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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0. 바라마지 않는 (17)


 솔직히 말하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할지 잘 모르겠어요. 시간순서대로 제가 겪어온 일에 대해서 하나하나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요. 그렇다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할 수도 없고요. 내내 고민했는데 뭐가 좋은 선택일지 모르겠군요.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요. 다 설명할 거니까요.

역시 이것부터 말하는 게 좋겠군요.

미안해요.

말하는 시기, 장소, 상황, 방식, 모두 제가 나빴어요.

아렐르를 다그친 직후에 설명도 없이 그래선 안 됐어요. 화내는 것도,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해요. 사실 적당한 때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제가 아렐르를 대화하도록 끌어낸 방식은 꽤 거칠었으니까요.

변명을 하자면, 저는 아렐르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고, 그 자리에서 그 말을 할 생각은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이걸 설명하려면 모후께서 잘못하신 날의 이야기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렐르가 제게 뭘 원했는지는 알아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그저 평소처럼 대해주길 바랐죠. 그런데 그러면 바뀌는 게 없어요. 분명히 똑같은 일은 계속 일어날 테고 저는 다시는 같은 일을 겪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렐르와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왜 그랬는지, 그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듣고, 공감하고, 안아주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해결해주고 싶었어요. 솔직히 아렐르가 그렇게 도망쳐버릴 줄은 몰랐지만요. 조금 화가 나있기도 했고요.

왜 화가 났냐하면, 목이 아프군요. 저도 우유를 마셔도 될까요? 고마워요. 아, 너무 달군요. 대체 꿀을 얼마나 탄 거지……. 음, 어디까지 이야기했지요? 아, 화가 난 것. 화가 났냐 하면, 아렐르가 저를 ‘아무 사람’ 취급했으니까요.

비약이라고요? 제 눈앞에서 손목을 그으려고 했잖아요. 아무 일도 아니라고, 저는 들을 자격이 없다고 밀어냈잖아요. 자살하려는 생각이 아니었다는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했잖아요. 자살이 아니면요? 자해는 괜찮은 건가요? 저는 아렐르가 죽지만 않으면 다치든 울든 그저 생글생글 웃으면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안아주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그런 관계에 의미가 있는 건가요? 아니, 그게 관계이기는 한 건가요?

결국 제가 화가 난 이유는 아렐르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어요. 저는 어느 순간부터 아렐르가 좋았고, 아렐르도 저를 어느 정도는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때 솔직하게 이유를 말하지 못한 이유는, 아렐르도 알다시피 제가 겁이 많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아렐르를 다그쳤고, 화를 냈고, 대답을 강요했어요. 미안해요.

제가 오만했어요. 아렐르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부모님께 반항, 반항이라는 단어가 제 상황에 어울리는지 모르겠는데, 반기가 좀 더 맞겠군요. 예, 부모님께 반기를 드는 한이 있더라도요. 부황께서는 편찮은지 오래 되셨고, 제가 강하게 나가면 적당히 들어주시리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어요. 지금까지 제 의견을 크게 내세운 적 없이 순종했으니까요. 폐하께서는 그런 쪽에는 계산이 명료하신 분이죠.

그런데 아렐르가 맞고 제가 틀렸어요. 아렐르의 말대로 저는 아렐르에게 계승권을 돌려줄 수 없고, 죽은 사람들도 되살려줄 수 없으니까요. 상처를 들쑤셔서 미안해요.

할 말이 있는 얼굴이로군요. 이야기해줄 수 있어요?

정말 할 말이 없는 것 맞아요?

알았어요. 생각나면 언제든 말을 끊어요.

윽. 정말로, 꿀을 엄청나게 탄 모양이군요. 식으니 끔찍하게 다네요. 아렐르가 그 사실을 지적한 순간 제 안에서는 죄책감이 화를 눌러버렸어요. 아렐르의 상실감을 과소평가했다는 죄책감이요. 이것이야말로 제가 아렐르에게 가장 미안해해야 할 부분일지도 모르겠군요.

저는 아렐르가 코시카 제위를 진심으로 원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저 자신이 로렌 제위에 대한 강한 열망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형이 죽은 순간부터 저는 대체재가 없는 후계자였으니까요. 앉아야하는 자리지만 반드시 포기해야 하는 이유가 생기면 분명히 저울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은연중에 아렐르도 그러리라고 생각했나 봐요.

알아요. 상황이 달랐죠. 아렐르가 직접 포기한 게 아니라 저와 로렌이 빼앗은 거니까요. 생각하기 싫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북쪽에서 혼자 시집 와서 외로울 거라는 건 짐작했지만 그런 쪽의 죄책감은 위로하고 잘해주는 걸로 상쇄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누구나 언젠가 결혼은 하는 거니까, 어떻게든 좋은 남편이 되어줄 수 있다고요. 제가 멍청했네요. 사려 깊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런데 한편으론 여전히 화가 나기도 했어요. 어리석은 저 자신뿐만이 아니라 아렐르에게도요. 왜 이런 걸 혼자 품고 있었을까? 지금까지 매일매일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단 한 번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계속 원망하고 있었는데 억지로 웃어보였던 걸까?

다시 말하지만, 저는 겁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런 질문을 던졌을 때 아렐르가 고개를 끄덕일까봐 무서웠어요. 혼란에 빠져 있는데, 아렐르가 제게 물었죠.

기억해요? 그 질문.

그 순간 화가 죄책감을 찍어 눌렀어요. 그래서 저는 도망쳤죠. 인정해요. 그건 도망이었어요. 그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고, 의문은 저를 좀먹고 있었고, 그 와중에 애정은 살아서 팔딱팔딱 뛰고 있는데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서. 그 중 가장 최신의 감정을 따랐어요. 황당했지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다음이 있다면요.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아, 질문.

아렐르에게 약속을 강제한 건 지금부터 할 이야기 때문이에요. 망자(亡者)를 건드리는 일은 되도록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예전에 예전 여자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후우. 솔직히 술이라도 있었으면 좋겠군요. 지금 이 상황이 조금 어렵네요. 아, 그냥 해본 말이에요. 사람을 부를 필요는 없어요. 잠깐 생각을 정리해도 될까요?

고마워요.

하아.

저는 없지만 가끔 특정 음식을 먹으면 숨을 잘 못 쉬거나 피부가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지요. 아렐르 주변에도 있었나요? 그녀는, 루이즈 마리는 견과류를 먹을 수 없는 병이 있었어요. 음식에 호두가 들어가면 항상 빼고 먹었거든요. 어렸을 때 땅콩을 잘못 먹고 숨을 못 쉬어서 죽을 뻔했다고 하더군요.

그 병 말고도, 그녀는 우울증이 있었어요. 울다가 지쳐서 축 늘어져 있는 일이 잦았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았죠. 저는 그 때 옆에 있어주지 못했어요. 바빴거든요. 그 때 폐하께서는 돌아가실 위기였고 저는 불안했어요. 정신적으로 꽤 몰려있는 상태였죠. 결혼 삼 년 째였는데 아이가 안 생겼거든요.

어느 날이었지, 유난히 기분이 좋아보였어요. 대화할 수 있는 날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차를 마시다가 제가 물었어요.

언제쯤, 아이가 생길까요? 그리고 사흘 후에 식사를 같이 하려고 찾아갔더니 그녀는 죽어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심장마비로 알고 있지만, 소지품을 정리하다가 땅콩이 든 병을 찾았어요. 은밀히 없앴죠. 자살한 사람은 교회식 장례를 치르지 못하니까요. 저는 생전에 아내에게 잘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의 원인을 숨기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아렐르가 죽는 게 두려웠어요. 아니, 지금도 두려워요. 아렐르가 창틀에 앉아있을 때 떨어질 거라고 생각한 것도 맞아요. 그 때는 아직 애정이라고 할 만한 감정이 아니었던 것도 맞아요. 아렐르가 외로워보여서, 가엾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아렐르, 공포와 동정과 애정은 각각 독립적이에요. 각각의 감정은 따로 존재할 수도, 한꺼번에 공존할 수도 있어요. 저는 그걸 알아요.

어떻게 아느냐고요?

왜냐하면 저는 마리 제피린느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죽었을 때 슬펐으니까요.

아직도 가끔 생각나곤 해요. 죽은 얼굴이나, 생전에 했던 말들이.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하고요. 하지만 제 후회나 안타까움이 전처들에 대한 연인으로서의 애정을 확증하는 건 아니에요.

그 얼굴은 무슨 뜻인가요? 결혼한 뒤 사랑에 빠져 사는 부부는 드물지 않나요? 연애결혼은 말할 것도 없이 희귀하고요.

마리 제피린느는, 제 첫 번째 아내는 저 말고 혼전부터 사귀던 애인이 따로 있었어요. 제게도 특별히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요. 결혼하기에는 신분이 낮은 기수 가문 출신의 남자였죠.

그녀는 아이를 낳고 나서 일 년 정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어요. 의사가 말하길 피를 너무 많이 쏟아서 그랬다고 하더군요. 그 애인은 매일 병문안을 왔었죠. 간혹 병간호를 하다가 그 애인을 위해서 자리를 비켜주곤 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음, 벌레라도 보는 듯한 얼굴인데, 망자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군요. 저 때문이 아니라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켜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제가 열네 살에 마리 제피린느와 결혼했을 때 그녀는 열아홉 살이었어요. 십 대 시절의 다섯 살은 크지요. 저는 어떻게든 검술을 배우기 싫어서 안달하는 어린애였어요. 제가 수업을 빼먹으려고 꾀병을 부릴 때 그녀는 이미 성숙한 어른이었으니까요. 제게 흥미를 느끼는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겠죠.

그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살았더라면, 아니 이런 가정을 하는 자체가 아렐르에게는 무례한 일이지만, 살아있었더라면 계속 그렇게 살았을 거예요. 아이를 생기는 대로 낳았을 거고, 그녀는 사귀던 애인과 쭉 사귀든가 혹은 새로운 애인을 만들었을 테고, 저도 따로 애인을 두었을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저는 그녀의 장례식에서 울었어요. 평생 같이 하리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사람의 죽음이 막막하기만 했어요. 두려워하고, 미안해하고, 죽음을 추모하고, 생전에 조금 더 잘해줄 걸 후회하는 데에 남녀 간의 연정이라는 거창한 감정은 필요하지 않았어요.

루이즈 마리 때에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그녀를 가엾게 여겼어요. 고아였고, 의지할 데가 없었고, 항상 힘이 없었죠. 조금만 더 잘해주고 마음을 헤아려주었으면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 한 쪽이 따끔거려요. 죄책감이죠. 하지만 단언하건대 그녀를 사랑하진 않았어요.

동정 때문에, 죄책감 때문에 잘해주는 거라고 했나요? 시작은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에요.

아렐르가 죽을까봐 무서워요. 창가에 앉아있을 때는 정말로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고, 얼마 전에 아렐르가 쓰러졌을 때에도 두려웠어요. 곁가지로 얘기하지만 그 때는 정말로 심장이 짓이겨지는 줄 알았어요.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까봐, 밤새 한숨도 못 잤어요. 부탁이니까, 어떻게 살게 되든 건강만은 챙겨줘요. 제발요.

아렐르가 가엾다고 생각해요. 마음 붙일 곳 없이 외로워보여서, 채워주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고 싶었어요.

계승권이나 어머니, 아버지께서 아렐르에게 저지른 일로 아렐르에게 많이 미안해요.

아렐르가 죽은 사람에게 예의 없는 말을 해서 화가 났어요.

하지만 저는 이 모든 감정과는 별개로 아렐르를 사랑해요. 다시 말하지만, 저는 사랑을 다른 감정과 착각하지 않아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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