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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9. 설익은 혹은 농익은 - (22)


 그림자가 정수리에 드리우고, 발소리가 귀를 때렸다. 등 뒤로 사람이 지나가는 기척이 칼날처럼 정신을 찔렀다.

이제 슬슬 발에 감각이 없었다. 그간 발을 옥죄는 남쪽 구두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건만 착각이었다. 몇 번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풀려고 애써보았지만, 찌릿한 고통만이 종아리를 타고 올라왔다. 숫제 하반신이 사라진 듯했다.

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떠들며 지나가던 시녀들이 아롈을 발견하고 급히 입을 단속한 채 멀어지는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될 동안, 어금니가 으스러지도록 악물며 견뎌냈다. 신음 한 마디 흘리지 않았다.

아롈은 숨을 고르며 손목에 매인 카메오를 노려보았다. 젊은 시절 황후의 얼굴이 대리석에 돋을새김 되어 있었다. 마음이 조금이라도 약해질 때마다 칼로 잘라내듯 가다듬었다.

황후에게는 지지 않는다. 그것이 필리프와의 약속이었고, 또 아롈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희미한 신음이 흐르다, 이내 뒤에서 풀썩 사람이 쓰러졌다. 노아이유 부인이 쓰러진 것이다. 황후의 곁에서 수발을 들던 부인들이 다가가 그녀를 일으켰다. 아롈은 속눈썹 한 올 떨지 않았다. 돌아보았다가 무슨 책을 잡히라는 것인가.

똑, 똑, 똑.

아롈의 옆에 계속 서 있던 미네트가 다시 한 번 문틀을 두드렸다.

"어머, 내가 깜빡 졸았구나.“

거짓말. 빤히 눈 뜨고 있었으면서.

“일어나렴. 미련하게 그리 계속 있어서 나를 매정한 시어미로 만드는 건 또 뭐라니.”

마침내 그 말이 떨어졌다. 아롈은 고개를 들었다.

황후는 깃털 부채를 들고, 아롈이 넘어지는 순간 ‘어머나, 네 어미는 그런 것도 교육을 안 시켰다던?’하고 비웃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아롈은 이미 고통이 너무 심해 덜덜 떨리는 다리를 무시하려 애쓰며 매끄럽게 웃었다.

“제가 요령이 없었나봅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추호도 흔들리지 않고 우아하게 일어서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 뒤에서 무릎 꿇고 있던 시녀들은 다들 나동그라져 일어나질 못했다. 시녀들이 혼절한 그녀들을 질질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롈은 속눈썹을 내리깔며 고개를 숙였다.

“앉으렴.”

아롈은 원래 준비된 듯 비어있는 침대 옆자리에 앉았다.

“편치 않으시다 들었는데 들은 것보다는 안색이 좋으십니다. 이리 강건하신 모습을 뵈오니 기쁩니다.”

아롈은 의자에 앉은 채 발가락을 계속 움직여 피를 통하게 하려 애썼다. 극심한 고통이 뒤따랐다. 허리까지 시큰거렸다.

황후는 괘씸하다는 듯이 웃었다.

“너야말로 어제 아프다고 하더니 건강하기만 하구나. 과연 젊어서 하루면 앓아눕다가도 벌떡 일어날 수 있는 모양이지?”

“어머니와 같은 분께서 심려하시는데 어찌 바로 낫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은 별 것도 아닌 말들의 반복이었다.

황후는 아롈이 멀쩡히 일어설 줄은 몰랐는지 얼굴이 변해 잡담을 좀 나누다가, 머리가 아프다며 자리를 파해버렸다. 황제도 그러더니 황후도 같다. 도대체가 이 부처는 사람을 오라 가라 해놓고는 자기 할 말만 다 하면 끝인 줄 안다. 도무지 체면을 살려주는 법이 없었다.

아롈은 온갖 자긍심과 자부심을 뱃속에서부터 끌어올려 표정을 유지했다. 부축을 받지 않고, 넘어지지도 않고, 황후의 침실에서 걸어 나왔다. 그러나 그런 자존심도 잠시, 발바닥으로 땅을 딛는 감촉이 없다보니 어느 순간 무릎이 바깥으로 꺾였다. 아롈은 계단 바로 앞에서 나동그라졌다. 팔이 계단 모서리에 찍혔다.

주변에서 신음이 합창처럼 튀었다.

“어머나!”

소리 낼 시간에 잡아줄 것이지. 아롈은 입술을 깨물었다. 수치스러웠다.

“오, 주님.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요.”

둥그런 얼굴의 여자, 이본느였다. 소식을 듣고 오 층에서 뛰어내려온 듯했다. 이본느가 왼팔을, 소피가 오른팔을 잡아 부축했다. 하지만 아롈이 그녀들보다 키가 훨씬 컸다. 휘청 무릎이 다시 꺾였다. 셋이 사이좋게 엎어질 뻔했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사촌. 잠시 기대겠습니다.”

“물론이지요. 오, 세상에. 어쩌면.”

한 걸음 뗄 때마다 죽을 듯이 아프고 부끄러웠다.

그녀들은 아롈을 데려다주면서 끊임없이 아롈의 무고함과 황후의 무도함에 대해 떠들었다. 전처들을 볶기는 했어도, 이렇게 노골적인 일은 없었다고 했다. 전처인 루이즈 마리가 뒷배 없기로는 누구 못지 않은 후국(侯國) 출신의 여자였지만, 말로나 구박할 뿐 직접 몸을 힘들게 하는 일은 없었다면서. 어떻게 보르디 대공의 외손녀이자 코시카 여대공인 아롈에게 이런 일을 할 수가 있느냐고 소리 높여 성토했다.

하지만 아롈이 말을 막았다. 답을 알고, 그 답에 대해 생각하기 싫었다. 아롈은 쫓겨난 신세였다. 보르디 대공가도, 황실도 모두 어머니와 결탁하여 아롈의 지위를 빼앗은 공범이었다. 아롈은 동맹의 대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코시카 계승권도 빼앗겨 없는 신세. 아롈이 사지 멀쩡하게 목숨이 붙어있는 한 코시카에서 돌려서라도 항의가 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롈은 어머니가 움직이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리고, 황후도 아마 알고 있기 때문에 저질렀겠지.

그렇다면 보르디는? 아롈의 외가인 보르디는 이 일로 황실, 하다못해 오를레앙에 항의할 것인가? 설마.

아닐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달래고 성토하는 것은 다만 말 뿐. 아롈을 위해서 행동해주지 않을 것이잖은가. 빈정거림을 참기 힘겨웠다.

침실 앞에서 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롈은 다른 시녀들을 죄 내보내고 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었다. 다른 시녀들에게까지 추한 모습은 보이기 싫었다.

앤은 아롈의 다리를 주무르고, 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입술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입술 안쪽을 하도 깨물어, 너덜너덜하게 피맛이 배어나왔다.

앤까지 내보내고 혼자 남았다. 아롈은 메마른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잇자국이 난 입술을 다시 깨물었다. 코가 시큰하더니, 참았던 눈물이 한숨과 함께 찔끔 배어나왔다.

고작 두 방울. 더 이상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두 방울이 남부끄러워, 푹신한 깃털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아롈의 등 위로 촛불이 깜빡깜빡 일렁였다.

황후는 잘못 생각했다. 아롈은 이유 없는 호의에는 약해도, 적의와 멸시에는 익숙했다.

남편이 그 풍부한 목소리로 아렐르, 하고 부르고 손을 잡고 입 맞추고 포옹하고 소중히 쓰다듬어주면 어쩐지 서러워졌다.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도 잊어버려 허둥댔다.

하지만 이건 아무 것도,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참을 만 한 일이다. 아니, 참을 만 해야 하는 일이다.

이제 입술을 물어도 정신이 그 쪽으로 쏠리지 않았다. 아롈은 인생의 가장 수치스러운 기억들을 발굴해서 되새겨보았다.

아버지가 옐리자베타라고 불렀을 때. 손님이 있어서 만나주지 못 하겠다는 어머니의 방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손님이 나오지 않았을 때. 콘스탄틴 대공이 ‘그 계집애는 건강해서 죽지도 않아’라고 떠들어대는 것을 들었을 때. 도와달라 읍소하여 순진하게 믿었던 안나 콘스탄티노브나가 사실 어머니의 밀정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분명 얼굴을 겨냥하여 조부가 집어던진 서류가 치맛자락에 부딪혀 바닥에 흩어졌을 때. 손수 무릎 꿇어 종이를 한 장 한 장 주웠을 때. 어디가 성에 차지 않는지 말해주지 않는 조부의 앞에서 고개 숙여 잘못했다 하고 방을 나왔을 때.

어머니의 앞에서 무릎 꿇어 고개를 숙이고, 여제 폐하께 경의를, 이라고 말했을 때.

시아버지가 어이없는 성경구절을 낭독시켰을 때.

배탈 난 환자가 물을 씹듯이 기억들을 새기고 나니 고작 시어머니 앞에서 무릎 꿇고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아닌 듯 느껴졌다. 아롈은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의 물병에서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 뱃속에 고였다. 유리잔을 든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래, 괜찮다. 이런 일은 아무 것도 아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어 도저히 거울의 홀에 내려갈 입장이 아니었다. 머리도 다 풀어헤쳤다. 어서 단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어야 연회에 내려가지 않는가.

그러니까 칠칠치 못한 짓 그만 해, 옐레나 파블로브나.

아롈은 한숨을 쉬고는 잔을 내려놓으려 했다.

쨍그랑.

갑자기 커튼이 일제히 제멋대로 움직이며 닫혔다. 방 안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남은 것은 촛대가 밝히는 불빛뿐이었다. 아롈은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두어 번 쥐었다가 폈다. 놀라서 잔을 떨어뜨렸다. 발치에 박살난 유리조각이 빛을 머금고 번들거렸다.

뭐지, 실수했나. 굴욕감에 젖은 마음이 잠시 느슨해져서 ‘써버렸을까’? 아니다. 그럼 멀쩡한 커튼이 왜 갑자기 제멋대로 움직인단 말인가?

[멍청하긴.]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능하면 한 편 더 올리고 자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P.S. 아스투리아스 여공 카타리나의 어머니인 카트린느의 출신 가문에 대해 오류가 있었습니다. 부르고뉴 대공인 카트르, 아스투리아스 여공 카타리나, 부르고뉴의 카트린느 모두 같은 가문이라 이름을 이어받은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따라서 카스티야 왕비는 부르고뉴 출신이고 나바르라고 서술된 쪽이 오류입니다. 아마 준비 과정에서 짠 초기 설정과 진짜 설정이 뒤섞인 것 같습니다. 추후 잘못 서술된 부분이 있는지 확인하고 수정하겠습니다. 지적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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