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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0. 바라마지 않는 (10)


 비가 쏟아지는 초가을이었다. 유독 가물었던 이번 여름을 적시기라도 하듯 빗줄기가 거셌다. 아무도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빗소리가 좋았다. 미네트는 활짝 열린 창문으로 들이치는 비얼룩을 잠시 내다보다가 탁자 위로 시선을 돌렸다. 찻잔에서 흰 김이 피어올랐다. 드물게도 다른 사람이 끓인 차였다.

“들거라.”

미네트의 아버지이자 미네트의 어머니의 남편이자 칠인의 맹세의 맹주이자 로렌의 황제인 루이 오귀스트 황제는 앉지 않고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폐하께서 들지 않으시는데 감히 먼저 먹을까요.”

“하하하하하하.”

너털웃음이었다.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은 황제는 미네트의 바로 앞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는 잔을 들어 의례상 입술을 적시고 내려놓았다. 미네트 역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황제의 공식 정부인 창녀가 끓인 차는 아주 형편없었다. 저번에는 조금 나았건만.

“그래. 황후가 무슨 할 말이 있다고 하더냐?”

“아뇨, 황후 폐하께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여 온 것입니다. 다망하신 폐하를 방해하여 송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내 아무리 바쁘다한들 미혼의 딸자식과 차 한 잔 못 마시겠느냐. 과자라도 더 가져오라 이르랴?”

“아니에요. 황후 폐하의 곁을 비우는 일이 두려우니 한시 바삐 사뢰고 물러가겠습니다.”

“저런, 내 황후에게 성심(誠心)을 다하여 돌보는 이가 너 뿐임을 어찌 모르겠느냐. 젊은 처녀아이가 가지고 싶은 것도 많고 놀고 싶은 때도 많을 터인데 아픈 어미 옆에 붙어 병수발 하는 일이 어디 쉽겠느냐.”

미네트는 황제의 말이 공치사를 위한 빈말임을 알면서도 한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이 아비의 핑계를 대고 쉬는 겸 앉아 있다가 늦게 들어가려무나. 하루 정도는 놀아도 된다. 그래야 지치지 않고 성심을 다할 수 있는 법이다.”

그래, 이게 본심이다. 미네트는 차를 마시며 한순간 흔들린 마음을 가라앉혔다. 뜨거운 차를 조금씩 뱃속에 흘려 넣자 잠시간의 착각이 스르륵 녹아 사라졌다.

어차피 이 이블린에서 황후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미네트 뿐이었다. 황제가 손위인 미네트를 제쳐두고 리젤로트를 먼저 시집보내기로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미네트가 결혼하여 황후를 돌보지 못하게 되면 황후는 황제의 최대 병기에서 통제 불가능한 위험 요소로 전락하게 된다.

“어마마마께서는 낯선 이를 불편해 하시니 딸인 제가 가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무슨 일이냐.”

미네트는 침을 삼키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카펫 위로 미네트의 수수한 옷자락이 길게 늘어졌다.

“이런, 이런. 내 사랑하는 딸아. 딸이 아비에게 청을 하는데 이런 거창한 행동은 아니 해도 된단다.”

“폐하. 황후 폐하께 내리신 일을 조금만 줄여주십시오.”

그럭저럭 딸에게 관대한 아버지로서 구색을 갖추고 있던 개암빛 눈이 삽시간에 써늘해졌다.

“그 무슨 말이냐.”

“황후 폐하께서는 지금 지나치게 과로하십니다. 삼주일이 넘도록 매일 침상에 누워 잠들어 계시는데 어찌 옥체가 무사하겠어요. 다만 거동이라도 조금 하시도록 하여 주십시오.”

요즘 들어 황제가 황후에게 요구하는 정보량이 가혹할 정도로 늘어났다. 때문에 요즘 황후는 하루에 채 두 시간도 깨어있지 못하고 잠들어 있었다. 어제 보고서를 쓰기 위해 일어난 황후는 연명을 위한 요기를 하자마자 다시 잠들었다. 그런데 미네트가 보기에는 황제가 요구하는 정보들에 큰 의미가 없어보였다.

“네 어미가 너를 시키더냐.”

그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미네트의 오라비인 세시안의 미성(美聲)과는 그 종류가 달랐다. 체에 내리기를 열 번쯤 반복한 진흙 같았다.

“아닙니다.”

“겨우 그걸 못 견뎌 너더러 내 앞에 엎드려 동정을 호소하라 하더냐?”

“소녀의 생각입니다. 황후 폐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미네트는 황제의 분노에 고개를 숙였다.

황제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고 탁자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황제는 탁자를 세 바퀴쯤 돈 뒤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네 올케가 지금 아프다지.”

“독감이라 합니다.”

마담 라 세르가 쓰러진 지 닷새가 넘었다. 북쪽나라 후계자였다가, 정쟁에서 져서 팔려온 그 아름다운 소녀는 고열을 숨기고 리젤로트의 결혼식 준비를 하다가 만찬 중에 혼절했고, 이틀 뒤 깨어나 몰라 침실에서 서류를 보다가 다시 쓰러졌다. 그 이후로는 시녀들이 감시를 하는지 다시 거동을 하다가 쓰려졌다는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 그 아이는 몸이 약해서 영 걱정이구나.”

병문안을 갔을 때 그 예쁜 얼굴이 놀랄 정도로 해쓱했다. 아프기 전에는 늘씬한 체구라는 인상이었는데, 말랐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미네트는 그녀의 몸보다 눈을 보고 흥미를 느꼈다. 그만큼 말랐는데도 그 독특한 연둣빛 눈에는 아직 서늘한 의지가 남아있었다. 오싹했다.

올케는 미네트에게 무어라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시녀들을 둘러보더니, 어깨를 으쓱하곤 나중에 다시 찾아달라고 말했다.

“내 사랑하는 딸아. 일어나거라. 오래 꿇어앉으면 몸이 지치기 마련이지. 몸이 지치면 병마가 더 쉽게 침투하지 않겠느냐.”

미네트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오랜만에 딸의 얼굴을 보니 좋구나. 앞으로도 자주 놀러오려무나. 당분간 기회가 많을 게다.”

그의 인도를 받아 황제의 집무실을 나섰다. 미네트는 내내 환희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황제는 며느리를 이유 없이 꿇어앉힌 일로 황후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 의미 없이 장시간 꿈을 꾸게 하는 벌을 주고 있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 한동안은 그 벌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은, 미네트의 자유시간이 늘어난다는 뜻이었다. 어찌나 기쁜지, 미네트는 지금 병상에 누워 있는 소녀에게 지운 빚을 탕감하고 약간의 덤을 더 얹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오를레앙의 미셸은 차나 한 잔 하자는 아롈의 청을 받아 자비관 응접실에 들어섰다. 세 명의 악사들이 구석에서 가벼운 실내악을 연주했다. 비오는 날이라 낮인데도 샹들리에를 전부 켜고, 여기저기 촛대도 가져다둔 덕에 응접실은 환했다.

장의자에 기댄 소녀가 웃으며 미셸을 맞았다. 그녀의 지위가 미셸보다 훨씬 높았으므로 그녀는 일어나지 않고 앉은 채였다.

“오랜만입니다, 미셸.”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팔목이 겨울 숲의 자작나무처럼 앙상했다.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소녀는 손을 거두어 미간을 문지르더니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보는 사람마다 제 얼굴을 가지고 한 마디씩 했습니다. 이번에도 설명해야합니까?”

“실례했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롈.”

미셸은 허락받은 애칭인 아롈이라는 이름과 전하라는 공식적인 호칭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애칭을 선택했다. 그는 힘을 잘못 주었다간 으스러질 것 같은 손을 잡고 정중히 허리 숙여 입 맞추었다.

“앉으십시오. 클레르, 차를.”

아롈은 손을 거두어 숄을 정리했다. 소녀는 갈색 빛 도는 붉은 색의 간소한 옷 위로 흰 숄을 두르고 있었다. 미셸은 응접실 여주인의 맞은편에 앉으며 숙녀에 대한 예의로 숄을 칭찬했다.

“아름다운 숄이로군요.”

보석 한 점 달려있지 않지만 대공가의 후계자로서 자란 그의 눈에 들 만한 물건이었다. 도톰하면서도 폭신폭신한 산양털로 천을 짜고, 그 위에 뜨개질로 똑같은 면적의 무늬를 짜서 두 장의 천 가장자리를 바느질로 붙였다. 한눈에도 마감이 깨끗한 고급품으로, 어중간한 보석 몇 개 달린 장신구보다는 값어치가 나갈 듯했다. 아롈은 아직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것을 보이듯 숄을 두르고 은으로 된 브로치로 숄을 고정해두었다.

“본국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몸이 아직 낫지 않아 복장이 미편하군요.”

본국이란 그녀의 친정인 코시카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롈은 순수한 로렌 혈통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옅은 백금발을 느슨하게 땋아 어깨에 얹어두었다. 고집스레 틀어 올릴 때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만. 저 밖의 나무들이 이파리를 떨구는 이유를 이제 알았습니다.”

“그냥 말랐다고 하셔도 됩니다. 쿨럭. 쿨럭, 큭.”

아롈은 흰 천으로 입을 가리고 한참이나 기침을 했다. 폐를 토하지나 않을까 두려운 격렬한 기침이었다.

“하아. 하아.”

“괜찮으십니까?”

아롈은 옆에 있던 시녀에게 천을 넘기곤 꿀물을 받아 들이켰다. 천 때문에 입술연지가 지워져 창백한 입술이 드러났다. 아롈은 비딱하게 웃었다.

“단순한 독감입니다. 매년 한두 번은 앓는데 이번 일은 유독 오래 가는군요.”

소녀는 별 것도 아닌 일에 다들 유난이라며 투덜거렸지만, 벌써부터 ​우​단​(​v​e​l​v​e​t​)​ 옷을 입고 있었다. 아직 더운 초가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가 손짓하자 시녀가 차를 비우고 뜨거운 차를 새로 따랐다. 눈을 감고 차를 음미하는 모습은 그림처럼 우아하고 연약했다.

미셸은 친구의 아내이자 열한 살 어린 사촌 형수에게 기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이렇게 당장 죽어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꼴이라니. 영혼에도 피부와 살과 뼈대와 혈관이 있다면, 다른 모든 부분은 다 죽어나가고 결벽(潔癖)이라는 이름의 뼈대만이 남아 앉아있는 듯했다.

미셸은 친구가 한심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고작 열여섯 살 짜리 하나, 그것도 이미 자기를 좋아하는 소녀를 구슬리지 못해 이 모양을 만드나.

-지금 아렐르가 혼자 있을 게 걱정 돼.

그렇게 말했으면서, 지금 그들은 각각 혼자였다. 물론 싸웠겠지. 하지만 싸웠다고 얼굴을 안 보면 해결이 된단 말인가? 눈에서 멀어지면 화는 식을지언정 마음도 멀어진다. 당연히 죽자 살자 붙어있어야 뭐가 되지, 이 바보 같은 자식.

미셸은 답답한 마음을 깊숙이 감추고 잘생긴 얼굴에 화사한 웃음을 띠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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