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바라마지 않는 (20)
이마에 드리운 머리카락을 치우는 손길에 문득 잠이 깼다. 아롈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엉엉 운 뒤 잠들어서 그런지 머리가 무거웠다.
“으응…….”
여전히 정의관 응접실이었다. 하늘은 어두컴컴한 구름으로 가득했고 가구들은 부드러운 어둠에 파묻혀 있었다. 잘게 바스러지는 빗소리가 아득했다.
“깼어요? 어쩌죠. 미안해요.”
목소리가 달콤했다. 목덜미가 오싹했다. 무심코 몸을 일으키려다 손이 잡혀있는 걸 알았다.
“아닙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간밤에 한 번 터진 눈물이 쉽사리 마르지 않았다. 처음엔 웃으며 안아 도닥여주던 남편이 당황해서 달래려 애쓸 정도였다. 탈수로 쓰러질까봐 억지로 물을 마신 다음 그대로 기절했던 것 같다. 어찌된 영문인지 분명 앉아있었던 안락의자는 어디로 가고, 손님 접대용 장의자에 남편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었다.
-사랑해요.
꿈이 아니었구나. 슬쩍 입술 안쪽을 깨물어보았더니 통증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롈은 몸을 일으키는 대신 깍지 낀 손을 꼭 쥐었다. 어리광이었다.
세시안은 아롈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좋은 꿈 꿨나요?”
“오늘은 꿈을 꾸지 않았습니다.”
아롈은 잠시 망설이다가 질문을 덧붙였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아뇨, 한숨도 못 잤어요.”
“밤을 새신 겁니까?”
자세가 불편해서 잠을 못 잔 걸까? 하지만 성당에 앉아서도 요령 좋게 잘만 자던 사람인데. 대회의만 끝나면 푹 자리라고 다짐하던 사람더러 밤을 지새우게 만든 것이 못내 마음 불편했다.
“눈이라도 붙이지 그러셨습니까.”
세시안은 깍지 낀 그대로 손을 들어 올려 아롈의 손끝에 입술을 대었다.
“저는 지금도 꿈을 꾸고 있어서 잠들지 않아도 괜찮아요.”
뜻을 이해하자마자 얼굴은 물론이요 귓불과 목덜미까지 타오르듯 붉어졌다. 아롈은 꼬리 밟힌 고양이처럼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팔이 꺾여 다칠까 염려되었는지 그는 바로 손을 놓아주었다. 뺨이 페치카(화덕)에서 갓 나온 빵처럼 따끈따끈했다.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얄미웠다.
“미셸과 친구이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그 녀석보다는 훨씬 담백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아무에게나 그런 입에 발린 소리 못 해요.”
“방금은 충분히 입에 발린 말씀이었습니다만.”
“일단 아렐르는 아무 사람이 아니잖아요? 이리 와요.”
아롈이 움직이지 않자 그가 가까이 다가와 몸을 붙이고 끌어안았다. 놀라지 않을 만큼 느릿한 움직임이었다. 못 이기는 척 품에 안겨 어깨에 턱을 괴었다. 포근했다.
“그리고 입에 발린 말이라니 섭섭하군요. 진심인데요.”
저는 지금도 꿈을 꾸는 것 같아요. 그가 근사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가 들을까 두려울 정도로 상투적인 말인데도 두근거렸다. 언제부터 이런 말에 설레게 되었을까. 미셸이 오만 가지 미사여구를 붙여서 아첨할 때에는 미동도 하지 않던 마음이 퍼덕거렸다.
“낯부끄러운 말씀을 아무렇잖게 하십니다.”
“아렐르를 평생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가슴 한 구석이 묵직해졌다. 등을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아롈은 괜히 발끝으로 허공을 휘젓다가 자그마하게 웅얼거렸다.
“이제 계속 곁에 있을 겁니다.”
“그럼 먼저 이야기해주면 안 돼요?”
“예?”
포옹을 풀고 얼굴을 마주하자 그가 생긋 웃으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끓는 것처럼 뜨거워진 귓불에 서늘한 손길이 스치는 감촉이 선명해서 묵직하게 고여 있던 졸음이 달아났다.
“듣고 싶어서요. 아렐르가 먼저 이야기해주면 안 될까요?”
“곁에 있겠습니다.”
“그것 말고요.”
“나중에 들려드리겠습니다.”
“부끄러워서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에 대한 애정은 부끄럽지 않았다. 정절과 신의를 맹세한 정당한 관계다.
오히려 사샤에 대한 이야기가 부끄러웠다. 열여섯 살이나 먹었는데 어린애처럼 엉엉 울면서 오빠가 자기를 버리고 갔다는 이야기나 하다니. 직접적으로 버렸다는 단어를 입 밖에 내뱉은 것은 아니지만 뻔히 눈치를 채였을 것 같았다.
“그러면요?”
대답을 늦추고 싶어서 땋은 머리를 풀어 다시 느슨하게 땋아 내렸다. 올린 머리가 좋다고 했던 기억이 뒤늦게 났지만 머리를 틀어 올리는 법은 모른다.
“아렐르. 저는 말해주지 않으면 몰라요.”
거짓말.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마음을 벌써 다 알고 있었다고 했으면서. 아롈은 그 모순을 지적하는 대신 밧줄처럼 굵게 땋은 머리채를 어깨에 걸쳤다. 끈으로 묶지 않아 끄트머리가 조금 풀리다가 멈추었다.
“함부로 이야기하면 닳을 것 같습니다.”
갓 존재를 허락받은 감정은 소중하고, 또 소중해서 감히 가슴에서 꺼낼 수조차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슴에 손을 올려보았다. 애정을 흠뻑 품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간밤의 기억을 되새기는 것조차 아까웠다. 말랑하고 여린 감정을 함부로 입 밖에 냈다가는 여기저기 굴러다니며 멍들고 조각날 것 같았다.
“그럴 리가요. 속마음을 꺼내어 말한다고 닳는 법은 없어요.”
그가 손을 내밀었다. 손을 얹자 남편은 약혼반지의 진주 위에, 그리고 손등 위에 입 맞추고는 서글서글한 웃음을 머금었다.
“저는 아렐르를 사랑해요.”
물에 떨어진 잉크처럼 구석구석 스며드는 고백이었다. 마음이 몽실몽실 부풀었다. 빛나는 가루가 혈관을 타고 춤추는 듯 행복해서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너무 아깝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 달콤해서 이렇게 즐기다가 막상 정말 필요할 때 못 듣게 되면 어쩌나 무서웠다.
“아무 때에나 들어도 될 말이 아닌 것 같아서……, 아껴듣고 아껴 말하고 싶습니다.”
힘이 되는 기억이 있다.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긍지와 책임이지만 긍지와 책임이라는 두 개의 기둥 사이로 미처 막지 못한 마음의 가루가 부스러질 때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들. 어제 들은 사랑한다는 말도 마음의 갈피에 넣어두고 곱게 말리고 싶었다. 열쇠로 잠그면 아무도 가져가지 못하겠지. 그 말이 썩은 낙엽처럼 흔해지면 서글플 것 같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아롈을 끌어안았다.
“저는 볼 때마다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그는 이마며 눈꺼풀, 뺨과 콧날에 차례차례 입술을 눌렀다.
“이렇게 마음이 넘쳐흐르는데, 말하지 않고 참으라는 건 가혹해요.”
“그래도, 매일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그 의미가 퇴색될까봐 겁납니다.”
“아렐르가 질리지 않게 매일매일 바꾸어서 이야기해줄게요. 그래도 질리면 이 말을 기억해줄래요?”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고, 이마가 이마를 살짝 받았다. 눈빛에서 꿀처럼 진득한 애정이 뚝뚝 떨어져 도저히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마치 태양이 매일 새롭고도 예스럽듯이.”
아롈은 희미하게 그 시구를 기억해냈다.
내 사랑은 매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랍니다.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대답하자마자 와락 품에 안겼다.
“사랑해요.”
걱정과는 달리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도 둔탁하게 울리는 심장소리도 전부 좋기만 해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번에야말로 베일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마귀가 탐해서 행복한 시간을 박살내면 어쩌지.
아롈은 두려움을 떨치려 방금 들은 시구를 속으로 되새겼다.
마치 태양이 매일 새롭고도 예스럽듯이.
속으로 적당한 대구를 지어서 붙여보았다.
마치 매일 아침 첫 숨이 절실하듯이.
그런 애정이 갖고 싶고, 그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희한하다. 계속 욕심이 났다. 사랑해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았는데 사랑한다 말하는 남자가 있으니 바라는 마음이 늘어나기만 했다.
“전하.”
“예.”
“욕심 많은 사람은 싫으십니까?”
“무슨 일인가요? 갖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아롈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전 다른 남자 싫습니다.”
“예. 다른 여자 근처에도 안 갈게요.”
운도 띄우기 전에 속을 훤히 내비친 것 같아 창피했지만 그보다 기쁨이 더 컸다. 바깥엔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어둡기만 한데 마음은 환하게 밝기만 했다.
“제 신의와 정절은 이미 아렐르에게 줬어요. 그러니 꼭 움켜쥐고 간직해줘요.”
“예.”
허리를 세우다가 눈이 마주쳤다. 입술이 겹쳐졌다.
절대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신의로서 대하고 싶었다. 아롈은 그 순간부터 사랑하는 사람에게 털어놓을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