고 밟아 본보기를 보이고 주변 속국들에게 경고를 주려고.
피아스트 국왕은 멍청했다. 코시카 군대며 다른 귀족들이 옐레나 여제에게 불만을 갖는 것과, 속국의 국왕이 자신들의 황제-어쨌거나-를 모욕하는 것은 당연히 다른 문제다.
이제 그만큼 피아스트에게 본보기를 보였다면, 많은 군인들이 본국에 돌아올 테고, 그 다음은 이제 그들의 불만이 터지는 일만 남았다.
키옌의 피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을 알았다. ‘코시카의’ 아롈은 ‘로렌의’ 옐레나 여제가 아는 것보다 훨씬 명징하게 코시카 군인들의 충성심을 꿰뚫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들의 충성심을 받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피아스트를 밟아 본보기를 보이듯 숙청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 공포는 가장 강력한 검, 그리고 가장 미약한 방패.
반란이라도 일어나면 어머니로서는 더 바랄 바가 없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머니는 키예나가 아닌데…….
생각의 갈래가 너무 중구난방으로 퍼지자, 검지가 저도 모르게 올라가 미간을 문질렀다. 아롈 스스로는 지각하지 못했으나 이 습관은 시녀들이 이반 파블로비치가 가지고 있다 하여 몸에 배었다. 아롈은 회랑에서 알렉산드르가 이반의 앞에서 통곡하기도 전에, 알렉산드르가 아롈에게 이반을 겹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애정을 받기 위해 비굴하게 죽은 이반을 따라했다. 눈이 좋아 안경만은 쓸 수 없었지만.
“전하?”
모두의 시선이 아롈을 향하고 있었다. 수백 가지는 아니어도 십수 개는 되는 녹색 눈들의 앞에서 아롈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런 기본적인 곳에서 실수를 하다니. 너무 몰두했다.
“아, 요즘 곤하여 그만. 신경 쓰지 말게.”
“밤에 잠을 잘 못 드시는 거라면 향초를 써보시는 게 어떠신가요?”
“어머, 어머, 뤼네트 양은 아직 결혼을 안 하셔서 뭘 모르시는군요. 향초가 도움이 될 리가 없잖아요?”
“디뉴 공작부인. 무슨 말씀이세요?”
“신혼이신 분이 곤하실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꺄르륵, 하는 웃음이 가득 차며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주로 세르께서 잘 해주시느냐 하는 이야기였다. 아롈은 자신의 월경 주기나, 밤 생활에 관한 것이 정말 여상스럽게 입에 오르는 이블린의 생리에 혐오감을 느꼈지만 지금만은 다행으로 여기며 적당히 대답했다.
실수를 그냥 넘길 수만 있다면 임신, 임신하는 돌림 노래 정도는 웃어넘겨줄 수 있었다.
이런 자리에 끼지 않아도, 필리프에게 물어본다면 대륙 현황 따위는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편에게 물어도 빠르겠지. 하지만 아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왜 알고 싶어 하냐고 필시 들어올 질문에 대한 답이 궁색했다. 특히 남편에게는 대륙 정세의 현황 따위 묻고 싶지 않았다.
가지를 한껏 벌린 언덕 위 느티나무처럼 여유 있던 얼굴에 흐릿한 구름이 끼든, 아무렇지 않은 듯 ‘그건 알아서 무엇 하게요?’라고 묻든 둘 다 싫었다.
그래서 아롈은 열심히 웃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서 가십 이야기로 흘러 지루해졌는데도, 남편에 대한 생각은 치워놓고 대화에 몰두했다.
저 멀리 홀에서 아롈 쪽을 자꾸 바라보며 얼쩡거리는 남성이 눈에 띄었다. 수다를 떨던 부인 중 하나도 그를 발견한 듯했다. 대화의 주제가 순식간에 옮겨갔다.
“어머나. 저 빨간 머리는……. 멘 공작이로군요?”
“대회의 연회에 나온 건 처음이죠?”
“열두 살에 멘 지방으로 내려갔다고 들었는데요.”
“참, 폐하께서도 무정하시지. 긴급회의까지 소집해서 계승권을 주실 정도로 아끼실 때는 언제고 저만치 클 때까지 그냥 내버려두시네요.”
“그야 클라리 후작부인이나 낭트의 아가씨가 그렇게 비명에 갔는데. 황후께서도 그 성격에 쥐 잡듯 잡으시고……. 어머나. 실수.”
아롈은 옆에 앉아서 음료 시중 등을 들고 있던 앤을 흘끗 바라보았다. 연애를 들킬까봐 그런 걸까. 얼굴이 백짓장이나 다름없었다. 아롈은 손짓해서 얼쩡대는 그를 불렀다.
멘 공작은 연회의 예절대로 날렵하게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코시카에서는 연회 중에도 황족의 앞에서는 무릎을 꿇는 것이 상례였으나 로렌에서는 시작할 때가 아니면 그러지 않았다.
“무슨 일이오, 멘 공작.”
“전하께 인사 올리려고 하였습니다.”
“연회는 즐기고 있소?”
“예. 전하.”
“모처럼의 무도회인데, 충분히 즐기려면 춤 상대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
멀쩡하게 차려입으니 허우대는 썩 괜찮다. 아롈은 그의 머리카락만큼이나 붉어진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앤을 돌아보았다.
“다녀오너라.”
“송구하옵니다. 어디를 이르시는 말씀이시옵니까.”
“가서 놀다 와도 좋단 말이다. 마침 저기에 상대도 있구나.”
둘 모두의 어깨가 흠칫했다.
“내 시녀인데, 작센 출신인지라 아는 이가 없소. 괜찮다면 상대를 해주겠소?”
“영광입니다.”
이만큼 등을 밀어주었으면 냉큼 잡을 것이지. 앤은 손을 맞잡고 고민하다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둘은 손을 잡고 홀로 나가 춤을 기다리는 대열에 섰다. 그 모습이 연인이라기에는 어쩐지 어색했다. 잘못 짚었나?
자리에 앉은 부인들은 웃고 까불었다. 아롈은 잠시 그녀들과 대화를 하다가, 홀에 나가보겠다는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화의 홀에라도 들어가 잠시 쉴 생각이었다. 얻은 정보를 좀 정리하고, 남편에 대한 생각도 좀 하고. 단순 치환 방식의 암호로 쓴 일기는 태워버렸지만 아직 남편의 얼굴을 보고 화를 낼지 웃을지 결정하지 못했다.
마침 평화의 홀에서 나오던 미네트는 빙긋 웃음을 머금었다.
“안녕하세요, 미네트.”
“어머나, 안녕하세요, 마담 라 세르. 마침 잘 오셨어요. 황후 폐하께서 찾으시어 말씀드리러 가던 참이었답니다.”
아롈은 웃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속으로 맹렬하게 욕을 했다. 재수가 없다. 잘못 걸렸다. 아직도 낮의 찍어죽일 듯한 얼굴이 생생했다. 그 얼굴에 따라서 귓불의 감촉까지 살아났다.
아, 멍청해라. 이것만큼은 남편에 대한 원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롈은 귓불을 매만지며 고개를 기울였다.
“때가 잘 맞았군요. 기다리고 계신다면 어서 들어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