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일 오후 8시 30분경 직전 화를 수정했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이전 버전을 읽으신 분들께서는 다시 한 번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녀들이 몰려왔을 때처럼 떼 지어 나가고, 한참이 지나도록 남편은 침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음식이 천천히 식어갔다. 남편이 곁방의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아롈은 관심도 없는 초대장을 뒤적이고 있었다.
아롈은 이블린에서 두 번째로 지위 높은 여성이었다. 근처에서 열리는 모든 연회의 초대장이 한 장씩 들어오기 마련이었다. 이런 저런 종이에 여러 가지 필체로 쓰인 통상적인 문구를 한 장씩 읽으며 시간을 때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침실에 책이라도 몇 권 갖다 둘 것을. 아롈은 몇 달 전의 후회를 반복했다.
“아렐르.”
“무슨 일이십니까.”
아롈은 고개를 들었다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문질렀다.
지난 열흘 동안 세시안은 내내 자비관에 눌러앉아 있었지만 옷을 항상 다 차려입고 있었다. 잠들 때에도 코트만을 벗을 뿐 조끼부터 구두까지 걸친 채였다.
악몽을 꾼 직후 일어나 혼몽한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확실했다. 크라바트를 풀어헤쳐 어깨에 긴 레이스가 걸쳐있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꼴이기는 했으나, 지난 새벽만 해도 분명 옷을 전부 입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단추가 촘촘하게 달린 면 재질의 상의를 같은 재질의 허리띠로 동여맸고, 바지와 실내화 사이로 복사뼈와 발목이 보였다. 누가 봐도 침의 차림이었다.
“식사를 안 했네요? 배고플 텐데 먼저 먹고 있지 그랬어요.”
그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예법에 익숙한 사람답게 발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롈은 순식간에 팽팽하게 긴장했다. 아롈은 지금까지 남편도 선을 긋고 있다고 여겼다. 아롈이 죽는 게 싫어서 책임감으로 감시하고는 있지만, 그런 말을 내뱉은 아롈을 안고 싶어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러나 만일 그가 정사를 요구하면 아롈은 거부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그는 외동아들이었다. 후계자를 낳는 것은 피할 길이 없는 아롈의 의무였다. 그리고 아롈은 황새가 후계자를 물어다준다고 믿을 나이는 지난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싫었다. 가능하면 손끝조차 닿고 싶지 않았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만으로도 멍청한 심장은 두근거리며 피를 뿜어냈다. 끌어안고 살을 섞으면서 마음이 정리될 리 없었다. 불어나면 불어났지.
아니, 그런 이성적인 이유로 싫은 게 아니다. 그를 상처 입힌 말이 너무 졸렬하고 비겁해서, 스스로 부끄러워서 싫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와 자고 싶지 않았다.
그 당위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분명 누군가의 대안으로 여겨지는 일에는 익숙하건만.
알렉산드르 역시 그랬지 않았나? 그는 아롈의 외모에서 죽은 이반 파블로비치를 찾았다. 죽은 이반에 대한 후회와 미안함으로 아롈을 예뻐했다. 아롈은 그걸 알고 있음에도 알렉산드르가 오라비로서 주는 애정을 마냥 필요로 했다. 대타면 어떻지? 어차피 이반은 이미 죽었고, 다시 돌아올 일은 없는데. 혹시 나이들어 머리가 검어지면 어쩌나 하는 게 유일한 걱정거리였다. 태어날 때는 금발이라도 자라면서 머리색이 짙어지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었다.
죽은 사람에 대한 후회로 인해 주어진 다정함이라는 점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같았다. 그런데 달랐다.
뭐가 다른지는 모른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아롈은 지금까지 세시안이 준 다정함과 애정 비슷한 것들이 사실은 모두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는 게 끔찍하게 서러웠다.
남편이 세 발짝 앞에 섰다. 검은 머리카락이 젖어있었다. 은은하게 남성용 향수 냄새가 풍겼다.
손이 뺨을 만지려는 듯이 다가왔다. 아롈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며 어깨를 움츠렸다.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는 난감하다는 듯이 웃으며 머쓱하게 손을 거두었다.
“제가 놀라게 했나보군요. 뺨에 머리카락이 붙었어요.”
아롈은 뺨을 더듬어 머리카락을 떼었다. 땀에 젖은 모양이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다 식었겠군요. 새로 가지고 오라고 할까요?”
남편은 식사를 같이 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아롈이 거절의 말을 찾아 우물거리는 동안, 누군가 구원하듯이 문을 두드렸다. 아까 아롈이 심부름을 시킨 하녀였다.
그녀가 들어오더니 탁자에 접시를 놓을 곳이 없어서 우물쭈물했다. 아무리 간소하다고는 해도 이인분의 정찬에 접시도 큼지막했으므로, 탁자는 식사로 가득해 빈 공간이 없었다.
“여기로 가져오면 된다.”
아롈이 아닌 세시안이 그렇게 말했다. 하녀는 명령이 반갑다는 듯 다가와 접시를 아롈이 앉아 팔꿈치를 기대고 있는 작은 탁상에 놓았다. 모양이 완벽하게 잡힌 오믈렛이었다. 옆에 은 대신 철과 주석으로 만든 식기와 냅킨을 조심스레 놓은 하녀는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나가도 좋다.”
남편의 목소리는 드물 정도로 낮게 가라앉았다. 그는 잠시 접시 위에 납작하게 엎드린 오믈렛을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아렐르가 시켰나요?”
“예.”
“제가 알아서 고른다고 골랐는데 음식이 마음에 안 들었나보군요. 미안해요.”
평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돌아왔다. 얼굴도 마찬가지로 탐탁찮은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신기할 정도로 완벽하게 감정을 숨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롈은 속이 좋지 않았다거나, 계란이 먹고 싶었다거나 등의 변명을 꾹 참았다. 미움 받기 싫었다. 하지만 오히려 미움 받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맛있게 먹어요.”
남편은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생긋 웃고는 탁자로 걸어가 식사를 시작했다. 한동안 손이 다쳐 왼손을 쓰더니 이번엔 오른손으로 식기를 들었다. 다 나은 건가.
아롈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뒤늦게 스푼을 들었다.
오믈렛 가운데를 가르자 속이 흘러나왔다. 씹는 맛이 있도록 약간의 버섯과 야채 다진 것이 들어있었다. 따뜻하고 보들보들하게 조리한 계란은 하루 넘게 굶은 속을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하지만 아롈은 내내 식사에 집중하지 못했다.
세시안은 배가 간신히 찰 정도로만 식사를 하고는 아까 놔두고 간 책을 가지고 아롈의 앞에 와서 앉았다. 꿀꺽, 입에 넣은 계란이 힘겹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는 아롈을 빤히 쳐다보거나 하지 않고 책을 펴들었다.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너무 컸다. 더 먹으면 체할 것 같아 간신히 반쯤 먹고 식기를 내려놓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물음이 날아왔다.
“다 먹었나요?”
“예.”
“그럼 가서 이만 잘까요? 피곤할 텐데.”
세시안은 사람을 불러서 음식을 치우게 했다. 하녀가 들어와 촛대에 불을 붙이고는, 덮개가 달린 긴 장대로 샹들리에의 불을 하나하나 껐다.
그가 책을 덮고는 손을 내밀었다. 아롈은 그 손을 잡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롈은 스스로 세운 규칙도 잊어버린 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사람 좋아 보이는 부드러운 미소가 서려있었다.
“무슨 할 말이 있나요?”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아롈은 깨달았다. 지금 문제는 정사라든가 식사라든가 하는 지엽적인 곳에 있지 않았다. 그는 아롈에게서 멀어질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냥 그 밤의 일은 두루뭉술하게 묻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할 작정인가.
그 날 그 밤, 그렇게 돌아서 놓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게 착각하게 만든 것은 아롈 자신일 가능성도 있었다. 아까 정원에서 잠결에 끌어안았기 때문일까.
아롈은 생각했다. 그냥 좋게 멀어지는 길은 없는 거구나. 마음을 정리하고, 그러면서도 더 미움 받지 않고, 그렇게 깨끗해지는 길은 스스로 터트렸다. 아니, 처음부터 아롈 혼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남은 길이라곤 그 여자 대신 예쁨 받으며 사는 길과, 아예 관계를 잘라버리는 길 뿐. 그런데 하나는 감히 길이라고 할 수도 없지 않나?
“전하.”
지금만큼은 정신이 지독하게 맑았다. 꼭 그만큼 아팠다.
“아까 정원에서의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잠결에 실수한 것뿐입니다.”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럼 열흘 전의 일은 잊어버리신 겁니까, 아니면 무시하기로 하신 겁니까?”
세시안은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렐르. 제가 여기 있는 게 싫다면 그냥 가달라고 이야기하면 돼요.”
아롈은 뜻밖의 말에 숨 쉬는 것을 잠시 잊어버렸다. 기대했던 건 이게 아니었다. 곤란한 얼굴로 고민하는 남편을 공격해서 기선을 제압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놀라서 주도권을 빼앗긴 것은 오히려 아롈 쪽이었다.
남편은 여전히 부드러운 말투로, 사근사근 말했다.
“제가 불편하다면 똑바로 아렐르가 원하는 걸 이야기해요. 들어줄 테니까요. 그러니까 절 쫓아내고 싶다는 이유로 그렇게 말다툼에서 우위를 잡기 위해 애쓸 필요 없어요.”
아롈은 생각해놓았던 말싸움의 얼개가 전부 틀어져버렸음을 깨달았다. 때문에 아롈이 간신히 꺼낸 반론은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아까 혼자 있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때는 무시하셨잖습니까.”
“다시 생각해봐요. 아렐르가 그렇게 이야기했나요?”
-먼저 들어가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저는 조금 더 있다가 가겠습니다.
-아렐르. 여기에 시녀 한 명 없이 혼자 놔두고 갈 수는 없어요.
-전하, 저는 죽지 않습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오늘의 산책은 리젤로트가 청한 것입니다. 준비하고 있었을 턱이 없잖습니까.
-아렐르.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저 걱정되어서 한 말입니다. 오해하게 해서 미안하군요.
-만일 앤을 보신다면 제가 찾는다고 전해주십시오. 그걸로 충분합니다.
-제가 이블린으로 돌아가고, 레르헨펠트 양이 오는 동안은 혼자잖아요. 알고 있나요? 지금 안색이 좋지 않아요.
-잠이 부족해서 그런 것뿐입니다.
-옆에 있는 것만 허락해주겠어요? 아렐르가 들어갈 때에 데려다주도록 하지요. 없는 듯 조용히 있을게요. 약속하지요.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결국 허락을 한 건 아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분명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한 적은 없다. 하지만.
“저는 분명하게 말씀드렸습니다. 말의 속뜻을 읽지 못하시는 것은 아닐 것이라 믿습니다.”
“아뇨. 전혀 분명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제가 두어 번 밀어붙이니 망설이면서도 결국 허락했고요. 정당한 거절 핑계를 찾지 못했나보지요?”
사실이었으므로 아롈은 입술 안쪽의 살을 꾹 깨물었다. 입술과 달리 입 안의 점막은 쉽게 뜯겨나갔다. 비릿한 피가 새어나왔다.
“아까도 마찬가지예요. 저와 식사를 하기 싫었으면, 그냥 그렇게 이야기를 했으면 됐어요. 저 몰래 음식을 한 접시 따로 시키는 게 아니라.”
“몰래 시킨 게 아닙니다.”
“미안하지만 저는 아렐르가 어물거리면서 제 눈을 피하는 기색을 눈치 못 챌 정도로 충분히 멍청하지 않아요. 하녀가 들어왔을 때 분명히 당황했잖아요? 제가 앞에 앉으니 불편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식사를 다 먹지도 못 하고 남기고.”
“알고 계셨으면서 그러신 겁니까?”
“아렐르가 거부하지 않았잖아요. 먹는 중인데 제가 코앞에서 책을 읽는 게 불편하니 저리 가달라고 했으면 갔을 거예요.”
“물어보지도 않으셨잖습니까.”
“아렐르. 지금 제 말을 못 알아들어서 그러는 게 아니잖아요? 지기 싫어서 고집 부리는 거지요. 제가 원하는 건 저를 대할 때 아렐르의 의사를 분명히 해달라는 것 뿐이에요.”
그의 말투는 싸우는 사람의 말투도, 어린애를 달래는 사람의 말투도 아니었다. 격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처음부터 이 언쟁을 계획하고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
아롈은 점차 가빠지는 호흡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이대로 더 싸워봐야 꼴만 우스워진다. 본질을 찌르자. 그 본질을. 그러니까 빌어먹을 심장은 좀 닥쳐주었으면 좋겠다.
“하고 싶으신 말이 무엇입니까?”
초록빛 눈에 이채가 스쳤다.
대체 어디까지 얕본 거지. 그럼 의사를 분명히 할 테니 꺼지라는 말이라도 할 줄 알았나. 아니면 여기 무슨 일이 있어도 가만히 서 있으라고 말하고 뛰어내리기라도 할까?
아롈은 스스로의 짐작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아롈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던 것이다. 역시 그에게는 아롈과의 관계를 끊어버릴 의사가 없었다. 단순히 죽는 게 무서워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계획하고 행동하신 거잖습니까. 제게 할 말이 있으셨기 때문에, 제가 싸움을 걸길 기다리신 걸 압니다. 전하의 말씀을 그대로 돌려드리자면 지리멸렬한 논쟁에 말려들어 제 얘기를 줄줄이 풀어놓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본론만 말씀하십시오.”
의사를 분명히 말해라, 이것도 원하는 것 중 하나겠지만 그것만 말할 거라면 처음부터 이런 함정은 팔 필요가 없다. 아롈이 도망쳐버릴까 두려워 아롈이 스스로 싸움판에 발 딛게 만들 정도로 중요한 말임은 틀림없었다.
아롈은 상당히 수치스러웠다. 흥분하지 않고 차분해진 남편은 분명히 사람을 읽고 다루는 데에 아롈보다 한 수, 아니 열 수는 위에 있었다. 그는 아롈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정교하게 계산해서 단 수십 분 만에 여기까지 이끌었다. 그토록 그를 피하고 싶어서 발버둥을 쳤는데 그것까지 전부 계산속이었다. 꼭두각시 인형(marionette)이라도 된 것 같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맞아요. 솔직히 침대에까지 따라 들어가도 아무 말도 안 하면 어쩌나 걱정하긴 했습니다.”
아롈은 그 말을 무시했다.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이번에도 답을 피하신다면……, 아닙니다.”
아니, 이건 조금 위험한 말이었을까. 아롈은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세시안은 아무렇지 않은 듯 받아쳤다.
“협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제 문장은 이미 아렐르에게 맡긴 거니까, 갈아치우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아렐르가 원하는 대로 해요.”
“시간 끌지 마십시오. 하고 싶으신, 말씀이, 대체, 무엇입니까?”
그의 눈빛이 언뜻 부드러워졌다가, 서글퍼졌다가, 이내 비장해졌다. 그 짧은 사이에 일어난 표정 변화를 올려다보던 아롈은 마치 미래를 보듯 그가 할 말을 깨달았다. 바늘이 이마를 관통하는 듯한 직관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하지만 두려웠다. 아롈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만, 취소…….”
“저는 아렐르를 사랑해요.”
10. 바라마지 않는 (8)
하녀들이 몰려왔을 때처럼 떼 지어 나가고, 한참이 지나도록 남편은 침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음식이 천천히 식어갔다. 남편이 곁방의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아롈은 관심도 없는 초대장을 뒤적이고 있었다.
아롈은 이블린에서 두 번째로 지위 높은 여성이었다. 근처에서 열리는 모든 연회의 초대장이 한 장씩 들어오기 마련이었다. 이런 저런 종이에 여러 가지 필체로 쓰인 통상적인 문구를 한 장씩 읽으며 시간을 때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침실에 책이라도 몇 권 갖다 둘 것을. 아롈은 몇 달 전의 후회를 반복했다.
“아렐르.”
“무슨 일이십니까.”
아롈은 고개를 들었다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문질렀다.
지난 열흘 동안 세시안은 내내 자비관에 눌러앉아 있었지만 옷을 항상 다 차려입고 있었다. 잠들 때에도 코트만을 벗을 뿐 조끼부터 구두까지 걸친 채였다.
악몽을 꾼 직후 일어나 혼몽한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확실했다. 크라바트를 풀어헤쳐 어깨에 긴 레이스가 걸쳐있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꼴이기는 했으나, 지난 새벽만 해도 분명 옷을 전부 입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단추가 촘촘하게 달린 면 재질의 상의를 같은 재질의 허리띠로 동여맸고, 바지와 실내화 사이로 복사뼈와 발목이 보였다. 누가 봐도 침의 차림이었다.
“식사를 안 했네요? 배고플 텐데 먼저 먹고 있지 그랬어요.”
그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예법에 익숙한 사람답게 발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롈은 순식간에 팽팽하게 긴장했다. 아롈은 지금까지 남편도 선을 긋고 있다고 여겼다. 아롈이 죽는 게 싫어서 책임감으로 감시하고는 있지만, 그런 말을 내뱉은 아롈을 안고 싶어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러나 만일 그가 정사를 요구하면 아롈은 거부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그는 외동아들이었다. 후계자를 낳는 것은 피할 길이 없는 아롈의 의무였다. 그리고 아롈은 황새가 후계자를 물어다준다고 믿을 나이는 지난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싫었다. 가능하면 손끝조차 닿고 싶지 않았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만으로도 멍청한 심장은 두근거리며 피를 뿜어냈다. 끌어안고 살을 섞으면서 마음이 정리될 리 없었다. 불어나면 불어났지.
아니, 그런 이성적인 이유로 싫은 게 아니다. 그를 상처 입힌 말이 너무 졸렬하고 비겁해서, 스스로 부끄러워서 싫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와 자고 싶지 않았다.
그 당위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분명 누군가의 대안으로 여겨지는 일에는 익숙하건만.
알렉산드르 역시 그랬지 않았나? 그는 아롈의 외모에서 죽은 이반 파블로비치를 찾았다. 죽은 이반에 대한 후회와 미안함으로 아롈을 예뻐했다. 아롈은 그걸 알고 있음에도 알렉산드르가 오라비로서 주는 애정을 마냥 필요로 했다. 대타면 어떻지? 어차피 이반은 이미 죽었고, 다시 돌아올 일은 없는데. 혹시 나이들어 머리가 검어지면 어쩌나 하는 게 유일한 걱정거리였다. 태어날 때는 금발이라도 자라면서 머리색이 짙어지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었다.
죽은 사람에 대한 후회로 인해 주어진 다정함이라는 점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같았다. 그런데 달랐다.
뭐가 다른지는 모른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아롈은 지금까지 세시안이 준 다정함과 애정 비슷한 것들이 사실은 모두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는 게 끔찍하게 서러웠다.
남편이 세 발짝 앞에 섰다. 검은 머리카락이 젖어있었다. 은은하게 남성용 향수 냄새가 풍겼다.
손이 뺨을 만지려는 듯이 다가왔다. 아롈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며 어깨를 움츠렸다.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는 난감하다는 듯이 웃으며 머쓱하게 손을 거두었다.
“제가 놀라게 했나보군요. 뺨에 머리카락이 붙었어요.”
아롈은 뺨을 더듬어 머리카락을 떼었다. 땀에 젖은 모양이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다 식었겠군요. 새로 가지고 오라고 할까요?”
남편은 식사를 같이 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아롈이 거절의 말을 찾아 우물거리는 동안, 누군가 구원하듯이 문을 두드렸다. 아까 아롈이 심부름을 시킨 하녀였다.
그녀가 들어오더니 탁자에 접시를 놓을 곳이 없어서 우물쭈물했다. 아무리 간소하다고는 해도 이인분의 정찬에 접시도 큼지막했으므로, 탁자는 식사로 가득해 빈 공간이 없었다.
“여기로 가져오면 된다.”
아롈이 아닌 세시안이 그렇게 말했다. 하녀는 명령이 반갑다는 듯 다가와 접시를 아롈이 앉아 팔꿈치를 기대고 있는 작은 탁상에 놓았다. 모양이 완벽하게 잡힌 오믈렛이었다. 옆에 은 대신 철과 주석으로 만든 식기와 냅킨을 조심스레 놓은 하녀는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나가도 좋다.”
남편의 목소리는 드물 정도로 낮게 가라앉았다. 그는 잠시 접시 위에 납작하게 엎드린 오믈렛을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아렐르가 시켰나요?”
“예.”
“제가 알아서 고른다고 골랐는데 음식이 마음에 안 들었나보군요. 미안해요.”
평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돌아왔다. 얼굴도 마찬가지로 탐탁찮은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신기할 정도로 완벽하게 감정을 숨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롈은 속이 좋지 않았다거나, 계란이 먹고 싶었다거나 등의 변명을 꾹 참았다. 미움 받기 싫었다. 하지만 오히려 미움 받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맛있게 먹어요.”
남편은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생긋 웃고는 탁자로 걸어가 식사를 시작했다. 한동안 손이 다쳐 왼손을 쓰더니 이번엔 오른손으로 식기를 들었다. 다 나은 건가.
아롈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뒤늦게 스푼을 들었다.
오믈렛 가운데를 가르자 속이 흘러나왔다. 씹는 맛이 있도록 약간의 버섯과 야채 다진 것이 들어있었다. 따뜻하고 보들보들하게 조리한 계란은 하루 넘게 굶은 속을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하지만 아롈은 내내 식사에 집중하지 못했다.
세시안은 배가 간신히 찰 정도로만 식사를 하고는 아까 놔두고 간 책을 가지고 아롈의 앞에 와서 앉았다. 꿀꺽, 입에 넣은 계란이 힘겹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는 아롈을 빤히 쳐다보거나 하지 않고 책을 펴들었다.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너무 컸다. 더 먹으면 체할 것 같아 간신히 반쯤 먹고 식기를 내려놓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물음이 날아왔다.
“다 먹었나요?”
“예.”
“그럼 가서 이만 잘까요? 피곤할 텐데.”
세시안은 사람을 불러서 음식을 치우게 했다. 하녀가 들어와 촛대에 불을 붙이고는, 덮개가 달린 긴 장대로 샹들리에의 불을 하나하나 껐다.
그가 책을 덮고는 손을 내밀었다. 아롈은 그 손을 잡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롈은 스스로 세운 규칙도 잊어버린 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사람 좋아 보이는 부드러운 미소가 서려있었다.
“무슨 할 말이 있나요?”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아롈은 깨달았다. 지금 문제는 정사라든가 식사라든가 하는 지엽적인 곳에 있지 않았다. 그는 아롈에게서 멀어질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냥 그 밤의 일은 두루뭉술하게 묻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할 작정인가.
그 날 그 밤, 그렇게 돌아서 놓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게 착각하게 만든 것은 아롈 자신일 가능성도 있었다. 아까 정원에서 잠결에 끌어안았기 때문일까.
아롈은 생각했다. 그냥 좋게 멀어지는 길은 없는 거구나. 마음을 정리하고, 그러면서도 더 미움 받지 않고, 그렇게 깨끗해지는 길은 스스로 터트렸다. 아니, 처음부터 아롈 혼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남은 길이라곤 그 여자 대신 예쁨 받으며 사는 길과, 아예 관계를 잘라버리는 길 뿐. 그런데 하나는 감히 길이라고 할 수도 없지 않나?
“전하.”
지금만큼은 정신이 지독하게 맑았다. 꼭 그만큼 아팠다.
“아까 정원에서의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잠결에 실수한 것뿐입니다.”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럼 열흘 전의 일은 잊어버리신 겁니까, 아니면 무시하기로 하신 겁니까?”
세시안은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렐르. 제가 여기 있는 게 싫다면 그냥 가달라고 이야기하면 돼요.”
아롈은 뜻밖의 말에 숨 쉬는 것을 잠시 잊어버렸다. 기대했던 건 이게 아니었다. 곤란한 얼굴로 고민하는 남편을 공격해서 기선을 제압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놀라서 주도권을 빼앗긴 것은 오히려 아롈 쪽이었다.
남편은 여전히 부드러운 말투로, 사근사근 말했다.
“제가 불편하다면 똑바로 아렐르가 원하는 걸 이야기해요. 들어줄 테니까요. 그러니까 절 쫓아내고 싶다는 이유로 그렇게 말다툼에서 우위를 잡기 위해 애쓸 필요 없어요.”
아롈은 생각해놓았던 말싸움의 얼개가 전부 틀어져버렸음을 깨달았다. 때문에 아롈이 간신히 꺼낸 반론은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아까 혼자 있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때는 무시하셨잖습니까.”
“다시 생각해봐요. 아렐르가 그렇게 이야기했나요?”
-먼저 들어가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저는 조금 더 있다가 가겠습니다.
-아렐르. 여기에 시녀 한 명 없이 혼자 놔두고 갈 수는 없어요.
-전하, 저는 죽지 않습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오늘의 산책은 리젤로트가 청한 것입니다. 준비하고 있었을 턱이 없잖습니까.
-아렐르.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저 걱정되어서 한 말입니다. 오해하게 해서 미안하군요.
-만일 앤을 보신다면 제가 찾는다고 전해주십시오. 그걸로 충분합니다.
-제가 이블린으로 돌아가고, 레르헨펠트 양이 오는 동안은 혼자잖아요. 알고 있나요? 지금 안색이 좋지 않아요.
-잠이 부족해서 그런 것뿐입니다.
-옆에 있는 것만 허락해주겠어요? 아렐르가 들어갈 때에 데려다주도록 하지요. 없는 듯 조용히 있을게요. 약속하지요.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결국 허락을 한 건 아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분명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한 적은 없다. 하지만.
“저는 분명하게 말씀드렸습니다. 말의 속뜻을 읽지 못하시는 것은 아닐 것이라 믿습니다.”
“아뇨. 전혀 분명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제가 두어 번 밀어붙이니 망설이면서도 결국 허락했고요. 정당한 거절 핑계를 찾지 못했나보지요?”
사실이었으므로 아롈은 입술 안쪽의 살을 꾹 깨물었다. 입술과 달리 입 안의 점막은 쉽게 뜯겨나갔다. 비릿한 피가 새어나왔다.
“아까도 마찬가지예요. 저와 식사를 하기 싫었으면, 그냥 그렇게 이야기를 했으면 됐어요. 저 몰래 음식을 한 접시 따로 시키는 게 아니라.”
“몰래 시킨 게 아닙니다.”
“미안하지만 저는 아렐르가 어물거리면서 제 눈을 피하는 기색을 눈치 못 챌 정도로 충분히 멍청하지 않아요. 하녀가 들어왔을 때 분명히 당황했잖아요? 제가 앞에 앉으니 불편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식사를 다 먹지도 못 하고 남기고.”
“알고 계셨으면서 그러신 겁니까?”
“아렐르가 거부하지 않았잖아요. 먹는 중인데 제가 코앞에서 책을 읽는 게 불편하니 저리 가달라고 했으면 갔을 거예요.”
“물어보지도 않으셨잖습니까.”
“아렐르. 지금 제 말을 못 알아들어서 그러는 게 아니잖아요? 지기 싫어서 고집 부리는 거지요. 제가 원하는 건 저를 대할 때 아렐르의 의사를 분명히 해달라는 것 뿐이에요.”
그의 말투는 싸우는 사람의 말투도, 어린애를 달래는 사람의 말투도 아니었다. 격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처음부터 이 언쟁을 계획하고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
아롈은 점차 가빠지는 호흡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이대로 더 싸워봐야 꼴만 우스워진다. 본질을 찌르자. 그 본질을. 그러니까 빌어먹을 심장은 좀 닥쳐주었으면 좋겠다.
“하고 싶으신 말이 무엇입니까?”
초록빛 눈에 이채가 스쳤다.
대체 어디까지 얕본 거지. 그럼 의사를 분명히 할 테니 꺼지라는 말이라도 할 줄 알았나. 아니면 여기 무슨 일이 있어도 가만히 서 있으라고 말하고 뛰어내리기라도 할까?
아롈은 스스로의 짐작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아롈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던 것이다. 역시 그에게는 아롈과의 관계를 끊어버릴 의사가 없었다. 단순히 죽는 게 무서워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계획하고 행동하신 거잖습니까. 제게 할 말이 있으셨기 때문에, 제가 싸움을 걸길 기다리신 걸 압니다. 전하의 말씀을 그대로 돌려드리자면 지리멸렬한 논쟁에 말려들어 제 얘기를 줄줄이 풀어놓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본론만 말씀하십시오.”
의사를 분명히 말해라, 이것도 원하는 것 중 하나겠지만 그것만 말할 거라면 처음부터 이런 함정은 팔 필요가 없다. 아롈이 도망쳐버릴까 두려워 아롈이 스스로 싸움판에 발 딛게 만들 정도로 중요한 말임은 틀림없었다.
아롈은 상당히 수치스러웠다. 흥분하지 않고 차분해진 남편은 분명히 사람을 읽고 다루는 데에 아롈보다 한 수, 아니 열 수는 위에 있었다. 그는 아롈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정교하게 계산해서 단 수십 분 만에 여기까지 이끌었다. 그토록 그를 피하고 싶어서 발버둥을 쳤는데 그것까지 전부 계산속이었다. 꼭두각시 인형(marionette)이라도 된 것 같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맞아요. 솔직히 침대에까지 따라 들어가도 아무 말도 안 하면 어쩌나 걱정하긴 했습니다.”
아롈은 그 말을 무시했다.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이번에도 답을 피하신다면……, 아닙니다.”
아니, 이건 조금 위험한 말이었을까. 아롈은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세시안은 아무렇지 않은 듯 받아쳤다.
“협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제 문장은 이미 아렐르에게 맡긴 거니까, 갈아치우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아렐르가 원하는 대로 해요.”
“시간 끌지 마십시오. 하고 싶으신, 말씀이, 대체, 무엇입니까?”
그의 눈빛이 언뜻 부드러워졌다가, 서글퍼졌다가, 이내 비장해졌다. 그 짧은 사이에 일어난 표정 변화를 올려다보던 아롈은 마치 미래를 보듯 그가 할 말을 깨달았다. 바늘이 이마를 관통하는 듯한 직관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하지만 두려웠다. 아롈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만, 취소…….”
“저는 아렐르를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