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바라마지 않는 (21)
앤 마리아 폰 레르헨펠트는 자비관에 돌아와 아롈을 기다렸다. 하녀들을 시켜 샹들리에를 켜고, 불을 지펴 습하고 눅눅한 공기를 바짝 말렸는데도 아롈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오지 않았다.
앤은 다소 걱정이 되어 자신의 방에 돌아가 문을 걸어 잠그고 소금물을 만들었다. 물에 파란 보석을 담그자 귀여운 짐승의 모습을 한 용으로 화했다.
“벨타 님.”
[왜?]
“전하께서 왜 돌아오지 않으시는지 모르겠어요. 혹시 세르와 함께 계시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거라면…….”
앤의 주인은 뾰족한 한 자루 창검과도 같은 소녀였다. 고집이 세서 차라리 부러질지언정 부드럽게 휘어지는 법이 없었다. 세르와 싸운 뒤로 나날이 말라가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싫은 사람은 절대 두고 보지 못하는 그 성격에 맞는 옷이 없을 지경이었다.
아롈의 시녀들은 남자가 그 정도로 굽히면 받아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앤은 수석시녀로서 주인이 뒷말을 듣지 않도록 시녀들의 입을 단속하기는 했지만 생각은 비슷했다.
벨타는 코웃음을 쳤다.
[넌 그 애를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니?]
“저 빗속에 계신데 어떻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앤, 내 계약자가 마음을 먹었을 때 그 애를 죽일 수 있는 인간은 몇 없단다. 그러니 네 사정이나 챙기렴.]
벨타는 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더니 발라당 몸을 뒤집어 배를 보이고 누웠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시큰둥했다.
“그래도요.”
[정말이야. 그 애가 마음만 먹으면 어지간한 사내들은 눈길이 닿은 순간 머리가 터져 죽을 거란다.]
섬뜩한 내용인데도 벨타는 소리 내어 깔깔거렸다.
“그런 말씀 마세요.”
[하긴 여려빠져서 그렇게는 못하려나. 참 피곤하게 산단 말이야.]
앤은 벨타가 재잘재잘 떠드는 주인의 험담을 흘려들으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따끔하더니 피가 빨려나갔다.
[그러고 보니 요즘 매일같이 웬 사내놈이 찾아와서 얼쩡대다가 가더구나.]
앤의 안색이 변했다.
“예?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사옵니까?”
[그걸 내가 어찌 아니? 소리만 들었는데. 아, 사내인 건 소리만 들으면 안단다. 발소리가 달라서.]
피를 다 빨아먹은 벨타는 입김을 불어 앤을 치료해주었다.
[너, 뭔가 잘못한 게 있구나?]
“고해는 마쳤사옵니다.”
[고해는 결국 자기 마음 편해지려고 하는 거지. 왜, 내 계약자의 물건이라도 훔쳤니? 내가 몰래 가져다 팔았다고 이야기해줄까?]
목걸이가 생각나 안색이 변했다. 앤은 벨타가 은근히 그녀를 떠보는 것이라곤 생각도 못하고 손사래를 쳤다.
“그런 것 아니옵니다.”
앤은 속으로 몇 번이나 신에게 기도했다. 잘못했사옵니다. 잘못했습니다, 주님. 이렇게 계속 거짓을 읊는 죄가 늘어납니다. 회개하옵나이다. 이걸로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소녀의 착각이었습니다. 다시는 똑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앤은 그녀와 몸을 섞은 사내들의 이름도 얼굴도 몰랐다. 기억나지 않았다. 아이를 가지면 어쩌지 전전긍긍하며 하녀들을 채근해서 얻은 약을 먹고 누워있었다. 다행히 앤의 몸에 아이는 들어서지 않았지만 얼굴도 모르는 남자들과 몸을 섞었다는 죄책감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때문에 앤은 요새 위축되어 지냈다. 뒤에서 창녀라는 소문이 나면 어쩌지. 저 여자가 나랑 잔 여자라며 소문이 나면 어쩌지. 앤의 걱정은 날로 깊어졌다. 그런데 남자가 찾아오다니.
[흐응.]
벨타는 그런 앤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욕망은 마법의 근원이며, 벨타는 마법을 기반으로 한 생물이었다. 욕망에는 솔직했다. 벨타는 거짓말을 즐겼지만, 스스로에게는 아주 솔직했다. 그런 면에서 인간들은 참 이상하게 산다. 정말 원하는 게 있는데 왜 얻으려 하지 않지?
용의 삶은 길지만 인간의 삶은 짧다. 당장 가지고 싶은 걸 가지지 않으면 언제 가지려고?
앤은 반짝반짝한 것들을 아주 많이 좋아했다. 관심 받는 것도 좋아하고, 남자도 좋아했다. 그런데 왜 아닌 척 얌전히 뒤에 숨어서 조용히 몸을 사리고 있을까. 이해할 수 없었다.
보석을 잔뜩 긁어모아 몸에 두르고 앞에 나가 남자들과 신나게 몸을 섞고 다니는 게 행복한 삶 아닌가?
인간은 너무 어렵다.
조금만 더 잘 알았더라면. 후회가 금세 뇌리를 맴돌고, 벨타는 꼬리로 수면을 탁탁 쳤다.
[잤니?]
“어떻게 그런 말씀을…….”
[잤구나?]
벨타는 꼬리를 흔들었다.
[뭐 어때? 네 주인도 많이 자던데. 걔가 너보다 더 어리지 않니?]
앤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저, 전하께서는, 결혼하신 분이시고, 저, 저, 저는 미혼의 처녀인지라……. 벨타 님. 이 일은 제발 비밀로 해주세요.”
[내가 말할 인간이 너랑 계약자 밖에 더 있니?]
“전하께도 비밀로 해주세요, 제발요.”
벨타는 어여쁜 계집아이들에게는 관대했다.
[관심 없단다. 그리고 넌 나가봐야 할 것 같은데.]
“예? 무슨 말씀이세요?”
[또 왔구나. 그 때 그 사내새끼.]
앤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차는 입에 맞느냐?"
"예, 폐하."
로렌의 황제이자 칠 인의 맹세의 맹주인 루이 오귀스트는 턱을 괴고 눈앞의 소녀를 응시했다. 소녀는 단정하게 찻잔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흰 이마는 진주를 갈아 바른 것 같고, 곱게 틀어올린 머리카락은 햇빛을 물레에 감아 뽑아낸 듯 밝았다. 황제는 마치 물건을 고르듯 평가를 내렸다. 과연 사내라면 누구든 탐을 낼 만 한 낯짝이다. 창부나 여염집 딸로 태어났으면 정부로 삼아 옆에 두고 귀여워했을 것을, 저 어미도 저 계집아이도 괜히 귀한 집 딸로 태어나 아름다운 겉가죽 속에 독처럼 쓸데없는 심성을 품다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쿨럭. 쿨럭, 큭."
황제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기침을 했다. 피가 묻어나왔다. 그는 스러져가는 육체를 강인한 욕망과 위엄으로 지탱하고 있었다. 오랜 음주로 인해 안색이 누렇고 칙칙해졌고, 청년 시절 황후를 반하게 했던 얼굴은 병으로 시들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흙으로 돌아갈 날이 더 가까운 나이가 된 지 오래였지만 그는 여태 버티고 있었다.
"그래. 요즘 별고 없느냐."
"감히 폐하의 위엄에 도전하여 소녀에게 해를 입힐 이가 과연 존재할는지요."
페란토 어로 묻자 매끄러운 페란토 어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얼굴뿐만 아니라 이런 면도 같잖게 코시카 여제 위에 올라앉아 우쭐거리고 있을 그 어미와 꼭 닮았다.
황제는 심심풀이로 이런 저런 언어를 섞어 질문을 했고, 소녀는 역시 비슷하게 언어를 섞어 대답했다. 열여섯 살, 북부 카트 어, 중부 듀츠 어, 남부 갈리아 어, 동부 레온 어, 서부 벤티 어, 고대 페란트 어 여섯 가지가 거의 완벽했다.
늙은 사내 특유의 완고한 고집이 발동하여 기어이 그녀의 점수를 깎아내렸다. 어차피 계집이란 옆에서 곱게 꾸미고 화사하게 웃기만 하면 그만, 대체 여섯 개 언어를 다 알아서 어디에나 쓴단 말인가? 남편의 등이나 찌르겠지.
그런 면에서 그는 아들에게 실망했다.
-폐하. 저는 폐하의 후계자로서,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통보하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이번이 끝이라고 통보하던 아들의 얼굴은 담담했다.
-보호해주십시오. 제 아내가 세르의 비(妃)로서 합당한 대우를 받기를 원합니다.
-짐이 거부한다면?
-차기 알자스 공작은 폐하의 손자가 아니겠지요.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안아서 씨를 뿌리고 아이를 만들라고 했지 누가 반하라고 했나.
황제는 먹어도 될 것과 먹으면 안 될 것은 정확히 구분하는 사람이었다. 색 고운 독버섯보다 칙칙한 갈색을 띠고 소나무 밑에서 자라는 송이버섯을 선호하는 취향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들은 그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흑발과 녹안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들은 제법 훌륭하게 자랐다. 루이 오귀스트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은 시행착오를 피하도록 아들을 키웠고, 이런 아이에게 반하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은 갖추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왜 반했을까. 저 낯짝 때문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블린에 널린 것이 겉가죽 고운 계집들이건만. 아들은 로렌의 후계자다. 눈길만 주어도 옷을 벗고 다리 벌릴 계집이 어디 한둘이란 말인가. 그런 싸구려 여자들이 질린다면 제법 배웠다는 티를 낼 수 있는 고급 창녀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왜 고르고 골라 저런 것에게 반해 목을 매달까.
황제의 얼굴에 자애로운 미소가 번졌다.
"그래, 식사라도 함께 하겠느냐? 요즘 송어가 맛있다더구나."
그는 아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래, 젊은 혈기의 사내들이 다 그렇고 그렇지 않은가. 마음에 든 계집을 침대로 부르기 위해서는 내장이라도 빼어줄 듯이 굴고, 그 계집이 침대에서 눈물이라도 지으면 심장이라도 찔린 듯 안절부절 못하며 호들갑을 떤다.
발가락이 없는 신부의 명예를 위해 오베르뉴 대공에게 결투를 신청했던 황제는 자신의 과거는 잊고 담담하게 비틀어진 자기납득을 마쳤다.
"선약이 있습니다. 청을 아뢰는 것을 허락해주신다면 말씀 올리고 물러가겠습니다."
"말해보려무나."
그는 사내로서 계집들의 징징거림에는 관대하게 굴었다. 설마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겠지. 그는 분명히 경고를 하고 선을 그었다. 탐탁지는 않지만 그 정도도 이해하지 못할 총명함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소녀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소녀를 보호해주시기를 청합니다.“
"황후의 일을 일컫는 것이냐."
황후가 저지른 일을 생각하니 왈칵 짜증이 치밀었다. 지금까지는 적당히 선을 지켜서 놀았으므로 루이 오귀스트는 아내가 무슨 일을 저지르든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계집이 쓰는 돈을 대주지 못하는 것도 사내 노릇은 아니었다. 사치를 하든 도박을 하든 며느리를 괴롭히고 정부를 죽이든 그대로 두었다. 황후는 대체가 불가능한 사람이었고 그 정도 사고는 얼마든지 수습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황후의 방 앞에 코시카 황녀이자 유일한 며느리를 아무런 이유 없이 몇 시간을 무릎 꿇려놓은 것은 좀 다른 이야기였다.
재정이 좀 나아질 만하면 쓸 곳이 생긴다. 괜한 지출을 하지 않았는가. 미래의 수익 감소도 지출이나 다름없었다.
황제는 짜증을 감추고 한층 나긋한 목소리로 일렀다.
"그 일이라면 더 언급하지 않아도 된다. 짐이 이미 충분히 신경을 썼느니. 마음의 상처가 컸을 터. 마음 쓰지 말고 편히 쉬거라."
충격적인 일이기는 한지 아들이 와서 무릎을 꿇고, 저 뻣뻣한 아이가 와서 납죽 엎드린다. 하긴 아무 고생도 않고 곱게만 자랐을 아이가 언제 그런 수모를 당해봤겠는가.
황제는 그가 며느리를 씨받이 취급한 일은 너무나도 편하게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그것은 그의 기준에 수모가 아니라 당연한 충고였다. 계집은 아이를 낳아야 마땅하다.
"소녀는 황후 폐하의 일을 말씀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미간에 깊이 주름이 잡혔다.
"허면?"
"생명의 안전을 보장받고 싶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