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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9. 설익은 혹은 농익은 - (30)


     

도망쳐 나온 세시안은 갈 곳을 찾아 방황했다. 정의관 침실로 돌아갈까 하니 무슨 구설이 날까 두렵고, 거울의 홀에 내려가자니 질문의 폭격을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사람이 없는 정의관 휴게실이 마땅하다 싶었으나 거기까지 가는 경로가 문제였다. 자비관에서 정의관으로 가려면 거울의 홀을 거치든 정문을 통해 빠져나가야 한다. 두 경로 모두 사람이 버글거릴 테고, 그의 손을 보면 왜 이렇게 되었는지 꼬치꼬치 캐묻겠지. 그리고 아내가 옆에 없는 것을 보면 다들 수군거릴 것이다.

싸운 게 아닐까 하고.

그는 쓰게 웃었다. 그는 이블린 소문의 생리에 대해서는 정통했다. 아내가 찌른 것이 아닐까 누가 말을 던지면 순식간에 마담 라 세르가 세르의 손을 찔러버렸다는 식으로 와전될 것이다. 그 다음은 목이 아닐까 소곤거리고, 입을 가리며 까르르 웃겠지.

부풀리기 식 소문은 이블린에서는 일종의 여가활동이나 사교생활이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사람은 없다. 그저 맞으면 재미있게 떠들면 그만, 틀리면 ‘아니었네’하고 눈을 한 번 동그랗게 뜨면 그만.

그는 그런 생리에는 익숙하다 못해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손만 멀쩡했더라면 적당히 내려가 수습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 그의 오른손은 붕대로 둘둘 감아놓아 누가 봐도 다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걱정하는 양 욕하는 말을 듣기 싫었고, 그 때문에 아롈이 욕을 먹는 것도 싫었다. 어차피 밝혀질 일이라지만 하루나 이틀 정도는 피하고 싶었다.

그는 결국 대계단이 아닌 복도 구석으로 향했다. 몇 번째였더라. 일곱 번째? 여섯 번째? 벽을 유심히 살피자 네모난 틈이 보였다. 그는 그 틈새에 손을 넣고 당겨서 열었다. 좁고 어두운 계단이 나타났다.

‘황실의 위기에 대비한 비밀 통로’ 따위의 거창한 장소는 아니다. 이블린은 넓었고, 본관은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이블린 본관에서부터 바깥까지 나가는 지하 통로를 뚫을 기술력은 없었다. 사람이 드나드는 대계단이나 소계단 이용 허가가 없는 고용인들이 오갈 때 사용하는 곳이었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다가 빗자루를 가지고 올라오던 하녀들과 마주쳤다. 사람이 내려오는 것도 모르고 잡담을 입에 담던 그녀들은 세시안을 보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무릎을 꿇지 않은 것은 그가 세르인 것을 모르기 때문이겠지. 대회의에서 돌아와 옷을 갈아입지 못했으므로 차림이 수수했다.

그는 그녀들을 무시하고 계속 계단을 내려갔다.

네 층의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참 수많은 하녀들을 만났으나 그가 세르인 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지위를 내세워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으면 의기소침해지는 치기 어린 나이는 이미 지난 지 오래였으므로, 세시안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정의관의 통로라면 계단 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지만, 자비관의 통로를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소년 시절, 지긋지긋한 선생을 따돌리는 데에는 이만한 곳이 없었다.

그는 일 층으로 통하는 문을 지나 지하실로 내려갔다. 가문의 경영을 배우는 부인들이나, 가문의 장녀로서 가문의 성을 건사하기 시작하지 않는 이상, 고용인의 일에 관심이 없는 많은 신사 숙녀들은 지하실의 존재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다니는 대계단과 소계단은 아예 지하로 통하지 않았다.

지하에는 거대한 부엌이 있었다. 당연하다. 이블린 본관 근처에는 도보 십 분 거리 이내에는 건물이 없다. 다섯 층짜리 건물 두 개에 꽉 찬 사람들의 식사를 건물 바깥 부엌에서 공수하려면 식사 시간마다 음식을 나르는 하인 하녀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야 할 터였다.

세시안은 부엌 가장자리를 돌아 움직였다. 자비관과 정의관 지하는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다시 정의관 계단을 이용하면 무사히 정의관으로 빠져나가든, 본관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정의관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들어가려다 내려오는 사람과 마주쳤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세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너야말로.”

고용인들을 위한 초라한 계단에 어울리지 않는 미남은 세시안의 둘도 없는 소중한 친우이자 사촌이었다. 오를레앙의 쟝 미셸 루이 프랑수아는 잘생긴 얼굴에 잘 어울리는 말끔한 차림이었다. 어깨까지 단정하게 기른 금갈색 머리카락과 붉은 비단이 맞춘 듯 어울렸다. 따뜻한 상아색 크라바트에 오를레앙 대공의 얼굴을 새긴 노란색 사파이어로 색조를 맞추어 세련되어 보였다.

미셸은 질문에 곤란한 듯 뒷짐을 졌다.

“나야, 뭐.”

“리즈?”

“…….”

“저번에 내게 들킨 뒤로 여기로 다니는 거야?”

“응.”

“부정이라도 좀 해보지 그래.”

“거짓말 하면 믿어줄 것도 아니잖아.”

“리즈를 정부로 만들 셈이야?”

날카로운 말에 미셸은 놀란 듯 눈썹을 위로 올렸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약혼한 남자가 미혼인 여동생을 몰래 만나고 다닐 때 그 오라비로서 무슨 말을 더 해야 하지? 검이라도 뽑을까?”

“어차피 파기될 약혼이야. 검 뽑으면 이길 자신은 있고?”

“그럼 그 약혼이 파기된 후에 만나지 그래? 그리고 ​대​리​인​(​c​h​a​m​p​i​o​n​)​ 정도는 찾으면 있겠지.”

미셸은 곤란한 얼굴을 해보였다. 세시안은 멀쩡한 왼손을 들어올렸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장갑이 없네. 결투는 다음으로 미루지. 돌아가.”

“리즈가 기다려.”

“내가 사람을 보내서 설명하지.”

“요즘은 기다리게 하면……. 그보다 너 손이 왜 그 모양이야?”

“잔이 깨져서 치우다가 다쳤어.”

“말도 안 되는 변명 하지 말고. 그걸 왜 네가 치워?”

“로렌의 세르는 잔을 치울 수도 없다는 거야? 나도 손이 있어, 리무쟁 공작 전하.”

“너.”

미셸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설마 아롈이랑, 아니 비전하랑 싸웠어?”

“헛소리. 그리고 여기 계속 서서 이야기 할 건가?”

미셸과 세시안의 뒤에 각각 하녀들이 줄을 서 있었다. 오전의 센 궁에 버금가는 교통 체증이었다. 하녀들이 기다리는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귀로 듣고 입으로 퍼트릴 말들은 신경 쓰였다.

미셸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리즈에게 설명만 하고 올 테니 내 방에 가서 기다려.”

“전쟁의 홀에 가려고 했는데.”

“그 손을 하고 나가서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말 들어.”

“안 내려가도 한 소리 들을 텐데?”

“오늘은 폐하께서 오셨어. 괜찮을 거야.”

아버지라. 그리 사람을 몰아갈 때는 언제고 말없이 자리를 메꾸려 내려간 것이다. 아마도 어머니를 위해서.

대회의가 끝나고 황제에게 된통 깨질 때까지만 해도 오를레앙을 향해 이를 득득 갈았건만, 한 일주일 쯤 전에 일어난 일 같았다. 대체 하루 만에 무슨 일이 이렇게 많이 일어났을까.

대회의, 아버지에게의 질책, 그리고 유리. 눈물. 비명.

“그래서, ‘말만’ 하고 온다고?”

“네가 생각하는 일 없을 테니까 그만 다그쳐.”

“술 있어?”

미셸이 작은 열쇠를 던졌다. 빛나는 열쇠는 호선을 그리며 세시안의 왼손에 안착했다. 그가 잘 받은 것이 아니라 미셸이 잘 던진 것이다. 세시안은 당연히도 그 열쇠가 어느 서랍의 열쇠인지 알고 있었다. 이십 년이란 그 정도의 세월이었다.

“다 마시지는 말고.”

“오는 길에 한 병 더 가져와.”

"알았어."
끊기 애매해서 그냥 써지는대로 올립니다. 조금 짧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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