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문화 콘텐츠 사이트 삼천세계

여름 눈송이


10. 바라마지 않는 (11)


 “식사는 하셨습니까?”

“굶지는 않았습니다.”

“요즘 오리가 살이 오를 철이라 그런지 맛이 있더군요. 다음에 드셔보시지요.”

​“​참​고​하​겠​습​니​다​.​”​

“미셸. 제가 가엾어 보입니까?”

차 시중을 들고 있던 시녀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미셸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외모와 오를레앙의 외동아들이라는 지위 덕에 당돌한 말로 관심을 끌려는 숙녀들에게 단련되어 있었다.

게다가 아롈에게 툭툭 말을 던지는 구석이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미셸은 그녀를 사랑하지도, 그녀가 죽을까봐 노심초사 두려워하는 입장도 아니었으므로 그의 친구와 달리 느긋하게 대답했다.

“이렇게나 아리따우신 분이 아프신데 당연히 다들 안타깝게 생각할 테지요.”

“이제 신랑 되실 분이 이런 말을 하고 다니셔도 됩니까? 리젤로트가 화를 낼 텐데요.”

“리젤로트는 자신이 아롈보다 예쁘다는 걸 아니까요. 더 미인인 자로서 관용을 베풀어주겠지요. 괜찮습니다.”

아롈은 팔걸이를 잡곤 소리 내서 웃었다. 그녀는 웃다말고 다시 기침을 했다. 몇 번 헛기침을 한 소녀는 시녀에게 눈짓을 했다. 클레르라고 불렸던 시녀가 작은 상자를 가지고 와서는 미셸의 앞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 아름다운 신부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가져다주십시오.”

크기로 보아서는 보석 같았다.

“이것 때문에 부르셨습니까? 직접 주시는 편이 더 돈독해지실 수 있었을 텐데요.”

아롈은 대답을 하기 전에 시녀에게 과자를 가지고 오라고 시켰다. 한창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시녀가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시무룩하게 방을 나갔다. 미셸은 그제야 아롈이 실내악 악사를 불러다놓은 이유를 이해했다. 궁정에 소문을 퍼트릴만한 시녀가 없는 곳에서 남녀가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부정(不貞)의 의심을 없앨만한 목격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제 몰골이 이러해서, 임신부에게 보이기 저어되더군요. 곱고 아름다운 것만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그런 말씀을. 지금도 놀라울 만큼 ​아​름​다​우​십​니​다​만​.​”​

“리젤로트보다는 못합니다만?”

“그런 당연한 말씀을.”

다시 웃음. 그리고 기침. 소리가 가라앉은 자리로 목관악기의 가늘고 고운 독주가 이어졌다. 그 밑으로 경고가 반주처럼 깔렸다.

“미셸. 저는 누가 제 뒤에서 장난을 치는 걸 무척 싫어합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무척이나 직설적인 경고였다. 미셸은 순순히 사랑하는 사람 대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롈은 차를 한 모금 마셔 한 박자 쉬고는 말을 마저 이었다.

“그러니 무언가 꾸미는 걸 아시게 되면 부디 말려주시기 바랍니다.”

“아롈. 외람되오나 세시안과 화해하지 않으시면 리즈는 계속 그런 일을 시도할 텐데요.”

화해라는 단어에서 아롈의 눈썹이 마땅찮다는 듯 까닥였다.

“곧 결혼식이니 조금만 있으면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리지 않겠습니까.”

“아마 다 그 녀석이 잘못했을 겁니다. 가셔서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시면 잘못했다고 설설 길 거고요. 차마 고운 손을 못 올리시겠다면 ​대​리​인​(​c​h​a​m​p​i​o​n​)​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생각하시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아롈.”

“미셸. 이건 제 일입니다. 미셸이나 리젤로트가 참견하실 일이 아닙니다.”

아롈은 표정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도 훌륭히 선을 그었다. 피를 내어 그린다고 해도 분명하지 않을 것처럼 말투가 단호했다. 하지만 미셸이 보기엔 허점이 뻥뻥 뚫려있었다. 자존심을 세우고 있지만 스스로도 외롭고 불안한 마음을 다잡고 있는 것이 빤했다.

미셸은 시험 삼아 그 허점을 쿡 찔러보았다.

“예. 물론 부부간의 일이지요. 저는 그저 아롈의 친구로서 걱정이 되어 이러는 겁니다.”

“무슨 말씀을…….”

억지로 내리누르고 있지만 당황하는 기색 정도는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제 주제넘은 착각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롈은 그와 겪은 일들과, 그가 아롈에 대한 호의로 묻어준 일들을 떠올리는 듯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리즈도 아마 같은 마음일 겁니다. 이리 나날이 말라가시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하겠습니까. 특히나 원인을 안다면 참견하고 싶어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우정이 아니겠습니까.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그 때 마침 시녀가 돌아왔다. 그녀는 커다란 쟁반 가득 단 것을 들고 와 내려놓았다. 아롈은 마카롱을 입에 넣었다.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 말을 덧붙였으나 누그러진 기색이 역력했다.

슬슬 진심으로 친구의 상태가 의심되었다. 응접실에서 나가자마자 시의라도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 정말이야, 세시안? 이렇게 쉬운데 달래고 어르지 못했다고?

능력이 부족해서? 그럴 리 없었다. 다섯 살 때부터 세르였고, 여섯 대공가와의 사이를 조율해왔던 친구다. 미셸과는 비교할 수 없이 사람 다루는 기술이 나았다. 그럼 답은 하나뿐이었다.

아롈은 이왕 온 김에 의논을 하자며 응접실에 놓여있는 결혼식 준비 과정을 미셸에게 적당히 설명해주었다. 미셸은 설명을 흘려들으며 소녀의 옆모습을 관찰했다.

그만큼 좋은가?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물론 눈부시게 예쁘지만 그의 친구는 눈을 의미없이 달고 다니는 놈이었다. 미셸은 아직 리젤로트의 외모를 폄하한 것에 대해 친구에게 뒤끝이 남아있었다.

아롈의 성격은 보편적으로 여성에게 요구되는 미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내다운 것도 아니었다. 똑똑하지만 고집이 세고, 마음이 약하지만, 다소 신경질적이었다. 미셸은 그런 성격에 성적인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부류였으므로 이 소녀에게 반해 절절 매고 있는 친구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생각해보면, 소년 시절부터 미셸과 세시안의 여자 취향은 극단적이리만큼 달랐다. 두 사람이 같은 여자에게 매력을 느낀 경우가 전무했다. 실존 인물뿐만이 아니라 책이나 연극, 오페라의 등장인물을 포함한 결과였다. 페란토 공부를 위해서 서사시를 읽다 말고, ‘대체 그런 여자가 뭐가 좋으냐’라는 주제로 입씨름을 하다가 감정이 상해 주먹질로 발전하던 과거를 떠올리는데, 아롈이 그를 불렀다.

“듣고 계십니까?”

“아, 예. 죄송합니다.”

그는 다시 집중했다. 커다란 탁자 위에 이블린과 렌의 지도를 펼쳐두고, 그 위에 상아로 조각한 말들을 올려두었다. 아롈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다시 설명을 이어나갔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꽃다발의 말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생각을 치워두고 진지하게 설명을 듣던 오를레앙의 후계자는 다소 감탄했다. 아롈은 자기가 무얼 하고 있는지 사소한 일까지 거의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가문의 예비 안주인으로서 당연한 자질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그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해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릴 적에는 어른이 되면 모든 일이 완벽한 톱니바퀴처럼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완벽한 서류와 완벽한 계약서와 완벽한 계획들. 그러나 어른의 세계에서도 그렇게 돌아가는 일은 극히 일부 중대사뿐이며 중요하지 않은 일들은 적당히, 대강대강 돌아간다.

그런 면에서 결혼식 준비는 편집증적일 정도로 깔끔했다. 아랫사람들을 얼마나 고생시켰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사실 이런 식으로 일하는 것은 그녀 스스로의 결벽은 만족시킬지 몰라도 아랫사람들의 호감이나 환심을 사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미셸이 봤을 때 아롈은 그런 것에 그리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었다.

“대단하시군요.”

“무엇이 말입니까?”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준비하는 건 본 적이 없는 것 같군요.”

“북쪽에서는 대부분 이 방법을 씁니다.”

“전술 지도에서 영감을 얻은 겁니까? 비슷하군요.”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술지도와 다른 점은 시간에 따라 말이 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 색깔이 다른 말로 시간의 변화를 표시하는 방법 말씀이시군요. 하긴 일반적으로 꽃 장식에 발이 달려 스스로 움직이지는 않으니까요.”

“꽃 장식, 동선. 아, 여기.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아롈은 상아 펜대를 들더니 잉크를 찍어 메모를 써내려갔다. 새순 같은 눈에 진지함이 맺혔다. 작은 화살표를 여기저기 그리더니, 번호를 매기고, 붉은 잉크로 опр와 숫자 여섯 개를 적어 넣었다. 미셸은 북쪽 캬트 어에 무지했으므로 그것이 특정 날짜까지 결정해야 ​한​다​(​о​п​р​е​д​е​л​я​́​т​ь​)​는​ 뜻의 약어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여자의 미모에 대해서는 눈 뜬 장님이나 다름없는 친구가 반한 면이 무엇인지 흐릿하게 알 것도 같았다.

아롈은 마른 수건으로 펜촉을 닦은 뒤 조심스레 거치대에 내려놓았다. 미셸은 별 생각 없이 펜대를 집었다. 그러나 채 살펴보기도 전에 아롈이 펜대를 다시 낚아채갔다. 미셸은 무안해졌지만 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웃었다.

소녀는 낭패한 표정으로 펜대를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곱게 거치대 위에 올려두었다. 소중히 여기는 물건인 모양이었다. 미셸은 아닌 척 그의 눈치를 보는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친구가 사랑하는 여자였다. 기분이 상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모르는 여자라도 그 날의 기분에 따라 묻어줄 수 있는 가벼운 실수에 불과했다. 친구의 아내가 저지른 일인데 덮어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오래 서계시면 곤하실 텐데 다시 앉으시지요.”

예쁜 얼굴에 안도감이 퍼졌다.

미셸은 자리로 돌아와 아롈에게 칭찬을 한껏 해주었다. 숙녀치고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고, 미셸은 신사로서 숙녀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여쁘다는 칭찬을 할 때에는 시큰둥하게 받더니, 갈리아 어가 많이 능숙해졌다는 말을 하자 겸양의 말을 표하면서도 웃어보였다.

미셸은 찻잔으로 얼굴을 가리며 다시 한 번 개탄을 금치 못했다. 이런 쉬운 사람을 두고 며칠 째 냉전이라니.  아무래도 시의를 부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