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문화 콘텐츠 사이트 삼천세계

여름 눈송이


10. 바라마지 않는 (18)


 현악기 같은 목소리가 절절했다.

아롈은 혼란스러웠다. 그의 이야기를 모두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생각의 전제부터 틀렸다. 어디부터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거짓이지? 그럼 지금까지 아롈이 느껴왔던 감정은 정당한 걸까?

“그 전에는 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지요. 그건…….”

“잠깐.”

목소리가 뚝 멈추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얼마든지요.”

대답이 평소보다 약간 급하게 나왔다. 그가 두르고 있는 얇은 여유가 바스락거린 듯했다. 그 옛날, 알렉산드르는 나탈리야가 주변에 있으면 정말로 얼간이처럼 굴었다. 아롈이 멍청해 보인다고 타박을 주면, 애정은 숨길 수 없는 거라며 한층 당당하게 바보짓을 했다. 세시안은 사샤와는 달랐다. 없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주변을 맴도는 대신,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흐릿한 웃음은 흠잡을 데 없이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그의 발끝이 눈에 들어오지만 않았더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소가죽 구두를 신은 발끝이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바닥을 쳤다. 그에게는 그런 습관이 없었다. 초조해보였다.

아롈은 이미 식어버린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혀가 아릴 정도로 달콤했고, 지금까지 남편이 늘어놓은 말처럼. 서늘했다.

사랑한다고 했다.

아롈을 가엾게 여기고, 아롈이 무례해서 화가 났고, 아롈이 죽을까봐 두렵지만 그 모든 것과는 별개로 사랑한다고.

그의 말에 따르면, 그가 지금까지 아롈에게 베풀어주었던 것들이 죽은 여자에 대한 대리물로서의 애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롈이 걱정할 정도로 그가 무리했던 이유는 분명 그 여자의 죽음 때문이었다. 시작이 동정과 죄책감이라는 인정과 어울려 두 가지가 아팠다.

아롈은 눈부신 속눈썹을 내리깔고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차근차근 복기하고 그 순간 아롈이 느낀 감정들을 곱씹었다. 그의 말은 분명 상당 부분 진심으로 들렸지만, 어느 정도 의도적으로 감추었든가 넘어가버린 부분이 존재했다. 그런 부분들이 불협화음처럼 신경을 거슬렀다.

원래대로라면 캐묻지 않아야 했다. 그것이야말로 아롈이 그토록 원하던 거리감이다. 숨길 이유가 있으니 숨기는 것일 테지. 관계를 이어갈 생각이 있으면 모른 척 해주는 것이 존중의 일환일 터였다. 관계를 끊을 생각이라면 천박한 호기심을 드러내는 건 무의미하고.

하지만 아롈은 지금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었다. 멋대로 결론을 내리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므로, 마음속에서 불쑥 올라오는 불신과 신뢰의 양단 중 어느 쪽의 손을 드는 것이 불가능했다.

아롈은 안락의자의 팔걸이를 꼭 쥐었다. 의외의 진실, 혹은 진실을 가장한 고백은 지금까지 아롈이 생각하고 결정한 것을 전부 엎어버린 것은 물론이요, 새롭게 생각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이런 작업은 심력을 소모시켰다. 이런 날에 이런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냉정해라.

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망치고 싶지 않았다. 멋대로 결론을 내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보가 더 필요했다. 서류를 올리라고 명령할 수도 없는 일이니 대화를 해야만 했다.

그 점이 아롈을 구석으로 몰아갔다. 로렌에 오기 전에 아롈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해준 사람은 알렉산드르가 유일했다. 그리고 그는 아롈이 성숙하게 다른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전에 떠나 버렸다. 아롈은 자신의 사교 능력을 과대평가 하고 있었으므로, 이 점에 대해서 명확히 자각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둘 다 명료한 정신인 상태로 일 대 일로 남편과 대화해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롈의 아랫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지위로 찍어 누를 수도 없었다. 기실 이런 대화에서 승패의 존재를 당연시하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었으나, 아롈이 쌓아온 인간관계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머리를 장악했다. 미간을 문지르는 걸로 참아내려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성 소피야 훈장의 별에 대고 맹세했지만, 당장이라도 빌어먹을 별을 던져주고 도망치고 싶었다. 굉장한 압박감이었다.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약속했는데. 퇴로가 없다. 멈춰서 있지 않기로 했다. 아롈은 체념한 듯 웃었다. 그럼 전진해야 한다. 전진하려면 행동해야 한다.

“전하.”

“예.”

“제가 뭔가 질문하면, 대답해주실 겁니까?”

“저와 이야기할 생각이 생긴 건가요?”

“원하시던 바가 아니었습니까?”

“맞아요."

“그러면…….”

목에 울컥하고 응어리가 치밀었다.

“전하께서도, 도망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는 몹시 정중한 태도로 가슴에 손을 얹었다. 항상 손톱을 물어뜯는 아롈과 달리 잘 손질된 손톱에 손가락 모양이 곧았다.

"약속하지요."

아롈은 뜸을 들이며 질문을 고르다가, 결국 가장 궁금한 이야기를 물었다.

“묻지 않은 부분까지 먼저 알려주신 건 솔직하게 보이기 위한 화술의 일종입니까?”

“더 정확히 말해주겠어요?”

“방금 전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저 뿐입니까?”

“불행하다 싶은 과거를 너절하게 늘어놓고 동정심을 유발하면서 여자들의 환심을 살 만큼 욕정에 고픈 삶을 살지는 않았어요.”

한두 단계를 뛰어넘고 튀어나온 정확한 대답에, 아롈은 움찔했다.

“원래대로라면 아렐르에게도 설명할 생각 없었고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에요. 미셸조차도. 그러니 아렐르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하는군요. 샤를루아 공작이나 그 일가를 포함해서요.”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아롈은 그의 감정을 가늠해보았다. 아직까지 격앙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또 할 말이 없어졌다. 대화에는 어느 정도 '공식'이 존재했다. 그것은 마치 체스에서의 정석과도 같아서 상대의 대응에 따라서 이쪽이 낼 대응과, 그 반대가 대부분 정해져 있었다. 아롈은 그것들을 이해하기보다는 우선 외우는 길을 선택했다. 차근차근 배울 시간도 상대도 없었다. 외우기만 해도 범인에게는 벅찬 양이었다. 좋은 암기력과 나쁘지 않은 직관에 조부의 후광과 스스로의 신분을 더해 아롈은 신하들에게 적당히 그럴 듯하게 보이는 법을 익혔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 나온 순간부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기밀 사항의 거래, 명령, 회유, 협박은 알아도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암기한 것들이 체화되기라도 했더라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롈은 배운 것들이 채 몸에 배어들기 전에 이곳에 떨어졌다. 결국 경험 부족이었다.

한참이나 침묵이 흘렀다. 세시안은 끈기 있게 아롈을 기다려주다가 결국 먼저 말을 꺼냈다.

"그게 질문의 전부인가요?"

"……."

"더 물어봐도 좋아요.“

"도서관은..."

말을 흐리면 천치처럼 보일 텐데. 벼락같은 호통이 들리는 것 같아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아롈이 채 말을 고치기도 전에 대답이 날아왔다.

"보여준 건 아렐르가 처음이에요."

기쁘기보다는 의심이 생겼다. 결혼 세 번에 약혼 세 번. 그 이외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애인이나 정부들. 그 중에서 아롈만이 특별했다고? 아롈이 그와 결혼한 아내이기 때문이리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앞의 두 여자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왜?

그 둘과 뭐가 달라서?

신분 밖에는 다를 것이 없지 않나?

"표정이 좋지 않군요.“

"지금껏 전하께서 애정을 가지신 상대가 저 하나 뿐입니까?“

"유감스럽게도 아니에요. 과거에 두세 명쯤 있었어요. 도서관은 그 중 한 명에게 이야기한 적은 있지만 직접 보여주기 전에 관계가 끝났고요."

"끝났다는 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얼굴이 조금 난감해졌다.

"정 듣고 싶다면 대답해줄 수는 있지만요. 제가 과거에 누굴 만나서 어떻게 반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왜 관계가 끝났는지 일일이 설명하는 걸 정말 듣고 싶어요? 그리 추천하고 싶지 않은데요."

아롈은 그를 노려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끝난 관계. 끝난 애정.

그 말은 언젠가 아롈도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이런 사치스러운 생각은 진심이라고 확신한 다음에나 하자. 아롈은 땋은 머리를 반대쪽 어깨에 얹었다. 벽난로에 따끈하게 데워져 거슬렸다.

"이유가 궁금한 것 같은데, 비밀 장소를 알려준 건 아렐르와 가까워지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맥이 풀렸다.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좋은 남편이 되어주고 싶었어요. 비밀의 공유와 선물만큼 효율적인 계기는 찾기 힘드니까요."

분명히 효과는 있었다. 정말로, 정말로 좋았다. 미셸이 그 때 받은 선물에 잠시라도 손대는 게 싫을 만큼 좋았다. 이유를 알 수 없던 그의 호의에 어리둥절했었다. 그래서 거절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었고, 정의관에 갔고, 그 날 같이 밤을 보냈다. 그 날 아롈의 연정은 크게 자랐다.

하지만 분명히 석연찮은 부분이 남아있었다.

“그 때, 전하께서는 저를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의 애정은 인정한다는 건가요?”

-다 듣기만 해요. 그래도 제 감정이 납득되지 않는다면, 아렐르가 원하는 대로 해요.

그와의 거래에 걸린 것은 그의 감정에 대한 인정이었다. 인정한다고 이야기하면 지는 것이다. 아롈은 눈을 피했다. 그가 짧게 웃었다.

“떠봐서 미안해요. 음, 그 때에도 어느 정도 감정은 분명히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 좋다고 생각한 이후의 일이군요. 굳이 이름 붙이자면 애정보다는 호감에 가까웠지만요.”

긍정이었다. 아롈은 입술을 깨물었다.

“애정이라 할 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아주 엄격하게 따지자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제 감정을 알고 계셨습니까?”

말이 휙 다른 곳으로 튀었지만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쳤다.

“아무 것도 아닌 실수라고 한 그 이야기 말이라면, 예. 도서관에 있을 즈음에는 모르지 않았어요.”

아롈은 끓어오르는 뱃속을 가라앉히려고 숨을 몇 번 들이쉬었다. 이미 짐작한 대답이었다. 수치심 때문에 귀가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장작에서는 여전히 타닥타닥 소리가 났다.

“그럼, 제게만 특별히 호의를 품고 대해주신 이유는 제 감정을 알고 계셨기 때문인 겁니까?”

한동안 멈추어있던 발끝이 다시 툭툭 바닥을 쳤다.

“질문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 했어요. 다시 설명해줄 수 있을까요?”

“결국, 제가 죽어 버릴까봐, 제 감정을 충족해주려고 연인 노릇을 해주신 거냐고 질문한 겁니다.”

그의 어깨가 잠시 늘어졌다. 초록빛 눈이 기묘한 빛을 띠었다.

“방금 전까지 대화할 생각이 있었으면서 갑자기 밀어내는 이유가 뭔가요? 제 대답이 아렐르의 심기를 거슬렀나요?”

“그런 것 아닙니다.”

“지금 제 말을 믿어선 안 되는 이유를 찾는 것처럼 보여요. 시작이 동정과 죄책감이었다는 건 아까도 이야기했어요. 도서관을 아렐르에게 알려줄 때에는 이미 감정이 시작된 다음이었다고도 말했고요. 다 들은 이야기를 말만 바꾸어 묻는 건 이유를 따로 떠올리기 어렵군요.”

그는 담담하게 지적했다. 말문이 막혔다.

“아렐르. 저는 지금 최선을 다해서 솔직하게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은 대부분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말들이에요.”

“모르겠습니다.”

“조금만 더 자세히 이야기해줄래요?”

“전하의 고백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어느 쪽이든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아롈은 등 떠밀리듯 대답했다.

“동기(動機) 말씀입니다. 거짓이라고 가정한다면, 이러실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이미 몇 번이나 죽지 않겠다고 단언했습니다. 여기까지 저를 몰아붙이실 시간에, 제게 죽지 않는다고 맹세하게 만드는 게 더 편하셨을 겁니다. 그 다음은 절 그저 내버려두고 다른 사람을 만나시면 됩니다.”

“누구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요. 하지만 부부 간에는 정절의 의무가 있지 않나요?”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굴까. 아롈은 의문을 접어두고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당위만을 늘어놓았다.

“아까 마리 제피린느의 일을 말씀하실 때, 그녀가 살아있었더라면 애인을 만들 생각이 있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정절의 의무가 최근에 들어 갑작스레 생긴 덕목은 아닙니다.”

그가 언뜻 웃었다. 낮달 같은 웃음이 금세 구름 뒤로 숨었다.

“제1 후계자로서, 적자를 낳을 의무를 포기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제게 거짓 고백을 하셔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럼,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나요?”

“진심이시라면 더 말이 안 됩니다.”

“왜요?”

“절더러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잖습니까.”

“그게 제 애정에 대한 반증(反證)이 되나요?”

“제가 원하면 자비관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의무도 등한시해도 좋다고, 아이를 낳을 필요도 없고, 시골로 내려가도 좋다고 하셨잖습니까.”

말을 내뱉으면서 생각이 정리되는 듯했다.

“저를 놓아주겠다고……. 그것도 순전히 제 의지에 따라서.”

“아렐르에게는 좋은 이야기잖아요?”

“모른 척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정말로 못 알아들으신 겁니까? 저는 소유욕 없는 애정이 존재할 리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소유욕 없는 애정은 없다, 저는 아렐르에 대한 소유욕이 없어 보인다, 따라서 저는 아렐르에 대한 애정이 없다, 뭐 이런 이야기인가요?”

차마 고개를 끄덕이기는 어려워 괜히 숄을 여민 브로치를 만지작거렸다. 대량으로 보석을 주문했더니 덤이라며 따라온 잡다한 은세공품 중 하나였다. 잎사귀 부분에 박아놓은 홍옥수(紅玉髓)가 손끝에 감겼다.

“제가 옆에 있는 게 싫다고 했잖아요?”

“…….”

“저도 당연히 소유욕이 있어요. 아렐르가 우는 게 더 싫을 뿐이에요.”

그를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던 얇은 여유가 어디론가 사라져있었다. 세시안은 일어나 아롈의 발치에 무릎 꿇고 앉더니 큼지막한 손으로 아롈의 손목을 낚아챘다.

아롈은 손목을 빼려고 했지만 그의 힘이 훨씬 강했다. 어쨌거나 성인 남자의 힘이다. 아롈의 검술을 배웠던 건 십 대 초반이었고, 그나마도 그만둔 지 한참이었다. 근육은 다 빠지고 손바닥에 박였던 굳은살도 사라졌다. 근력 자체가 달랐다.

서너 번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팔에 힘을 뺐다. 손은 여전히 잡힌 그대로였다.

숲 같은 초록빛 눈이 물끄러미 아롈을 올려다보았다.

“이래야만 애정인 건가요?”

시험공부 하기가 너무 싫어서 올립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P.S. 제가 생각해도 요즘 좀 텐션이 늘어지는데 퇴고할 때 최대한 타이트하게 줄여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감정선에 집중하는 걸로 할게요!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