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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9. 설익은 혹은 농익은 - (27)


 분노와 서러움이 거품처럼 끓어올랐다.

토해내면 시원할 줄 알았건만 오히려 울컥 솟아난 설움이 가슴을 꽉 메워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남편의 얼굴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하지만 아롈은 통쾌함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마법사의 혈통을 타고나 각성을 마친 소녀는 소망을 발현해버릴 수 있었다. 입술 안의 살점을 물어뜯고 잡히지 않은 손바닥에 손톱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쥐어도 감정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뿜어져 나오는 숨결까지 뜨거웠다.

코시카는 여대공이 결혼하더라도 여대공과 그 자손들의 계승권을 인정한다. 태어난 순간 부여받은 네 번째의 계승권은 첫 번째 우선순위로 올라갔다가, 미하일이 태어나는 순간 두 번째로 밀려났지만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은 없었다. 로렌이 어머니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계승권을 포기한’ 아롈을 요구하지만 않았더라면, 아롈은 평생 계승권을 잃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롈은 로렌이 어머니를 지원할 때 세시안도 분명 관여했으리라고 믿었다.

원망하지 않으려 했다. 유폐되었을 때 자살하지 않은 것도 아롈, 동생을 죽이지 않은 것도 아롈이었다. 입장을 바꾸었다면 아롈도 똑같이 세시안의 계승권을 빼앗았을 것이다. 가장 합리적인 일이었다. 그저 아롈이 잘못한 일이었다. 그렇게 끝내면 되는 일이다.

이제는 없는 계승권, 슬퍼하고 곱씹는다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저 속에 말 못할 울분만이 쌓일 뿐.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잊었다. 혹은 잊어버린 척했다. 

묻어두고 살았던 지난 삼 개월은 나름대로 좋았다. 목소리를 들으면 두근거리고, 끌어안아주면 설레서 어쩔 줄을 몰랐다. 꽃 한 송이를 받아도 화병에 꽂아두고 애지중지했다.

그냥 그걸로 좋았는데. 왜?

엘리엔 필리피느 소피 아델라이드, 아니 코시카의 옐레나 파블로브나는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앉은 세시안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손이 너무 아팠다. 어찌나 꽉 잡고 있는지 손끝에 피가 동하지 않아 손톱까지 검붉어졌다. 그러나 지금 놓으라고 한다고 들을 것 같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미안하다고 할까? 아니면 무슨 여자가 무슨 제위냐며 속으로 비웃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발을 뺄까?

“미안합니다.”

억눌린 목소리였다. 아롈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한참동안이나 침통한 표정으로 할 말을 찾던 사람이 꺼낸 말치고는 놀랄 정도로 정석적이었다.

“저는 분명 그만 하시라고 했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래서, 무얼 하실 수 있습니까?”

“미안합니다.”

사과를 들으니 더 화가 났다. 애원하지 않았나. 무릎만 꿇지 않았지, 길바닥 거지만도 못하게 자존심을 던졌다. 제발 그만하라고. 눈물이 쏟아져 감추려고 고개를 숙였건만 뜬금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버리는 바람에 전부 들켰다. 겨우 이깟 일로 눈물을 보인 것이 못내 치욕스러웠다.

하찮게 느껴져서 화가 났다고? 아니, 틀렸다. 하찮은 것은 세시안이 아닌 아롈이었다. 

그 누구도 아롈에게 며칠씩 밤을 새서 공부를 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페란토를 모국어나 다름없이 구사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아이를 낳는 도구, 세르의 옆을 장식하는 예쁜 장식품, 황후의 방 앞에 몇 시간이나 이유 없이 무릎 꿇려 놓아도 되는 화풀이 인형. 그게 지금의 아롈이었다. 그리고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그 자신의 대회의였더라도 그렇게 말했을까. 결국 아롈의 일은 부가적인 것으로, 하든 하지 않든 별 상관없다는 뜻이다.

“다른 말은 모르십니까?”

“고마워요. 얘기해주어서.”

힘이 빠졌다. 아롈은 더 이상 서 있을 자신이 없어서 의자에 주저앉았다. 치마가 바스락거렸다. 손톱에 건조한 입술이 닿았다. 뿌리칠 힘도 없었다. 세시안이 손을 놓아주자 손이 툭 떨어져 무릎에 걸렸다. 

남편은 아롈의 손끝에 입 맞춘 뒤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숙이고 아롈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제가 자리를 피해줄까요?”

왜, 당신은. 

아롈은 입술을 꾹 물었다. 피비린내가 혀끝에 닿았다. 세시안은 잠시 기다리다가 아롈의 이마에 입을 맞추려고 했다. 어깨를 움츠리자 입술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쉬어요.”

“기다리십시오.”

반쯤 돌아선 발이 멈추었다. 

“더 할 이야기가 있나요?”

“예.”

아롈은 치마를 쥐었다. 손바닥이 아팠다. 물어뜯는 동안 살아남은 검지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차마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저도 어제의 그 맹세, 지금 쓰겠습니다.”

왜 계속 건드릴까. 세상에는 묻어놓고 꺼내지 않는 게 좋은 일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부부, 배우자, 신의 앞에서 신의를 맹세한 반려자라고 해도 몰라도 좋은 일이 있지 않은가. 상대의 아픈 과거나 수치스러운 현재를 일일이 들추어 알알이 꿰고 있어봐야 알량한 호기심을 충족하는 것 말고 대체 무슨 이득이 있지?

심지어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말을 해주어 고맙다는 말에 아롈은 그 불균형을 명확하게 깨달다. 아롈은 지금 비참해서 견딜 수 없는데 세시안은 고작 미안한 기색뿐이었다. 약간의 죄책감이 그가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의 전부일 터였다. 계승권은 아롈이 잃은 모든 것이었다.

평생 쌓아온 공부와, 평생을 목표로 했던 것, 알렉산드르를 다시 데려오겠다는 희망, 그 모든 게 산산이 부서지고 아롈은 이곳에 있는데, 손에 아무것도 쥔 것 없이 있는데, 그는 평생 동안 자라온 곳에서 아무 것도 잃거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서 아롈을 추궁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알고 싶은 게 무엇인가요?”

가장 끔찍한 것은 그가 베푸는 다정함이었다. 아롈은 그의 앞에서 목줄 맨 개새끼나 다름없었다. 예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지만 그 안에 연정은 없는 것을 안다. 아롈은 그의 가벼운 다정함만으로도 사랑에 빠졌다. 그 시혜적인 다정함이 언제 변할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권력 관계는 명확했다. 그렇다고 거부하기도 힘들었다.

배우자. 신뢰. 그래. 좋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비슷해져야 하지 않아? 아롈에게서는 이런 저런 것을 다 캐내려고 하면서, 정작 세시안은 그 자신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 하루 일상이나 잡담을 그가 주도한다고 해서 ‘그 자신에 대해서’ 아롈에게 알리는 것은 아니었다.

상처주고 싶었다. 방금 전의 말은 부족했다. 겨우 약간의 죄책감, 미안함, 안타까움. 충분할까보냐. 가슴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아롈을 겁박한 것을 눈물 흘리며 후회하게 해주고 싶었다. 완벽하게는 불가능할지라도, 최소한 비슷하게는.

지금껏 쌓인 분노가 모두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로 흘렀다. 명백히 부당한 부분이 있었으나, 사람의 분노는 원래 이성과는 사이가 좋지 않은 법이다.

“아렐르?”

불행히도, 아롈은 그를 상처 입힐 말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명석하고 직관이 강했다. 기억 한 구석에서 건져 올린 재료를 검토하고는, 마음의 대장간에서 날카롭게 벼려 담금질했다. 표현 하나까지 가슴에 박혀 찢어지도록. 

충분히 뜸을 들였다. 아까 애원하며 말을 잇지 못하던 것과 달리, 이번에 들이는 침묵은 의도적이었다. 보르디의 가언 아닌가. 술이 익으려면 기다려야 한다.

마침내 침묵을 견디지 못한 그가 먼저 질문을 하려고 했다. 아롈은 그의 말을 잘랐다.

“대체 무슨 말을…….”

“자살한 여자 말입니다,”

아롈은 그의 눈에 박히고 싶다고 생각하며 또박또박 물었다.

“대체 어떻게 죽었습니까?”

그가 흔들렸다. 진심으로 당황할 때에는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세시안이 보여주는 반응은 아까의 무거운 죄책감이나 짙게 드리운 미안함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였다.

그의 반응이 이미 아롈의 추측이 사실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생각해보면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그 날, 몇 달 전 아롈이 창가에 앉아있던 그 날, 그의 반응은 너무나도 이상했으므로. 멍청한 옐레나 파블로브나만이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입을 다물고 계셔도, 저는 질문을 철회하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이 멍청한 맹세를 제안한 것은 당신이다. 빌미를 잡혀 공격당할 일이 없을 줄 알았나? 하긴, 미셸, 필리프, 이본느, 소피를 통틀어 아무도 자살한 여자에 대해 입에 올린 적은 없었다. ​정​부​(​情​婦​)​였​을​까​?​ 아니면 십대 시절에 열정을 불태우던 연인? 

아롈은 처음으로 여유에 금이 간 남편의 맨얼굴을 마주하며 그를 최대한 따라 생긋, 웃어보였다. 하지만 도저히 눈까지 진심으로 웃을 수는 없었다. 추측이 확신이 되는 순간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물에 빠져도 이것보다는 숨을 쉬기 쉬울 것 같았다. 

그 날, 세시안이 계단을 뛰어올라오던 그 날은 아롈이 처음으로 연정을 자각하던 날이었다. 이상한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그저 떨어질까 봐 걱정한 것이라고. 그만큼 다정하구나 생각했다. 어쩜 그렇게 멍청했을까.

상처를 담아 독하게 빈정거렸다. 

“아니면 문장이 들어간 물건들, 새로 ​주​문​하​시​겠​습​니​까​?​”​

사슴뿔을 걸지 않았던가. 그의 지위인 세르(cerf)는 수사슴이라는 뜻이었고, 그의 문장에는 발루아 가문의 푸른 장미와 오를레앙의 사자, 장자를 의미하는 몇 가지 상징과 함께 사슴뿔이 들어갔다. 

그 순간 세시안이 처음으로 아롈의 눈을 피했다. 아롈은 따라가서 무릎을 꿇고 그의 얼굴을 감상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다만 묘하게 일그러지는 입매만을 뚫어지게 관찰했다. 항상 은은하게 웃고 있던 그의 입이야말로 남편의 인상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갑자기 세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뚜벅뚜벅 문으로 걸어가서 문고리를 잡았다.

“도망치시는 겁니까?”

“제가 죽였어요.”

“예?”

“다 제가 잘못한 일이에요.”

문이 열렸다. 복도가 어렴풋하게 보이고, 세시안은 뒤돌아보려했다. 단정한 턱선이 언뜻 드러났다. 그러나 그는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만족스럽지 않은 대답이었다면, 문장을 바꾸는 것은 아렐르가 마음대로 하도록 해요.”

쉬어요.

그가 문을 닫고 나갔다. 잘 만든 문은 소리 없이 닫혔는데도 가슴을 얻어맞은 듯했다.

“뭐야.”

홀로 남아 그저 얼떨떨했다.

“대체…….”

목이 아팠다. 사실 목뿐만 아니라 온몸이 다 아팠다. 몸이 아픔을 어떻게든 내보내보려는 듯, 눈물이 솟았다. 손등으로 훔쳤다. 다시 솟았다. 서너 번 반복하다가 포기하기로 했다. 

풍부한 눈물이 뺨을 흠뻑 적시고 흘러내려 턱에 맺혔다. 

“뭐냐고.”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조금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는데 고치려면 또 해를 넘길 것 같아서 그냥 올립니다. 요즘 오랜만에 글을 계속 쓰다보니 부족한 부분이 많이 눈에 띄네요. 너그럽게 봐주세요.
P.S.2. 금요일에는 제가 일이 있어서 글을 못 쓸 것 같아요. 내일 새 편이 올라오지 않으면 일러도 일요일에나 다음 편이 올라올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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