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설익은 혹은 농익은 (11)
잠시 머뭇거리던 손이 단호하게 리본을 풀어냈다. 황후는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리본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은 카메오를 확인하자마자 한 대 맞은 것처럼 짓뭉개졌다.
“이게……. 뭐니?”
“보시는 대로입니다.”
“나는 너 같은 딸을 낳은 기억이 없는데.”
황후의 손이 떨렸다. 그녀는 반쯤 던지듯이 카메오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아롈은 서느런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숙였다.
“혼인을 했으니 이제 두 분 가장 신실하신 폐하의 보호 아래 딸이나 다름없게 된 것이 아닙니까.”
미리 준비해두었을 말들이 전부 쓸모없게 된 황후의 얼굴은 볼만했다. 어떤가. 그 조잡한 성경구절 덕분에, 최소한 이 자리에서만큼은 황후가 아롈을 공격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크리스틴이나 미네트도 마찬가지였다. 아롈의 체면이 더럽혀지는 것은 ‘어미가 그러하면 딸도 그러하다 하리라’라는 구절에 의해 황후를 모욕하는 것이고, 그는 곧 황후의 태에서 태어난 자신들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것이니.
크리스틴의 얼굴 역시 잎사귀에 매달린 이슬처럼 아슬아슬한 평정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오거스틴은 활짝 핀 꽃처럼 웃었다.
“올케 언니께서 어마마마를 그렇게 생각하시는 줄은 미처 몰랐답니다. 저 역시 이렇게 아름다운 새 자매가 생겼으니 기뻐요.”
아롈은 귓불을 만지작거리다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어깨와 팔뚝이 아팠다. 과연 몸은 오랫동안 해온 수업을 배신하지 않아서, 리젤로트에게 받힌 순간 머리를 보호하며 충격을 최대한 흡수하는 방법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바닥은 대리석이었다. 아프지 않을 리 만무했다. 조금이라도 서툴게 떨어졌더라면 뼈에 금이 갔으리라.
황후는 잡담을 나누는 내내 분을 삭이다가, 병약한 오거스틴이 피곤하다고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파했다. 삼삼오오 일어나 흩어지는 와중에 아롈은 잠시 숨을 가다듬고는 리젤로트를 붙잡았다.
"리젤로트.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새언니, 무슨 일이에요?"
당장 쓰러질 듯 파리한 얼굴이었다. 아롈은 카메오에 대한 말을 꺼내려다가 멈칫했다. 이제 보니 얼굴에 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아까 그렇게나 눈물을 흘렸으면서. 아무리 화장술이 좋다고는 해도 눈이 부은 것까지 감출 수는 없다.
그리고, 새언니.
-꺄아, 아렐르. 안 다치셨어요? 죄송해요. 제가 실수했어요. 어떡하지요. 피가 나요! 혀 깨무신 것 아니에요? 입을, 입을 좀 벌려보세요. 아아, 어떡해.
그래. 리젤로트는 아롈을 아렐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아롈은 순식간에 할 말을 짜냈다.
"괜찮으십니까. 피곤하신 듯하여 염려됩니다."
"으응. 그게, 피곤한 건 사실이지만요. 아마 정상일 거예요. 네."
"이해합니다. 혹 필요하시다면, 저를 찾아주십시오.“
어디까지나 입에 발린 말이었다. 아롈은 최대한 나긋하게 웃어 보인 다음, 팔랑팔랑 뒤돌아서려 했다. 마음이 급했다. 황후를 부축한 목표물이 멀어질 것 같았다.
그녀가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었다. 이유 없는 빚을 지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런데 리젤로트가 아롈을 붙잡았다.
"저기, 새언니. 저요. 할 말이 있는데요."
"말씀하십시오."
개암색 눈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아롈은 답답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불안하게 주변을 살핀 리젤로트는 손짓으로 시녀들을 세워놓고 아롈을 평화의 홀 구석으로 끌고 가 귀에 손을 댔다. 아롈은 기겁해서 도망가고 싶은 자신을 억눌렀다.
"저기요, 저요."
따뜻한 숨결과 함께 단어 몇 개가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가슴이 뛰었다. 아롈은 당황스럽게, 자신보다 훨씬 작고 가녀린 처녀의 배 부분을 훑었다. 스테이로 조여 여전히 날씬했다.
말을 마친 리젤로트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실래요?"
앤과 춤을 추고 빠져나온 앙투안은 분수대에 앉아 있었다. 선객이 있는 것을 본 연인들, 혹은 오늘 막 급조된 남녀 한 쌍은 분수대로 다가오려다가 방향을 틀어 정원으로 사라졌으므로 그는 오롯하게 앉아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밝은 빛을 바라보았다. 정의관과 자비관, 거울의 홀로 이어진 쌍둥이 건물은 휘황한 불빛으로 가득했다. 그 어딘가에는 그녀도 있을 것이다.
없는 문학적 소양을 그러모아 몇 가지 표현을 떠올렸다. 새벽 햇빛을 걸러 가장 정순한 광채만을 길게 뽑은 것 같은 금빛을 손에 거머쥐고 싶다거나, 봄의 새싹처럼 여린 녹색에 얼굴을 담아주었으면 같은 다소 즉물적인 문장들이었다.
연모하는 사람이 그에게 춤을 출 상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을 때, 앙투안은 백일몽을 꾸었다. 가짜 태양인 듯 커다란 샹들리에 아래에서 손을 잡고, 춤을 출 수 있으리라고.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그는 앤이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인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원래 기사의 연모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람을 향해 바치는 것이 원형이었다. 얼굴 한 번 보지 못 하고 편지로만 왕래한 숙녀를, 주군의 부인을, 길을 떠나와 아주 멀리에 있는 숙녀에게 마음을 바치고 ‘겉으로는’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연정은 당연하게도 상대에 대한 몰이해를 기본으로 한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상대를 재조립하고, 자신의 망상을 덧붙인 결과 완전히 다른 사람을 만든다.
앙투안은 처음에 ‘여자면서 말도 함부로 하고 건방지다’고 평했던 자신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앙투안의 머릿속에서 아롈은 고상하지만 사실 말을 걸어보면 수줍고, 상냥한 사람으로 탈바꿈했다. 실물이 그 이야기를 안다면 징그럽다는 듯이 회피했겠으나, 그런 전환은 그 스스로도 깨닫지 못 하는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앙투안의 연정은 ‘기사’로서 충실했다. 그는 하염없이 오늘 아롈이 입고 있었던 옷이며 장신구의 형태를 그려보며 잘 짓지도 못하는 아름다운 시를 지어보려 노력했다.
단정한 선의 이복 형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앉아도 되니?”
그는 바로 일어나 무릎을 꿇으려 했다.
"세르."
"아니, 괜찮단다."
그는 성격만큼이나 말끔한 선의 조끼와 셔츠만을 걸치고, 코트는 벗어둔 채였다. 손을 목으로 가져가더니, 긴 레이스 스카프(cravat)를 풀어내고는 단추까지 두 개 열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목젖이 드러났다. 굉장한 술 냄새가 났다.
"앉으렴."
"제가 어떻게 감히."
"올려다보려니 내 목이 아픈데."
"그건."
"앉으렴."
부드럽지만 단호한 명령에 이끌리듯, 앙투안은 쭈뼛쭈뼛 옆 자리에 앉았다. 세시안은 앙투안이 아직 이블린에 살고 있을 무렵 그를 훈육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루이 샤를과 뛰어놀다가 사고를 치면 항상 그가 혼냈다. 루이 샤를에게 말을 듣게 할 권위를 가진 사람이 이블린에 몇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홉 살 차이, 많은 차이였다. 앙투안이 꼬물거리는 여섯 살 어린애였을 때부터 세시안은 이미 결혼한 어른이었고 깊은 물처럼 차분하고 고요해서 소리 지르거나 얼굴을 붉히는 일은 얼마 없었다. 그 나이가 되면 저렇게 되는 걸까 생각했지만, 앙투안은 열아홉이 된 지금도 화가 나면 천지분간을 못 하는, 건방진 애송이였다.
"덥구나."
"예, 세르."
"오늘이 닷새째인가. 이제 겨우 삼분지 일 왔다니 절망적인걸."
"예, 세르."
"대회의에는 왜 안 나왔니."
"예, 세르. 아, 아니."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세시안은 쿡쿡 웃고는 머리를 묶은 끈을 풀었다. 오랜 시간 묶어 놓아 그대로 자국이 남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흩어놓은 세시안은 무더운 여름밤에 한숨을 흘려보냈다.
“네가 이블린에 온 건 정말로 오래간만이지. 네가 떠난 게 몇 살 때였더라?”
“아홉 살, 아니 열 살이었습니다.”
“그럼 구 년?”
“예.”
세시안은 나이가 몇인지 생각하지도 않고 답을 말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너를 나바르에서 만났을 때는 많이 놀랐단다. 미셸에게 평기사로 있다고는 들었지만 신부를 수행하는 길에 따라갈 줄은 몰랐으니까.”
“미리 연락을 드리지 못 한 점 죄송합니다.”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나도 사는 게 바빠서 네 생각을 못 하고 살았던 것 같구나. 새삼 무신경했구나 생각하게 되는걸.”
“아닙니다. 세르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이유가…….”
“옛날처럼 형이라고 불러도 괜찮단다.”
발갛게 고름이 들어찬 여드름이 톡 터지듯, 그는 손을 저었다.
“저 같은 게 어떻게…….”
“너는 내 동생이잖니.”
-정말 좋은 분입니다.
그랬다.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상냥하고, 이성적이고, 공정하고, 참을성 강한 분입니다.
정말이지 그에게 좋은 사람 말고 다른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앙투안은 지금도 그리 성숙하지는 않지만 어린 나이에는 정말이지 천둥벌거숭이로서 날뛰는 소년이었다. 그런데도 성장하고 나서 하나하나 기억들을 떠올리다가 새삼 깨달았다. 아, 이복형은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구나, 하고.
-제가 존경하는 분입니다.
이복 형수인 옐레나, 아니 엘리엔에게 한 말은 전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그 진심이 거꾸로 쥔 칼날이 되어 앙투안을 난도질했다.
“어머니가 다르다곤 해도, 넌 내 동생이고 폐하의 아들이다. 잊지 말아라.”
분명 앙투안의 연정은 특정한 형태를 지닌 것조차 아니었다. 애초에 무언가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의 ‘아내’에게 품은 그 작은 망상과, 두근거림이 죄스러워서 앙투안은 견딜 수 없이 괴로워졌다.
“그래. 술을 깨려고 나왔는데 마침 만나서 다행이구나. 오를레앙에 돌아갈 거니? 아니면 이블린에 있을 거니.”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천천히 생각하렴. 하지만 나는 네가 이블린에 있었으면 좋겠구나.”
벼락을 맞은 듯했다. 세시안은 머리카락을 모아 다시 흰 끈으로 묶고는, 목에 긴 레이스를 감았다. 장미가 화사하게 꽃 피어 있었다.
“어마마마께서도 나이 드셨다. 내 후사가 없으니 부황께서는 걱정이 많으시지. 고려해주려무나.”
‘후사’라는 말에 그는 차마 말할 수 없이 음탕한 생각을 떠올리고는 화들짝 지웠다. 세시안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다시 스카프를 매고 벗어두었던 옷을 걸쳤다.
“들어가지 않아도 되니?”
“저는 잠시 더 있으려고 합니다.”
앙투안은 고개를 숙여 눈을 피했다.
“그래. 그럼 나는 먼저 들어가……, 아.”
두세 발짝 떼던 세시안이 멈추었다.
“네 외조모가 민스크에서 시집왔다고 했던가?”
“예.”
세시안은 품을 뒤져 종이를 하나 꺼냈다. 한 눈에 봐도 미색을 띠는 고급 종이였는데, 소중하게 접혀 있었다. 분명 역광인데도, 그의 단정한 얼굴이 취기와는 다른 붉은 빛을 냈다.
“그럼 혹시 카트 어 할 줄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