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설익은 혹은 농익은 - (28)
로렌의 마담 르와이얄, 크리스틴 엘리자베트는 연회의 여주인으로서 훌륭하게 소임을 해내고 있었다. 황후는 참석하지 않았으나, 아버지인 황제가 참석했다. 부녀는 원래 연회의 주인 노릇을 해야 할 부부를 대신하여 첫 춤을 추었다. 루이 오귀스트 황제는 건강이 나빠진 뒤로 연회에 참석하는 일이 드물었으므로, 더욱 많은 주목을 받았다.
춤을 춘 뒤에는 그녀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일이 벌어졌다. 연회에 참석한 손님들 사이에 사소한 실랑이가 인 것이다. 크리스틴은 웃는 얼굴로 짜증을 내는 사촌 여동생을 말렸다. 루이 오귀스트 황제의 남동생의 딸인 그녀는 칼레 대공가로 시집가서 지금 임신 중이었다. 예민해진 그녀를 임신부가 흥분하면 좋지 않다며 부드럽게 달래 휴게실로 이끌고 돌아오자 연회에 참석한 시녀들이 목소리를 높여 그녀를 칭찬했다.
등골이 짜릿했다.
요즘 크리스틴은 나날이 인생이 행복하기만 했다. 얼굴 전체를 다닥다닥 덮고 있던 자국은 이제 화장을 조금 짙게 하면 감쪽같아 보일 정도로 나아졌다. 이를 악물고 식사량을 조절하자 살이 빠져 제법 옷태가 돌아왔다.
그녀는 이블린에서 세 번째로 지위 높은 여자였고, 사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가장 지위 높은 여자였다. 어머니인 마르그리트 안 황후는 원래 사교 활동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올케 되는 마담 라 세르, 엘리엔 필리피느 소피 아델라이드 역시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자주 앓아눕는데다, 모처럼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어도 금세 지쳐서는 쉬러 갔다.
크리스틴 아래 지위에 있는 숙녀들도 지금 사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마담 오거스틴은 항상 건강이 안 좋았고, 마담 미네트는 황후의 옆을 지키는 데에만 열중했다. 크리스틴이 없을 때 적극적으로 이블린의 안주인 노릇을 한 것은 리젤로트였지만, 그녀는 파혼으로 인한 스캔들 때문에 반 칩거 중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달랐다. 건강에도 문제가 없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았다. 적극적으로 하루도 쉬지 않고 연회에 나서며 세력을 꾸준히 불려나갔다. 크리스틴은 황제의 장녀였고, 수도원에서 돌아오면서 상당한 액수의 연금을 배정받았다. 사람을 쉽게 모으는 방법은 돈이다.
이블린에 살고 있는 이들이 모두 돈에 풍족한 가문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굉장한 무리를 하고 있는 집안의 딸들이 여럿 있었다. 이블린에서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액수의 돈이 흩뿌리듯 소모된다. 새로운 가운을 사기 위해서는 빚을 져야 하는 집안의 딸들은 인심 좋은 크리스틴의 곁에 순식간에 모여들어 지지배배 달콤한 말들을 흘려 넣었다.
서로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크리스틴은 그녀에게 몇 푼 안 하는 옷과 보석으로 흡족해졌고, 추종자들은 경쟁하듯 아부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액수의 장신구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사실 발바닥을 핥을 듯이 아부를 해대는 것은 여자들만이 아니었다. 크리스틴은 나이가 많아 혼인 적령기가 지났지만, 대공가의 방계가 되는 둘째나 셋째, 혹은 여섯째 아들일 경우 여자의 나이보다는 지위와 돈이 더 중요했다.
현재 크리스틴이 시집갈만한 대공비 자리는 남아있지 않았다. 부르고뉴 대공비 자리는 오거스틴이 차지했고, 오를레앙의 미셸은 리젤로트와 파혼한 뒤 보르디의 소피와 약혼했다. 보르디의 차차기 후계자인 아를랭 공작, 나바르와 칼레의 후계자는 유부남이며 오베르뉴의 후계자는 십대 소년이었다.
그녀가 외국으로 시집가지 않는 한, 크리스틴은 대공가의 방계와 결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대공가의 방계인 미혼 공작은 줄잡아 스무 명도 넘는다. 그들에게 대단한 지위와 많은 지참금을 가진 크리스틴은 더할 나위 없는 신붓감이었다.
크리스틴은 춤을 청해오는 상대를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물건을 고르는 위치를 한껏 즐겼다. 세시안의 생각보다 크리스틴은 훨씬 잘 해나가고 있었다. 그녀 본인의 지위에 더해 시운(時運)도 따랐으므로.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충족감, 그리고 만족감이 저도 모르게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켰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마법사의 갈망은 마법을 생산한다. 얼굴이 곰보가 되었을 때, 아롈과 마주쳤을 때, 크리스틴은 타오르듯 ‘멀쩡한 얼굴’과 ‘원래의 지위’를 원했다. 그녀의 갈망은 마법을 쓰지 않는 마법사와 계약하여 굶주린 상태였던 푸른 용에게 더없이 유혹적이었다.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고 억누르는 데에 익숙해서 마법이 거의 새어나오지 않는 아롈에 비해서 크리스틴은 저녁 만찬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얼굴이 치유되고, 원래의 지위를 되찾은 것만으로도 크리스틴이 생산하는 마법의 양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릴레벨트는 조급해졌다. 크리스틴은 가끔 나타나 자신에게 얼굴을 고치는 약-소금물-을 주곤 하던 신기한 마녀가 결혼식 이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고 사라진 것을 의아하게 여겼지만 금세 잊어버렸다.
그 조급해진 용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크리스틴은 완벽하게 책임이 없는 상태로 반사이익을 보았다.
“마담 르와이얄, 태양 같은 아름다움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지라 차마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만 감히 청하자면…….”
크리스틴은 부끄러운 미사여구를 쉴 새 없이 늘어놓는 남자의 손을 잡고 또 춤을 추었다. 이번 남자는 제법 잘생겼다. 외국인인 듯한데 지위가 어떨까? 결혼할 수 있는 지위일까?
로렌에서는 귀천상혼일 경우 계승권을 박탈한다는 명시적 조항이 없었으나, 지금껏 발루아 가문의 딸이 통치 가문이 아닌 곳의 아들과 낙혼(落婚)한 예는 존재하지 않았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고, 춤 대신 부드러운 음악을 배경음 삼아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는 분위기가 될 때 즈음이었다.
“어머나, 나오셨네요?”
크리스틴의 앞에서 어떤 대상을 향해 말을 높였다는 것은, 그 대상이 크리스틴보다 지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이 아픈 것도 참고 거울의 홀에 내내 서서 웃고 있던 크리스틴은 그 말을 듣고 홀의 입구를 쳐다보았다.
연회장의 빛을 모조리 흡수해서 뿜어내는 듯 아름다운 소녀가 시녀 두엇을 거느리고 크리스틴에게 걸어왔다.
그녀가 크리스틴에게로 똑바로 걸어서 다가왔으므로, 크리스틴의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황제가 곤하다며 휴게실로 자리를 비운 지금, 이 자리에 마담 라 세르보다 지위 높은 사람은 없었다.
“크리스틴.”
“어머나, 아렐르. 안녕하세요. 오늘은 못 뵐 줄 알았는데 뵙게 되어 기뻐요.”
“어제에 이어 빈자리를 채워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본의 아니게 무거운 일을 떠맡기는 셈이 되어 민망합니다.”
“오라버니께서 부탁하셨답니다. 전에 말씀하셨듯 시집 와 발루아의 딸이나 다름없게 되셨으니, 제게는 친자매나 다름없는 분이지요. 가족끼리 돕는 일인데 이런 가벼운 일이 무어 대수겠어요.”
가는 손목에는 마르그리트 안 황후의 얼굴이 새겨진 카메오가 여전히 묶여 있었다.
소녀는 입술로 웃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연지 바른 입술이 곡선을 그리기 전 잠시 바르르 떠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군요.”
“설마 모르시고 나온 건가요? 이걸 어째요. 오라버니께서 편히 쉬시라고 말씀을 안 전하셨나보네요. 제가 전갈을 보냈어야 하는 건데 아픈 분을 헛걸음하시게 두었네요.”
보란 듯이 시녀를 꾸중하려는데, 빠르게 말이 가로막혔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소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덧붙였다.
“저는 자매가 없이 자라 친자매나 다름없다는 크리스틴의 말에 감동한 것뿐입니다.”
“사촌도 없으세요?”
“아버지 쪽 피를 이어받은 사촌은 전부 남자뿐입니다. 로렌에는 이본느가 있으니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부럽네요. 어여쁨 받으셨겠어요. 남자 많은 집안의 외동딸은 언제나 사랑을 독차지하는 법 아닌가요. 저는 여자 많은 집안에서 자라서 언제나 그런 집 딸이 부러웠답니다. 안 그런가요?”
동의를 구하듯 주변을 둘러보자 다들 저희 나름대로 크리스틴의 말에 동조하며 웅성거렸다. 눈부시게 예쁜 얼굴은 여전히 싸늘하게 웃는 그대로였다.
“그렇다고 해두지요. 크리스틴. 늦게나마 제 할 일을 하려고 합니다. 어제와 오늘, 힘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리스틴은 생긋 웃었다. 이제 와서 다시 빼앗으려고 하다니. 웃기지도 않았다.
“편찮으시다고 들었는데요. 하루 정도는 더 쉬시는 게 어떨까요? 오늘이 마지막 날도 아닌걸요.”
방금 전 대화에 끼는 것을 허락했으므로, 주변에 있던 신사 숙녀들이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어린 마담 라 세르는 주변에 사람이 많은 것을 피곤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떠들기 시작하자 뽀얗고 흰 얼굴에 금세 핏기가 가셨다.
“걱정해주시는 것은 감사해 마지않으나, 아프지 않습니다. 설령 아프다 한들 제 소임을 이틀이나 팽개치고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아렐르. 아직 어리신 분이면서 건강을 소홀히 하시면 안 되죠. 안 그래도 연약하신 분께서. 괜찮다고 하시지만 어제도 앓아누, 누우셨잖아요?”
젠장. 크리스틴은 경고하듯 혀끝을 살짝 깨물었다. 거의 고쳐졌다 싶었는데 아주 가끔 말을 더듬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어디 이름 있는 병만 병인가요? 심신이 고단한 것도 병이랍니다.”
황후가 불러다가 몇 시간을 꿇어앉혔다고 들었다. 그것을 슬쩍 암시했는데도, 갸름한 얼굴에 꽉 찬 이목구비는 여전히 흠 없이 고상하기만 했다.
얄미울 정도로 예뻤다. 열 살은 넘게 어린 여자아이에게 질투하는 것도 꼴이 우스우나 그 미모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금은 평소에 하지 않던, 머리를 반만 말아 올리고 나머지는 늘어뜨린 머리 모양을 하여 금발이 마치 후광처럼 보였다. 단장할 시간이 부족해서 옷도 장신구도 허술한데도 얼굴 때문에 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이야말로 건강이 아니겠느냐. 아직 어린 몸으로 무리하였다가 앞으로 고생하면 어쩌겠느냐.”
중후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황제였다. 크리스틴을 위시한 이블린의 귀족들은 아까 인사를 하였으므로 허리를 숙였고, 아롈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려 했다.
“폐하.”
“꿇지 말아라. 어제 앓았다고 하지 않았느냐.”
“송구합니다.”
“오늘은 크리스에게 맡기거라.”
“폐하, 지금부터라도 제가 할 수 있습니다.”
황제는 자못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짐이 모르겠느냐. 네 그간 힘들게 공을 들였음을 내 다 아느니, 굳이 공을 다투지 않고 하루나 이틀쯤 시누이를 믿고 일을 맡겨도 큰일 나지 않는다. 오늘 무리하다가 정작 마지막 날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원통하지 않겠느냐.”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걱정이 되고 답답하여 다급히 나왔을 뿐입니다. 폐하께서 명령하시니 따르겠습니다.”
“명령이 아니라 걱정이다. 황후가 오랜 병환 중이라 내 심려가 크구나. 네가 아프면 네 남편이 얼마나 상심하겠느냐.”
황제는 보지 못한 듯 했으나, 크리스틴은 아롈보다 훨씬 키가 작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표정이 언뜻 보였다. 크게 벌어진 상처 같아서 깜짝 놀랐다.
“답답하면 나가 산책이라도 하는 것이 어떠하냐. 아니면 후원을 돌아보게 마차라도 내어주랴?”
“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크리스틴은 아버지가 결국 자신의 편을 들어준 것이 뛸 듯이 기뻤다. 황제는 곧바로 공식 정부의 부축을 받아 정의관의 침실로 돌아갔다.
아롈은 황제를 배웅하여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일어났다. 표정은 칼로 벤 수면처럼 금세 잠잠해졌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크리스틴.”
“예, 아렐르. 방으로 돌아가시나요?”
“아뇨. 잠시 둘러보려 합니다. 설마 쫓아내지는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그럴 리가요, 운운하는 예의 차린 말이 몇 마디 오간 뒤 로렌의 마담 라 세르는 총총히 휴게실 쪽으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크리스틴의 근처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흩어지고는 새 사람들로 물갈이 되기 시작했다. 황제께서 마담 르와이얄에 거는 기대가 크시다는 둥, 역시 어린 외국인 여자는 못 믿으시겠지요 운운하는 아부 사이로 크리스틴의 시녀 하나가 살짝 기척을 냈다.
크리스틴은 잠시 발을 쉬겠다는 핑계로 시녀들을 거느리고 복도 구석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니?”
“마담 르와이얄. 보셨어요?”
“무얼 말이냐?”
“마담 라 세르께서 세르와 싸우신 것 같던데요.”
“정말?”
“그럼요.”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장담했다.
“왼손 약지에 약혼반지가 없었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