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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9. 설익은 혹은 농익은 - (24)


젊은 귀족 남녀가 시종 시녀로 근무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때로는 남매나 자매, 형제가 나란히 이블린에 나오기도 했다. 세시안의 시종인 벨망 경도 그런 경우였다. 디뉴 공작부인의 시녀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일이 터지자마자 오라비에게 쫓아와서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런 소식통은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세시안은 정의관 대계단을 내려가면서 아는 시녀를 쉰 명쯤 세다가 그만 두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어 자비관의 모든 시녀란 시녀는 정의관으로 뛰쳐나온 듯했다. 그리고 그 수백 개의 시선들이 몸에 꽂히자, 이블린의 생리에는 어지간히 익숙한 그로서도 진절머리가 났다.

그가 자비관에 들어갈 때까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망​토​(​m​a​n​t​e​a​u​)​처​럼​ 따라왔다. 세시안은 자비관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뒤돌아서 생긋 사교용 미소를 머금었다. 무리가 한순간 멈추었다. 초록빛 눈이 흐르듯이 무리를 훑다가, 적당한 사람 한 명을 찾아냈다.

“유제니 양.”

그녀가 두어 발짝 앞으로 나와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크리스틴의 시녀였다.

“세르.”

숨죽인 긴장감이 감돌았다. 세시안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에, 그녀는 지금 세시안의 앞에서 말을 꺼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마담 르와이얄에게 오늘 연회를 부탁한다고 전해주겠나?”

말을 꺼내기 직전까지 크리스틴과 오거스틴, 리젤로트라는 세 선택지를 치열하게 오갔지만 결국 크리스틴을 선택했다. 다른 마땅한 답이 없었다. 파혼 건만 아니라도 리젤로트에게 부탁했을 테지만 리젤로트는 연회를 모조리 빼먹고 있었고, 오거스틴은 오늘 나올지 아닐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어쩐지 흥이 식었다는 듯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예. 분부를 받들어 전하겠습니다.”

“그럼.”

다시 한 번 웃어준 뒤 계단을 올랐다. 술렁술렁 떠드는 소리만이 들릴 뿐, 따라오는 발소리는 없었다. 그는 이층에서 짧은 시간 망설였지만 그대로 사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침실 문을 열었다. 그가 마주한 것은 왼손 손목에 유리조각을 대고 있는 아내였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손이 타는 듯이 아팠다.

“전하?”

“아렐르. 놔요.”

유리조각을 쥔 손에는 힘이 빠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채근하듯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렀다.

“아렐르.”

힘이 풀리자, 세시안도 손을 놓았다. 유리조각이 잠시 손바닥에 붙어 있다가, 땅에 떨어졌다. 그는 소리로 위치를 짐작해서 그 부분을 발로 짓이겼다. 와드득 으깨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안심하지 못 해 세 번 정도 더 발을 움직이는 사이 아롈이 뒤돌아 세시안의 손을 부여잡았다.

“전하. 손이.”

아롈은 크게 휘청거렸다. 세시안은 아롈을 부축해서 의자에 앉히고는 아직 열려 있는 문을 닫고, 창가에 가서 커튼을 죄다 걷었다. 방이 다시 밝아졌다.

밝은 곳에서 보니 과연 심각해보였다. 손금에 피가 고여 붉은 잎맥처럼 보였고, 길쭉한 상처에서는 피가 작은 분수처럼 솟아올라 소매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아롈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현기증이 나는지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피는 그가 흘리고 있건만, 희고 갸름한 얼굴이 금세 창백해졌다.

​“​к​р​о​в​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몇 마디 중얼거리던 그녀는 기어이 팔걸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을 불렀다. 하녀들이 들어와 유리조각을 쓸어내고, 의사가 들어와 치료를 했다. 의사가 잘 볼 수 있도록 이르지만 샹들리에에 촛불도 올렸다.

세시안은 치료를 받는 도중 하녀들이 들으라는 듯이 농담을 섞어 상황 설명을 늘어놓았다. 물을 마시려다 잔을 떨어뜨렸는데, 아무래도 요즘 근력이 부실한 것 같아 운동이라도 해야겠다고.

손가락은 멀쩡한데 손바닥에만 유리가 박힌 이상 아무도 믿지 않을 거짓말이었다. 의사는 그의 거짓말을 지적하는 대신, 돋보기로 꼼꼼히 상처에 자잘한 유리조각이 박히지 않았는지 살폈다. 이블린의 의사는 입이 무거워야 하는 법이었다. 약을 바르고 붕대를 칭칭 감아 동여매는 동안, 아롈은 저 멀리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다 됐습니다, 세르.”

세시안은 두어 번 손가락을 굽혀보고는 쓰게 웃었다. 아주 아프다. 진통제 처방을 거부했으니 아픈 것이야 어쩔 수 없다손 쳐도, 오른손이라 당분간 펜을 잡기는 글렀다.

하지만 그 순간 뒤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내가 손목에 날카로운 것을 대고 내리찍으려 하는 순간, 호신술 따위가 기억날 리 만무했다. 찌르는 게 싫다는 생각뿐이었다.

“수고했다. 아렐르. 혹시 괜찮다면…….”

수고비 겸 입막음 조로 무언가를 집어주어야 하는데, 당장 금품을 가진 것이 없었다. 아롈이 검지에 끼고 있던 루비반지를 받아 챙긴 의사는 무릎 꿇어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다시 단둘이 되었다. 소란을 피우는 동안,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했다. 여름이라 해가 지는 것이 어지간히 늦었다.

“아렐르는 다친 곳이 없나요?”

세시안은 똑같은 질문을 세 번째 던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멈칫거렸다. 그러나 아롈은 멀뚱한 얼굴로 ‘벌써 세 번째십니다.’라고 지적하는 대신, 멍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는 아롈이 앉아있는 의자 앞에 새 의자를 끌어다놓고 앉았다. 둥그런 어깨가 미모사처럼 움츠러들었다.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보니, 손톱이 엉망진창이었다.

가슴이 찌르르 아파왔다. 격한 감정은 때로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세시안은 있는 힘껏 달린 뒤처럼 탈력했다. 하지만 그가 지쳤다고 주저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견과류를 삼키거나 목을 매거나 손목을 긋는다. 달려가 잡아야 한다.

손을 덮듯이 잡자, 아롈은 손을 빼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거두며 웃어보였다.

“차를 가져오라고 할까요? 아직 저녁 전이면 달콤한 거라도…….”

“전하.”

그가 잠시 놀랄 정도로 엄격한 목소리였다.

“생각하시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적당히 돌려서 이야기를 풀어낼 생각이었건만, 무뚝뚝한 목소리가 직설적으로 파고들었다. 세시안은 말을 삼키고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나 아롈은 더 이상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입술을 꼭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긴 속눈썹이 금빛으로 섬세하게 반짝였다.

그는 천천히 속으로 열을 셀 동안 기다리고는 물었다.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요?”

“싫습니다.”

단호한 말투에 스스로가 놀란 듯, 눈이 두어 번 깜빡였다.

“자세한 것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렐르. 심문하려는 게 아니잖아요.”

그는 고집 센 여동생을 어르듯 손등을 쓰다듬었다.

“생각하신 일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 뿐입니다. ”

손목에 유리조각을 꽂으려고 했던 것을 무엇이라고 받아들여야 할까. 자결을 시도하려고 한 게 아니면 그것으로 끝인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자해 아닌가. 자해는 그가 신경 쓰면 안 되는 일인가.

“모후께서 아렐르를 부당하게 대우하셨다는 것을 들었어요.”

사실 마담 라 세르를 네 시간 넘게 문턱에 무릎 꿇려 놓은 것은 ‘부당하다’라는 표현으로 끝낼 일이 아니었다. 이번 일은 분명히 도를 넘었다.

지금까지 그는 막연히 방심했다. 모후는 결혼 전에는 며느리의 머리를 쥐어뜯을 거라느니, 할퀼 거라느니, 때릴 거라느니 노래를 불렀지만 실제로 결혼한 뒤에는 며느리를 찾기는커녕 두문불출했다. 그는 어머니가 떠들었던 일들을 실제로 행하지 않을 만큼의 분별력은 갖췄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제로 그 루이즈 마리 때에도 육체적으로 해를 끼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가 틀렸다. 어머니에게는 실망했고, 아내에게는 미안해졌다. 세시안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모후를 대신해서 제가 사과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혹시 보르디에서 정식으로 항의를 하겠다면…….”

“전하. 이 일에 관여하셨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또한, 전하께서 참견하실 일도 아닙니다.”

그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감람석 빛깔의 시선이 비웃듯이 그의 정수리에서부터, 턱 끝까지 훑어 내리다가, 이내 카펫 무늬 어딘가로 고정되었다. 대화를 지속할 의사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금니를 꾹 물어 도드라진 턱은 보물 창고의 자물쇠만큼이나 완고했다.

세시안은 짧은 무력감을 느꼈다. 그토록 붙어 지내고, 수없이 함께 웃었어도 남은 것은 피상적인 이야기 뿐. 본질적인 신뢰는 하나도 얻지 못한 건가. ‘참견’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신부의 부족한 갈리아 어 실력을 탓하기도 힘들었다. 그 부분만은 페란토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한 무력감은 어떤 면에서는 비참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비참함은 세시안을 순식간에 유치하게 만들었다.

“지금 저는 아렐르에게 참견하고 있는 건가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다음 편은 좀 더 빨리 가지고 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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