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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0. 바라마지 않는 (7)


 “사샤.”

어린 소녀는 총총히 걸어 다니며 이름을 불렀다. 크게 부르면 혼난다. 아주 작게, 속삭이듯이 불렀다.

“사샤, 어디 있어? 나와.”

북쪽의 황궁은 항상 고요했다. 황실 가족과 그 시종들만이 사는 곳이라 단출했다. 그나마도 체사레비치인 파블 대공은 황궁을 자주 비웠다. 그래서 지금 황궁에 살고 있는 고귀한 피는 이반 3세, 체사레브나인 옐레나 대공비, 그리고.

“아롈 여대공 전하. 오랜만이오.”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 단 셋뿐이었다. 아롈은 허리를 펴더니 그에게 고개 숙이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이반 3세의 형의 아들인 콘스탄틴 대공이었다.

“네.”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른들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하러 가겠지. 그녀는 뚱한 얼굴로 쌩하니 돌아섰다. 황실에서 그녀보다 높은 사람은 할아버지, 파블 대공, 어머니뿐이었다. 나머지는 무시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발이 복도를 총총 밟았다.

“사샤. 사샤.”

예브게니아가 그녀의 뒤를 말없이 따랐다. 예브게니아는 아롈보다도 키가 훨씬 컸다. 아롈은 조산아인데다가 병약해서 또래보다 키도 작고 몸집도 가냘팠다.

아무리 찾아도 사샤는 없었다. 나탈리야도 없었다. 아롈은 시무룩해진 채 천장을 쳐다보았다. 없다. 없어. 어디에도.

정말로 가버린 것이다.

“아롈 전하. 알렉산드르 전하는 이제 여기 안 계세요.”

예브게니아가 낭송하듯 말했다. 아롈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나도 알아. 입 다물어.”

“다른 시녀 언니들이 그랬어요. 전하께서는 떠나셨대요. 영영 안 돌아오실 거라고요.”

“입 다물지 않으면 너 오늘 저녁은 없을 줄 알아.”

그녀가 웃었다.

“아롈 전하. 알렉산드르 전하께서는 이제 돌아오시지 않을 거예요.”

저녁만 굶기는 걸로 되겠어요? 채찍으로 치세요. 예브게니아는 진심으로 즐거운 듯이 웃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채찍은. 아롈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너, 내일 아침까지 굶도록 해.”

아롈은 돌아서서 계단에 한 발을 올렸다.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 때 예브게니아가 말했다.

“이제 전하께서도 혼자시네요.”

아롈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아롈 전하께서도 혼자시라고요. 저처럼요.”

“닥쳐.”

“줄곧 기도했어요. 전하께서도 불행해지게 해달라고요. 신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셨나봐요.”

“닥치라고 했잖아!”

아롈은 소리 질렀다. 아롈의 목소리는 유독 높았다. 목소리가 치솟아 돔 모양의 천장까지 닿았다. 하필 소리를 흡수할만한 융단이나 태피스트리, 그림 등이 없었다. 얼마 전 옐레나 대공비가 기분전환을 하자며 벽화를 그리라 명령하여 장식을 전부 갈아치웠다. 덕분에 목소리가 여러 번 반사되며 메아리쳤다. 마치 천사들이 외치는 것처럼 들렸다.

닥치라고 했잖아! 닥치라고 했잖아! 닥치라고 했잖아!

혼란스러웠다. 머리가 뱅글뱅글 돌았다. 창백한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알렉산드르는, 네가 기도해서 떠난 게 아니야. 나탈리야가 임신해서 달아난 거야. 왜냐하면, 알렉산드르는 파블 대공 전하를 싫어하거든. 우유부단하고 칠칠치 못하다고. 결정했으면 그걸로 끝이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사샤는 나탈리야를 울리지 않겠다고 했어, 그래서.

“여대공.”

아롈은 고개를 들었다. 계단에 어머니가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콘스탄틴 대공의 부인인 예카테리나 대공비와 둘의 시녀들이 늘어서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중인 듯했다. 아롈은 계단에 발을 디딘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체사레브나께 인사드립니다.”

“예카테리나. 먼저 가서 기다려주겠어요?”

“물론이지요. 편히 일 보시지요.”

“여대공, 잠시 이리로.”

대공비는 벌레를 본 듯 찡그리더니 딸을 불렀다. 아롈은 고개를 숙이고 어머니를 따라 빈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롈은 누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잠에서 깼다.

“으.”

말이 되지 못한 신음 비슷한 것이 목에서 흘러나왔다.

“일어났나요?”

아롈은 습관적으로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수수한 검은 바지, 배를 덮고 있는 조끼. 남편의 팔을 끌어안은 채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혀끝을 끊어져라 깨물었다. 멍청하긴. 거기에서 어떻게 그냥 잠들 수가 있지.

최대한 침착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상체를 일으키곤 슬금슬금 떨어졌다. 귀가 뜨끈뜨끈했다.

“실례했습니다.”

“천만에요.”

아롈은 꾹 눌린 뺨을 어루만졌다.

혼자서 침대를 쓰면서 자란 만큼, 누군가를 끌어안고 잠드는 습관 따위는 없었다. 이 버릇을 들인 건 순전히 눈앞에서 속없는 듯 웃고 있는 이 남자였다. 간만에 혼자 쓰는 침대가 너무 넓다고 느끼게 만든 것도, 옆자리가 허전해서 자꾸 더듬거리게 만든 것도, 사람 온기가 그리워서 이불을 목 끝까지 덮게 한 것도, 악몽을 꿀 때 누가 안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주입시킨 것도 이 사람이었다. 원망스러웠다.

주위가 어두웠다. 하늘을 보니 이미 별이 깔려있었다. 분명 잠들 때까지만 해도 늦은 오후기는 했으나 볕이 쨍쨍한 낮이 아니었던가. 아롈은 시간을 가늠하기 위해 달을 찾다가 실패했다. 초승이었던가? 아니면 그믐? 저녁을 먹고 들어가서 꽃 장식 시안을 보려고 했는데.

“간만에 푹 자는 듯해서 깨우지 못했어요. 혹시 다른 일정이 있었나요?”

“아닙니다.”

줄곧 여기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느냐고 물으려다가 혀를 깨물었다. 거리를 두어야지, 옐레나 파블로브나. 괜히 친근한 척 해서 뭘 어쩌려는 거야?

아롈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신기할 정도로 머리가 맑았다. 깨끗한 물에 씻어 헹군 듯했다. 오래간만의 깊은 잠이었다.

“돌아갈 건가요?”

남편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아롈은 주저하다가 그 손을 잡았다. 손끝이 찌릿했다.

“잘 잤나요?”

꿈을 꾸긴 했으나 방금 꾼 꿈은 악몽이 아니었다. 그 날은 고작 어머니에게 혼이 나는 걸로 끝이었으니. 어머니의 명령으로 예브게니아는 사흘 밤낮을 굶었다. 그 뒤로 다시는 알렉산드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웃었다.

“다행이군요.”

-대체 이 무슨 소란이냐.

-시녀가 잘못을 했으면 조용히 치죄하면 될 일. 온 궁에 네 목소리가 크다고 자랑하려느냐?

-말 하나 조리 있게 똑바로 못하느냐? 말끝을 흐리지 말거라. 대체 네 선생은 뭘 가르치는 게냐. 그런 식이라면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낫겠구나.

-그치지 못하겠느냐? 여덟 살이나 되었으면서 아직도 네가 어린아이인 줄 아느냐. 남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건 갓난아이 때 끝냈어야지.

처음부터 끝까지 맞는 말 뿐이었다. 그러니 악몽이 아니다. 다만 사샤를 찾아 헤매는 꿈이라 뒷맛이 씁쓸할 뿐.

남편은 자비관에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 아롈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롈은 입을 꼭 다문 채 계단을 올랐다. 대회의가 끝난 뒤로 이블린은 상대적으로 조용해졌다. 작은 홀을 빌려 여는 다담회나 만찬회는 있어도, 큰 연회가 없었다.

자비관 침실에 도착한 아롈은 곁방에서 치장을 풀었다. 간소한 차림이라 오래 걸릴 것도 없었다. 장신구도 적고, 페티코트도 한 겹 뿐이었다. 그러나 아롈은 뜸을 들였다. 나가기 싫었다. 얼굴만 봐도 마음이 약해진다.

그러나 씻은 손을 괜히 한 번 더 씻고, 실내화를 세 번쯤 갈아치운 뒤에는 별 수 없이 곁방을 나서야 했다. 시녀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뒷정리를 시작했다. 아롈은 침실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얇은 천이 다리에 휘감겼다.

아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토록 긴장했건만 침실은 텅 비어있었다.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탁자에 책 한 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아롈은 다가가 책을 집어 들었다. 저자는 프랑수아-마리 아루에. 남편이 대회의 중에 읽고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펼쳐볼까 고민하다가 그만 두었다. 이 책을 가지고 남편에게 말을 건다든가 할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므로. 의미가 없지 않은가. 책을 내려두고, 서랍에서 시계를 꺼내보았다. 시간을 알리는 숫자판 대신 다이아몬드 열두 개가 박혀있는 은빛 시계는 코시카에서 가져온 물건이었다. 아롈의 물건 중에선 드물게 오래된 것이다.

벌써 새벽 한 시였다. 아롈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시간까지 저 바깥에서 있었던 건가. 리젤로트와 산책을 나갔을 때는 해가 지지 않았다. 즉 아무리 적어도 여섯 시간을 날린 것이다.

순식간에 빚이 쌓여갔다. 아롈은 그간 언젠가 감정적으로 갚을 날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므로, 지금껏 그의 배려에 기대어 왔다. 남편은 그런 쪽에는 아롈에게 지나칠 정도로 관대했다. 어린아이도 아니면서 어리광을 부리고, 시간과 애정을 조르고. 그런데 이제는 그것들이 다 갚을 길 없는 빚이었다. 가슴이 무거웠다.

“거기 서서 무슨 생각해요?”

젠장. 절로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목소리가 특히 감각적이었다. 낮고 부드러운데 울림이 큰 편이라 한 번 들으면 뇌리에 박혀들었다. 특징 없이 단정한 외양과 달리 음성은 존재감이 강했다. 아롈은 시계를 원래대로 돌려놓고 천천히 돌아섰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세시안은 문을 닫으며 빙긋 웃었다.

“괜찮다면 곁방을 빌려도 될까요? 옷을 갈아입고 싶군요.”

마음대로 하시라는 말에 남편은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여기에는 갈아입을 옷이 없을 텐데? 잠시 의아한 마음이 들었으나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옐레나 파블로브나, 궁금해 하지 마. 신경 써서 무엇 하려고.

들어오면 꽃 장식 시안을 볼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너무 늦었다. 어쩐지 시녀들의 얼굴에 피로가 가득하다 했다.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아롈은 괜히 자신에게 온 초대장을 뒤적였다. 어차피 혼자 갈 만한 곳은 거의 없었고, 갈 생각도 없었지만 그만큼 할 일이 없었다.

그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고 했더니 하녀들이 와르르 들어와 식사를 날랐다. 아롈은 곁방 쪽을 잠시 쳐다보았다. 시킨 적이 없으니 아마 남편이 시켰을 것이다.

정찬이라고는 하기 어려워도 전식, 본식, 치즈, 후식의 격식을 훌륭히 갖춘 식사였다. 버섯 수프와 크루아상, 본식으로는 가자미 뫼니에르, 치즈 약간, 후식으로는 크레이프.

좋아하는 음식들을 보니 갑자기 허기가 졌다. 지난밤부터 먹은 것이라곤 빵 반 조각, 우유 반 잔, 머랭 몇 조각이 전부였다. 잠을 충분히 자서 그런지 식욕이 돋았다. 아롈은 저 중 특히 가자미 뫼니에르를 좋아했다.

하지만 먹어도 될 지 알 수 없었다. 음식은 이 인분이었지만, 저걸 먹는 것은 남편과 계속 엮이겠다는 의미였다. 아롈은 함께 식사하고, 같이 잠들면서도 자신이 그에게 정을 뗄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이제부턴 혼자 해야 한다.

지금은 죄책감과 불안감, 책임감에 아무렇지 않은 척 옆에 있으려 할지 몰라도, 아롈이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는 아롈에게 베푸는 시혜적 다정함을 거둘 것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서러워진다해도 그게 옳은 일이었다. 아롈은 지금 이 상태가 진절머리 나게 싫었다.

그래서 아롈은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하녀들을 붙잡아 아무 것이나 좋으니 간단히 요기할 거리를 ‘일인분’ 가져오라고 시켰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제냐 이름 또는 성을 추후에 다른 걸로 바꿀 예정입니다. 제가 작명에 익숙하지 않은지라 적당히 작중 이름들을 여기저기에서 따오고 있는데, 유명 리듬체조 선수와 이름/성이 동시에 겹치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네요. 아마 성을 바꾸게 될 것 같습니다.

(9월 20일 오후 8시 30분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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