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바라마지 않는 (6)
세시안은 멀찍이 떨어져 앉아 아롈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썼다. 아무렇지 않은 듯 웃고 구슬려 옆에 남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실로 열흘 만의 성과였다. 여기에서 일을 망치면 두 번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있다 하더라도 다음에도 성공하기란 많이 어려워질 것이다.
하지만 낮의 햇살 아래 아롈을 보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녹색의 정원에 서 있는 소녀는 어두운 남색 옷을 걸치고 있는데도 희게 빛났다. 두근거림이 놀람에 우선했다. 그 순간은 결혼식 맹세 문구를 찾기 위해 시집을 뒤지던 미셸을 도우며 언뜻 외운 시의 구절이 떠올랐다.
‘오, 그토록 새하얀, 그토록 차가운 나의 데이지 꽃이여.’
아니, 희고 차갑기는 하지만 데이지와는 다르다. 장미, 리시안서스, 라넌큘러스 같은 화려한 겹꽃과도 다르고, 옥시나 은방울꽃처럼 청순하고 소박한 꽃들과도 다르다. 세시안은 아는 꽃들을 떠올리며 비슷한 것이 있는지 고르다가 그만두었다.
그가 반한 소녀는 보드랍게 한들거리다가 한 철 지나면 시들어버리는 꽃송이와는 비교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날카로운 검이나 창, 혹은 왕홀(scepter)과 어울린다.
왕홀. 그리고 관. 여우털이 달린 망토며 보주(Globus cruciger).
세시안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아롈을 돌아보았다. 아롈은 앉은 채로 곤하게 잠들어있었다. 드물게도 풀어놓은 색 옅은 금발이 햇살을 머금은 듯 빛났다. 마치 그녀가 마땅히 가졌어야 할 관(冠)처럼.
무거운 죄책감이 가슴을 짓이겼다.
황제가 다른 나라 계승권 다툼에 손을 뻗겠다고 했을 때 그는 염려스러웠다.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느꼈고, 성공한다고 해도 크게 받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남쪽과 북쪽의 제국이 손을 잡는다. 말은 좋다. 하지만 그 뒤에 다른 나라들의 견제가 따르지 않을까? 특히 서쪽의 성황청에서 가만히 있을까? 득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크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루이 오귀스트 황제는 세시안의 이 모든 걱정을 들은 다음 무시하고 일을 강행했다. 세시안은 후계자에 불과했으므로 순순히 아버지의 일을 따라 그가 시키는 모든 일을 수행했다. 실패해도 잃을 것이라곤 기사단 제 1연대뿐이었다.
그리고 헌신의 대가로 그의 끝을 받았다.
루이 오귀스트 황제는 무언가를 쉽게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성황청이 카타리나의 손을 들어준 것을 기억했다. 아직 어린 소녀의 날개를 뚝뚝 꺾은 다음 혹여 상처가 덧날까 예쁘게 잘라서 새장에 넣어주었다.
예쁘게 소중하게 키우렴. 알 낳는 것도 꼭 보고, 새끼까지 키워 보려무나. 모이를 꼬박꼬박 주고. 햇빛 쐬어주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단다. 알았지? 저번에 많이 죽였으니 이번에는 죽이지 말고 잘 길러야 한다.
세시안의 비극은 새장 속의 새에게 진심으로 반했다는 것.
그리고 아롈의 비극은 그녀가 애완 카나리아가 아닌 독수리라는 것.
아롈에게 반한 이상 아롈의 비극은 세시안의 몫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해결해줄 수 없었다.
아롈은 그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 대로였다. 물어본 것을 후회할 것이라고도 했다. 그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오만했다. 새장 속의 환경은 얼마든지 통제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 새장 바깥에서 고양이가 호시탐탐 노리는 것도 어떻게든 해줄 수 있다고. 행복하게 지저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다고.
하지만 아롈이 원하는 것은 새장 문을 열어주는 것이고, 그에게는 새장의 열쇠가 없었다. 아니, 그 열쇠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당신은 내게 황후의 관은 줄 수 있어도 여왕의 관은 줄 수 없잖아?
카타리나의 말 그대로였다.
세시안은 장차 아롈에게 로렌 황후의 자리를 줄 수 있었다. 여섯 대공가와 황실의 직할령을 아우르는, 남부에 큼지막하게 자리한 풍요로운 땅의 황후. 애정과 존경과 충성을 받을 수 있고 귀부인들의 위에서 군림할 수 있고 얼마든지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코시카 여제에 비하면 한없이 하찮은 자리를. 황후는 로렌에서 가장 지위 높은 여성이지만, 황제와 비하기는 어렵다.
그는 그런 면에서는 이성적인 남자였다. 그가 줄 수 있는 정절과 신뢰와 애정이 로렌 황후와 코시카 여제의 차이를 메우기에 충분하다고 믿지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아롈이 잠에 취해 스르륵 옆으로 넘어갔다. 세시안은 다급히 그 팔을 잡아채서 당겼다. 평소대로라면 대번에 깨어 그를 뿌리칠 줄 알았는데 여전히 잠든 채였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이 그가 당기는 대로 흔들렸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소박한 욕망에 따랐다. 조심스레 머리를 어깨에 기대게 한 것이다.
뺨이 어깨를 눌렀다. 아롈은 색색거렸다. 세시안은 푹 잠들어 있는 아롈을 보면서 감히 머리카락을 쓰다듬어도 될지 고민했다. 그는 몇 번이고 손을 들었다가 결국 포기했다.
아롈은 지난 열흘 내내 악몽을 꿨다. 그가 아롈을 깨우면 그걸로 그 날의 수면은 끝이었다. 다시 잠들지 못했다. 그는 수면 부족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았다. 겨우 곤하게 잠든 사람을 깨우기 싫었다. 잠시라도 악몽 없이 편히 잠들었으면 했다.
감정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이 소녀를 사랑한다.
그래서 서글펐다.
그는 비겁하게 몇 가지의 가정을 되뇌어보았다.
차라리 코시카에서 여성의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손위 형제들이 누구 하나라도 살아 있었더라면. 아니, 그녀가 황위에서 거리가 먼 방계 가문의 딸이었더라면.
하지만 세시안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반한 아롈의 장점은 대부분 그녀가 후계자로서 자라면서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책임감도, 성실함도, 명석함도, 총명함도, 어느 정도는 타고날 수 있다. 그러나 갈고 닦지 않으면 금세 그 빛을 잃고 뿌옇게 변한 채 땅에 날것으로 묻혀있게 된다.
혹독하게 자랐을 것이다. 세시안 역시 다섯 살 때부터 세르 위치에 앉은 사람이었다.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재미있고 즐거운 것들은 무엇 하나 해본 적이 없을 만큼.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성숙함이 채 자랄 새도 없이 교양과 지식을 쌓을 만큼, 그래서 저만큼 불균형해질 만큼 혹독하게.
몇 번이고 그의 안에서 논파된 이야기를 곱씹었다. 아롈이 코시카의 후계자였던 적이 없지만 지금과 똑같이 자라서 그와 결혼했다면, 하는 터무니없는 가정은 그만큼 달콤했다. 아무 것도 거리낄 것 없이 웃고, 끌어안고, 기다릴 텐데. 혹여 싸우고 울고 원망하더라도 이렇게 불안하고 미안해서 뱃속이 꼬이지는 않을 텐데.
아니, 그랬더라면 다른 좋은 남자와 결혼했겠지. 세시안은 쓰게 웃었다. 다른 조건은 그렇다 치더라도 나이 차이가 너무 난다. 그는 다만 상상으로나마 자기에게 불리한 요소들을 죄다 거세하고 유리한 것만 생각할 줄 아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냉정하게 따지도록 교육받았다.
저렇게나 매력적이고, 쉽게 홀려버리는데 틀림없이 다른 사람에게 반해버렸겠지.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어김없이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스스로도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이미 빼앗은 계승권, 이미 한 결혼. 무를 수도 뒤집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그렇다고 ‘이미 없어진 계승권이니 그냥 잊고 저와 행복하게 사실까요’ 하고 뻔뻔하게 나갈 수 있는 성격도 아니었다. 시간을 돌려 돌아가면 그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옐레나 여제, 아롈의 어머니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이권을 내주었다. 세시안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는 이득인 장사였다. 하지만, 그러면 똑같이 아롈은 상처입고 날개 잘린 채 그에게 오겠지.
귀중한 목걸이가 엉망으로 꼬인 듯 안타까웠다. 목걸이 줄을 자르면 소중한 보석은 튀어나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이 틀림없지만, 어디서부터 시작이고 어디서부터 끝인지도 알 수 없어 암담하기만 했다.
그 앞에서 그는 손가락이 없는 듯 무력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얼마 없었다. 아롈이 그에게 상처 입혀도 내색하지 않고 참는 것, 화가 나도 내리누르는 것, 그리고 몸에 밴 다정함을 내어주는 것, 잠들어있는 소녀에게 어깨를 빌려주는 것.
‘아렐르.’
그는 아롈이 깰까봐 속으로 이름을 불렀다.
‘방금은 너무했어요. 저는 아렐르에게 있어서 그렇게 졸렬한 사람인가요? 물론 제가 졸렬하게 행동하기는 했지만요. 그 정도로 졸렬하지는 않은데요.’
아롈은 가끔 이상한 곳에서 직설적이었다. 자신이 말을 했을 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계산을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혹은 상관없이 일단 말을 뱉고 봐야겠다는 것처럼. 이를 악물고 냉정한 척 하려는 데에 비해 신기할 정도로 어린애 같은 면이 강했다.
아까의 대화가 그 예였다.
‘죽으려고 온 게 아니라니. 대체 무슨 뜻으로 한 말인가요?’
아롈이 죽어 버릴까봐 내내 두려웠던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도 무서웠다. 옆에서 얌전히 잠들어있는 것만으로도 한결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한 것은 자살의 감시를 위한 행위가 아니다. 그저 평범한 제안, 다른 누가 했더라도 이상할 것 없는 제안에 그렇게 과하게 반응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 판단력이 의심스럽고, 그를 떼어내기 위해서라면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 혹시 그게 협박이었다면 대단히 훌륭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는 이제 더는 아롈에게 눈을 떼지 못할 것이다. 앉든 서든 불안해서 뱅뱅 맴돌겠지.
‘그것 알아요? 아렐르는 정말 뜬금없는 곳에서 사람을 상처 입히는 재주가 있어요.’
스스로의 마음을 알았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다(lived happily ever after)’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의 마음은 붙들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세시안은 그걸 너무나도 잘 알았다.
아롈은 한참이나 꿈도 꾸지 않고 잠들어있었다.
그는 눈을 감아 보았지만 가슴이 뛰어 잠도 오지 않았다. 돌아버릴 노릇이었다. 세시안은 하는 수 없이 허공을 쳐다보며 머리를 비우려 애썼다.
“으음.”
아롈이 몸을 뒤척이다가 문득 그의 팔을 끌어안았다. 그는 식겁해서 어깨를 들썩였다. 아롈은 파고들듯이 움직이다가 뺨을 그의 가슴에 대었다.
‘뜬금없는 곳에서 사람을 당기는 재주도 있네요. 미처 몰랐어요.’
세시안은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로 한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