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설익은 혹은 농익은 - (20)
결국 무도회는 빼먹었다.
남편이 무릎을 베고 잠든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던 탓인지, 정사 중 저도 모르게 서두른 탓인지, 맹세를 마치고 밀쳐놓았던 시계를 열어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일렀다. 서두른다면 석찬만을 거른 듯 아무렇잖게 연회에 참석하여 점잔을 뺄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문자판 위로 드러났다.
땡땡이도 쳐본 사람이나 마음 놓고 치는 것이다. 적어도 아롈은 ‘불성실’이라는 단어와는 담을 쌓고 살아왔다. 짜증과 신경질을 달고 살았지만 어쨌거나 해야 할 일은 해냈다.
‘여름 감기 때문에 앓아누운 걸로 하자’고 비장하게 결심하고 시계를 치워버릴 때에는 언제고, 시침과 분침의 위치를 확인한 부부는 서로를 머쓱하게 바라보았다.
결국 남편이 단호하게 아롈의 손을 잡아 시계를 치웠다. 자고 일어나 미지근하게 식은 손에 입술이 닿자 어깨가 움찔했다.
-오늘은 놀지요.
-저는 지금이라도 내려가도 괜찮습니다만.
스스로 졸라놓고 이제 와서 손바닥을 뒤집듯이 말을 바꾸는 것도 민망했 . 그러나 그 때 남편은 잠시 저울질 하다가 털어버리듯 웃었다.
-오늘은 제 아내의 곁에 있기로 해서요.
가슴이 쿵 떨어지고 귀까지 달아올라서,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도망쳐 한참 동안 부채질을 했는데도 열이 식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서류 작업을 했다. 일을 하는 동안에 남편은 조금 투덜거렸다.
-조금 억울해지는군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같이 있어달라고 했잖아요?
-지금 옆에 계시잖습니까.
-전에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지만, 제가 생각했던 방식은 아니로군요.
하지만 말 뿐이었던 듯, 남편은 금세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아롈은 양초 가격을 써낸 보고서를 보다가 짜증을 눌렀다.
처음에 아롈은 양초의 개수나, 주문할 가게 등을 정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롈은 최종 결정권자지 심부름꾼이 아니었다. 그런 세부사항의 조율은 어디까지나 아랫사람들이 해서 보고하는 것이다. 하지만 심부름꾼이 제대로된 결과와, 그 결과를 도출해낸 과정을 제공해주지 못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대체 아롈이 ‘항상 주문하던 가게’가 어디인지, ‘항상 주문하던 양’이 얼마나 되는지 알 게 무어란 말인가?
가게의 이름들과 주문 가능한 양과, 다른 연회의 예를 봤을 때 총체적으로 필요한 양초의 양과, 가격의 총합을 정리해서 가져오라고 일일이 지적을 해줘야 하는 건가.
도무지 체계라는 것이 없었다. 지금까지 도대체 이 큰 건물의 살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가르치는 것에 시간이 더 들 듯했다. 아롈은 이제 고인이 된 조부의 답답한 심정을 겨우 이해했다.
하지만 아롈은 조부가 자신에게 그랬듯 시녀들의 얼굴에 대고 서류-라고 부를 수 있다면-를 집어던지지는 않았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
그나마 좀 나아지긴 했다며 속을 달래고 일을 처리했다. 잠을 푹 자서 그런지 생각보다 셈이 빨리 끝났다. 일을 끝낸 다음에는 카드놀이를 하며 놀았다.
누가 부르러 오면 카드를 내려놓고 갈 때까지 숨을 죽였다. 정말 질릴 때까지 카드를 했다. 남편은 아롈에게 몇 번 져주더니만, 아롈이 그를 지적하자 진지하게 하기 시작했다. 카드 규칙은 북쪽이나 남쪽이나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알렉산드르에게 배운 카드 실력은 녹슨 지 오래여서, 남편이 진지하게 치기 시작하자 무참하게 졌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단 한 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심리전에도 뛰어나서, 아롈은 거는 족족 잃었다. 아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바깥에서 지고 오는 건 다 사교적 술수였던 것이다.
카드놀이가 질릴 때즈음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다가온 것은 다정한 입맞춤. 아롈을 끌어안은 몸이 더웠지만 싫지 않았다. 심장도 함께 잠들었던 듯이 두근거리고, 풍성한 목소리의 아침인사가 귀에 닿았다. 일어나자마자 몸이 가뿐했다.
아롈은 이본느와 소피가 찾아와 시간을 내어줄 것을 청하기 전까지 내내 기분이 좋았다. 그 다음날로 알고 있었는데 앤이 날짜를 착각했다. 제대로 치장하지도 않은 것이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남편이 오늘도 예쁘니 이대로 가도 괜찮을 거라 웃었다. 그 웃음 때문에, 아롈은 날짜를 착각한 앤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아롈을 남겨두고 센 궁으로 떠났고, 아롈은 이블린에 남았다.
보르디 가문의 아가씨들과 앉아 의례적으로 친목을 쌓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정말 재미가 없었다. 이야기에 웃어주고, 답변해주면서, 아롈은 남편을 생각했다.
외롭다고 붙잡자, 옆에 있어주었다. 아롈은 그것만으로도 평생 비어있던 한 구석이 채워지는 듯 섬뜩하게 충족감을 느꼈다.
어리광을 부리는 것은 여전히 미안하다. 하지만 그것은 빚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계속 마음 한 구석이 쿡쿡 찔리지만, 언젠가는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 평생을 같이 살아갈 사람이다. 이 마음의 빚, 한 번 갚을 날이 없을까.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은 그만한 무게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빚을 덜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약속해주겠냐고 물었을 때, 아롈은 남편의 옆얼굴을 보았다. 그와 나눈 많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손가락에 윤기를 흘리는 진주를 떠올렸다. 그는 아롈을 만난 직후부터, 아니 아롈을 만나기도 전부터 지금까지 충분히 아롈에게 신뢰를 주려고 노력했다. 입 밖에 내어 생색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모른 척 할 정도로 뻔뻔하지 않았다. 그래서 약속했다.
남편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아롈에게 ‘약속’이란 최소한 목숨에 견줄 만큼은 굉장한 무게였다. 아롈은 다음에 남편이 무언가 질문을 하면 솔직히 대답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파피나 벨타의 일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설마하니 남편이 ‘릴레벨트 해의 해룡을 아렐르가 데리고 왔나요?’ 따위의 질문을 할 리는 없지 않은가. 이미 말해버린 마법사의 일은 적당히 혈통 얘기로 둘러치자. 유모에게 맞았다든가, 사생아로 오해를 받았다든가, 마리야의 일 같은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잖은가. 그냥, 예전에 아롈이 자랐던 시골은 참 눈이 많이 내렸고, 아주 많이 춥고, 조금은 외로웠노라고, 그런 얘기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소피가 뭐라고 잡담을 하면서 웃었다. 아롈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따라 웃었다. 손가락이 입술에 닿았다. 아침에 입맞춤을 받은 입술이었다. 귀가 달아올랐다.
-이따가 데리러 오지요. 재미있게 놀아요.
가벼운 입맞춤, 따라오던 따뜻한 얼굴. 저도 모르게 미간에 손을 가져가다가, 간밤 남편이 손수 미간을 문지른 게 생각나 조금 더 부끄러워졌다. 소소한 버릇이었는데 알고 있었던가.
손을 둘 곳을 찾지 못한 아롈은 괜스레 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떨떠름한 차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이야기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혹시 뭔가 실수한 것이 있어, 필리프의 잔소리라도 나올까 긴장했는데, 가신들의 딸도 불러 모아 가볍게 친목을 다지는 자리라 그런지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대회의 승인과 관련하여 가벼운 가십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그런 잡담이야말로 아롈이 가장 취약한 분야였다. 문학작품이나 공연, 음악에 대한 이야기라면 어느 정도 끼어들 자신이 있었지만 가십에는 약했다.
오찬 시간이 되었건만 숙녀들은 자리에서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롈은 차를 하도 마셔서 배가 고프지 않았다. 오히려 물배가 차서, 졸라맨 허리가 답답했다.
처음에는 연애 얘기였던 것이 정부 이야기로 흐르자, 조금씩 역겨워졌다. 얼굴과 이름을 외운 사람들이 창녀와 나뒹구는 모습이 떠올랐고, 기분이 나빴다. 이마를 찌푸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적당히 이야기를 끊어야 하나 고민하는데, 반갑게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미네트였다. 아롈은 그 손목에 팔랑이는 리본을 훑었다. 틀림없이 아롈의 것이었다. 미네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어렴풋한 표정을 읽은 듯 했으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좋은 하루입니다. 미네트.”
“예, 안녕하세요. 마담 라 세르, 황후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왜?
“센 궁에 가신 게 아닙니까.”
“아뇨. 오늘 미령하시어 이블린에 남으셨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며느리를 꼭 보고 싶다 하셨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여자들은 전원 보르디 출신의 여성이었다. 황후의 성격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전운이라고 할 만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롈은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뭔가 시작하려는 것이다.
“지금 오라는 말씀이신가요?”
“예. 오찬이라도 함께 하시자는 게 아닐까요?”
“크리스틴이나 오거스트, 리젤로트도 같이 있습니까?”
“친딸보다는 ‘친딸이나 다름없는’ 며느리를 더 보고 싶으신 것 같답니다.”
“복장이 미편합니다만.”
“어미가 딸을 보는데 복장 따위를 따지겠습니까.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다 하셨답니다.”
틀림없이 무엇인가를 준비해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황후고, 아롈은 그녀의 며느리였다. 필리프의 말마따나, 아롈은 황후의 밑이었다.
“오늘 모임은 이걸로 파해야 할 것 같군요, 이본느.”
둥근 얼굴의 사촌 언니이자 사촌 올케는 걱정 서린 얼굴로 웃었다.
“황후께서 찾으시는데 가신의 부인 된 몸으로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다녀오시길.”
아롈은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이 그대로 계단으로 향했다. 시녀는 둘만을 붙였다. 요즘 무슨 일이 있는지 매일 아프다는 앤은 빼놓고, 노아이유 부인과 다른 나이든 시녀 하나만을 대동했다. 황후가 지내는 방은 2층 구석에 있었다. 아롈은 4층에 살고 있었으므로, 계단을 두 층 내려가야 했다. 그러나 미네트는 단 한 층만을 내려갔다.
“미네트. 더 내려가야 하는 게 아닙니까.”
“아뇨. 이쪽이 맞답니다.”
아롈은 안내를 하듯 앞에 선 미네트의 손목을 노려보았다. 아롈의 어머니, 옐레나 여제의 얼굴을 새긴 마노는 미네트의 손목에는 너무 버거워보였다. 아롈이 미네트보다 훨씬 키가 컸으므로, 아롈의 손에 맞추어 제작한 리본과 카메오는 미네트에게는 길고, 컸다.
만나서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좀처럼 틈이 나지 않았다. 미네트는 황후 없이 혼자 연회에 내려와 돌아다니는 법이 거의 없었고, 미네트를 만나기 위해 황후를 직접 찾아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아롈은 모퉁이를 돌자마자 한숨을 쉬고 싶어졌다. 벽이 없이 뻥 뚫려있는 방이 있었다. 속칭 황후의 방이었다.
황후가 이 침실을 질색한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었고, 그 불호에는 아롈도 동의해줄 의향이 충분했다. 대체 어떤 머저리가 벽 없는 침실을 지을 생각을 했단 말인가?
그러나 그 황후는 황후의 침실에 얌전히 누워있었다. 옆에서 귀족 부인 몇이 수발을 들고 있었다. 오를레앙 측 가신의 부인들이었다. 아롈은 문턱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미네트가 옆에서 문틀을 손등으로 쳐서 소리를 냈다. 그런데 들어오라는 말이 없었다.
천천히 열을 셀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보다 못한 아롈의 시녀 하나가 꽤 크게 바스락거리는 옷소리를 냈다. 황후가 움찔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눈을 감은 채였다.
그 순간 아롈은 황후가 무슨 작정을 했는지 감을 잡았다. 언뜻 올려본 미네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아롈은 이를 악물고 눈을 내리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