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설익은 혹은 농익은 - (29)
앤 폰 레르헨펠트는 긴 금발을 따라 걸었다. 엉덩이를 넘겨 흐르는 곧은 머리카락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아롈은 휴게실을 배회하며 적당히 끼어들 곳을 찾아 기웃거렸다. 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앤의 주인은 지극히 인간관계가 비좁은 축에 속했다. 인사를 하는 이들에게는 일일이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척을 했으나, 이름을 아는 것과 친한 것은 다른 문제였다.
아롈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 곤하시다면 이만 들어가는 게 어떠하신지.”
“네가 입 댈 일이 아니다.”
그간 다소 말랑해졌던 일이 꿈인 듯 싸늘한 어조였다. 아롈은 방에서부터 내내 기분이 저조한 채였다. 이럴 때 입을 잘못 놀리면 경을 친다는 것을 아는 앤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방금 경을 친 참이었다.
앤이 부름에 응해 침실에 들어갔을 때 아롈의 얼굴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흰 얼굴은 펑펑 울어 코끝부터 눈가까지 온통 분홍빛인데다 입술은 짓씹어놓아 피가 맺혔다. 단장을 도우라는 말에 앤은 기겁해서 아롈을 말렸지만 들을 리가 없었다. 그럼 다른 시녀라도 좀 부르시는 것이 어떠하냐 말을 꺼냈다가 그대로 쫓겨나는 줄 알았다.
앤이 벼락같은 꾸중을 듣고 동동거리는데, 불쑥 뒤에서 웬 사람이 나타났다. 홍채가 드물게도 호박색이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애매한 중성적인 얼굴에 키가 아주 컸다. 검푸른 색의 긴 머리카락을 가죽끈으로 묶고 있었다. 아롈은 눈썹을 찌푸렸다.
-분명 다 떨어졌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가 방금 다시 채웠잖아.
-게다가 그 모습은 뭐냐.
-글쎄. 기분 전환?
-역겨운 것.
-그 역겨운 것의 도움이 필요해 보여서.
구슬처럼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벨타였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조금 낮았다. 벨타님은 사람 형상도 할 수 있었구나. 앤이 감탄하는 동안 벨타가 아롈의 얼굴에 휙 입김을 불었다. 빠르게 손으로 가렸지만 이미 입김이 아롈의 얼굴에 달라붙은 뒤였다. 어여쁜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해졌다.
-너!
-왜? 다시 널 찌르기라도 하려고? 다시 해봐. 이번엔 말릴 사람도 없을 테니.
아롈이 손을 들어 벨타의 뺨을 갈기려고 했다. 벨타가 그 손목을 잡아 내려놓았다.
벨타가 아롈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아롈도 여자치고는 큰 편이지만 벨타는 그런 아롈보다 훨씬 컸다. 아롈은 당장 벨타를 찢어죽일 듯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둘 사이에 기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팽팽한 실을 먼저 잡아당긴 것은 벨타였다.
-그냥 모른 척 하지 그래. 고맙다는 말을 바라는 것도 아닌데. 응?
-…….
-억울하면 지금이라도 칼 가져다줄까?
-됐으니 당장 꺼져라. 그리고 다시는 내 몸에 손대지 마.
벨타가 깔깔 웃다가 다시 보석으로 돌아왔다. 앤이 소중하게 벨타를 집어 드는 동안 아롈은 입술을 깨물다가, 다른 시녀들을 부르라고 했다. 네 명이 달라붙어 열심히 꾸몄지만 결과물은 영 허술했다.
아롈은 적당한 곳이 없자 몸을 돌렸다. 어두운 장밋빛 옷자락이 바스락거렸다. 한동안 연둣빛이며 하늘색, 분홍색 같이 밝고 화사한 색의 옷에 앙증맞은 장신구를 고집하더니만, 오늘은 어두운 붉은 옷을 골랐다. 묵직한 토파즈 귀걸이를 달아 나이보다 훨씬 차분하고 고상해보였다. 그간의 소녀다운 옷차림과는 영 딴판이었다.
갈 곳을 찾지 못한 아롈은 평화의 홀에 들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아롈은 의자에 앉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주먹을 꼭 쥐고 숨을 내쉬더니 평화의 홀에서 뛰쳐나갔다. 차라도 내올까 생각하고 있던 앤이 놀랄 정도로 격렬한 반응이었다.
아롈의 기행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평화의 홀에서 나오자마자 정원으로 나갔다. 분수대 앞에 잠시 서서는 이블린 본관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나오자 아롈은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도서관 쪽으로 가다가, 발길을 돌렸다.
앤은 도무지 경로를 종잡을 수 없었다. 아롈은 이블린 본관에서 한없이 멀어졌다. 이블린 본관 근처 도보 십 분 거리에는 다른 건물이 없었다. 그녀는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등불을 들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사위가 어둡기만 했다.
아롈은 적당한 곳에 멈추어 서더니 이블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앤은 그런 아롈의 뒤에 서서 그녀의 명령을 기다렸다.
“앤.”
“예, 예, 전하.”
아롈은 이름을 불러놓고는 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너, 네 조모와는 연락할 방법이 있느냐?”
앤은 앞서 있는 아롈이 보지 못할 것임에도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로 바꾸어 대답했다.
“예. 있사옵니다.”
“얼마나 걸리느냐?”
“모르겠사옵니다. 조모님께서는 자주 작센을 떠나 돌아다니시는지라 소녀로서는 지금 어디에 계신 지 알 길이 없나이다. 다만 빌헬미네 왕비 폐하께 서신을 넣으면 폐하께서 전해주시는 호의를 베푸시리라 기대할 따름이옵니다.”
“모른다? 그렇구나.”
왜 할머니를 부르려는 걸까? 앤은 덜컥 겁이 났다.
아롈을 모시는 동안 그녀는 앤의 조모에 대해서 말을 꺼낸 일이 없었다. 혹시 처신을 잘못했다는 것이 아롈의 귀에 들어간 걸까? 마담 라 세르의 수석 시녀가 칠칠치 못하게 이상한 약이 든 음료를 마시고 사내 셋과 한꺼번에 잠자리를 했다고?
아롈은 남녀 관계에 있어서는 지극히 원칙적이고 결벽한 태도를 고수했다. 황제의 공식 정부를 경멸했고, 혹시라도 고급 창녀가 눈에 띄면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주변에 무슨 일이 있든 신경 쓰지 말고, 삼 년만 책임지고 맡아라. 그 후에는 내가 직접 좋은 혼처를 알아봐주겠다.
그 경고는 앤에게 다른 남자에게 신경 쓰느라 벨타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앤이 저지른 실수는 앤뿐만 아니라 아롈에게도 치명적일 수 있었다.
앤은 별 일 없으리라 자신을 위안하고 치워두었던 문제가 바로 코앞에 닥쳤을까봐 두려웠다. 목소리가 떨렸다.
“전하. 소녀가 무언가 미편하게 해드린 점이 있다면…….”
“그런 것 없다.”
뱀 아가리에 물린 듯 조마조마하던 심정이 단숨에 풀렸다. 앤은 아롈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벙싯 웃음을 머금었다.
“다만, 나는 네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상기한 것뿐이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벌써 잊어버렸느냐? 암컷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건만 알고 보니 암컷인지 수컷인지도 명확하지 않은 짐승 새끼 때문에, 내가 너를 떠맡기로 하지 않았느냐.”
벨타가 불만스레 앤의 손목에서 두어 번 빛을 뿜었다. 벨타는 앤과 약속을 했다. 방 바깥에서는 목소리를 내지 않기로. 벨타는 제법 충실히 앤과의 약속을 이행하고 있었다. 아롈은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더니 이죽거리듯 말을 이었다.
“다른 시녀들은 벌써 결혼하였거나 부모가 있다. 하다못해 신변을 의탁할 친척이라도 있건만 넌 아니잖으냐. 내가 없으면 누가 너를 거두어주겠느냐. 아니, 하다못해 작센으로 똑바로 가는지 확인이라도 해줄 사람이 있겠느냐?”
여자 혼자 호위도 없이 다른 나라로 보낼 수도 없는 일인데, 네 조모가 언제 올 줄 알고. 아롈은 북쪽 캬트 어로 조그마하게 불만을 웅얼거렸다.
“앤, 항상 몸조심 하거라.”
“명심하겠사옵니다.”
“특히 남자를 조심하거라.”
죄책감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네 지참금이 백작위(位)라는 소문이 퍼지면 그깟 백작 작위 하나 없는 남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 게 뻔하다. 그 중에 변변한 놈이 있을 성 싶으냐.”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그 변변찮은 놈들 사이에서 들떴던 앤은 고개를 푹 숙였다.
“꼴같잖은 놈들이 폭력을 휘두르며 결혼하자 겁박할 수도 있겠지. 심하게는 겁탈하려는 쓰레기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롈은 언뜻 아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그런 놈들로부터 너를 지켜주려면, 내가 있어야 하겠지?”
풀벌레조차 울지 않는 무더운 밤이었다. 앤은 그 물음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감히 여기에서 예, 라고 해도 되는 걸까. 설핏 목소리가 갈라졌으나 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그리 당당하지 못했다.
신의 앞에서, 그리고 모시는 주인의 앞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보호를 요청할 입장이 못 되었다. 오히려 위험 한가운데에 부나방처럼 뛰어들었다. 한없이 들떴던 그녀의 부주의함을 스스로 책하기도 전에 아롈이 소리 내어 웃었다.
“무얼 대답을 망설이느냐. 내가 네 주인이니 당연한 일이 아니냐.”
“망극하옵니다.”
“그러니 사사건건 신중하거라. 알겠느냐.”
삼 년. 신뢰. 벨타.
앤이 채 대화를 전부 곱씹기도 전에, 아롈은 갑자기 잔소리로 주제를 바꾸었다. 아롈은 끝도 없이 불만을 늘어놓았다. 주제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로렌 날씨는 너무 덥다는 것에서부터, 머리를 오랜만에 내리고 밖에 나오니 목덜미에 땀이 맺혀 불편하다는 말을 거쳐, 손수건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느냐며 벌컥 짜증을 냈다. 아롈의 이야기는 별자리가 천공을 지나 서녁으로 저물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