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바라마지 않는 (22)
"생명의 안전을 보장받고 싶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황제의 입매가 꿈틀댔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구나. 네가 방금 이야기했듯, 이 로렌에 짐의 며느리를 해할 자가 감히 누가 있단 말이냐."
그리 말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정신없이 코시카와 주변국에 관한 정보를 뒤져댔다. 용과 마법이 사라진-정확히는 사라진 듯이 보인- 뒤로 나라 사이의 교류는 한층 활발해졌다. 목숨 걸고 돈을 노리는 상인들이나, 목숨을 신에게 맡겨둔 성직자들만이 국경을 넘나들던 시대는 지났다.
외교와, 유학, 연구와 여행, 친척간의 교류. 여유 있는 귀족 젊은이들이 인접국의 궁정을 드나들 이유는 이토록이나 많았고, 그 중 적지 않은 수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밀정 노릇을 하곤 했다.
꿈에서 사람을 관찰할 수 있는 황후의 능력은 이런 점에서 빛을 발했다. 그녀는 밀정들을 따라다니다가 그들이 쓰는 보고서의 내용을 외우고 만나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해 황제에게 알려주었다. 그로써 보고서가 도착할 때까지의 시간을 크게 단축해서 알 수 있었다. 물론 이런 방식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몇 가지 있었고, 해외보다는 국내 장악에 효율적이었으나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요즘 코시카는 군부의 불만이 누적되고 있다. 여제는 릴레벨트 해의 공고한 지배권을 한층 강화하려는 듯이 해군을 풀어놓았고, 이는 웨데나를 비롯한 반도 삼국을 도발했다. 아직 피아스트와의 전쟁을 마무리하지 않은 시점에서 웨데나와의 전쟁을 준비해야 하게 된 것이다. 여제는 군부의 불만을 공포 정치와 전쟁으로 해결하려 시도 중이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토록 정통성 없지만 않았더라면 좋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들은 이야기 중 이 아이에 대한 일은 없었다.
여기까지 계산하는 동안 그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가 아들인 세시안에게 물려준 것은 검은 모발이나 녹색 홍채뿐만이 아니었다. 쉽게 놀라지 않는 차분함과 손익을 계산하여 저울질하는 능력은 고스란히 그가 물려주고 다듬은 자질이었다.
"칠 인의 맹세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문들의 신의를 의심하겠습니까."
"허면?“
엘리엔 필리피느 소피 아델라이드는 지극히 고상한 태도로 찻잔을 들었다. 부러 뜸을 들이는 것임을 알면서도 괜스레 짜증이 났다. 황제 역시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원해(園海)의 상행이 통제되리라는 풍문을 들었습니다.”
원해, 정원으로서의 바다. 옛 노브고르드 땅에 지어진 코시카 황도는 바다를 끼고 있는 항구 도시였다. 여러 나라에 인접해있는 바다를 자국의 ‘앞뜰’이라고 부르는 것은 제국의 오만함일 터였다.
“그런 말은 또 어디에서 들었느냐.”
화가 날수록 목소리는 느슨하게 풀렸다.
설마 아들이 이야기해준 걸까.
화해한 다음부터 아들은 마치 영혼을 빼어 이 아이에게 준 것처럼 굴었다. 원래도 다정스레 대하기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손 안에 들어온 보주(Globus cruciger)라도 되는 양 애지중지했다. 하지만 아무리 빠졌다고 해도 설마 저런 아이에게 나랏일을 털어놓았을까.
“제 사촌에게서 들었습니다.”
사촌이라 함은 샤를루아 공작, 보르디의 필리프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화가 약간 가라앉았다. 그래, 아들이 그렇게 칠푼이일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것과 네 안전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이냐.”
“대 웨데나 전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보려무나.”
꿈을 걷는 황후의 능력은 발루아 가문의 황권을 반석에 올려주었다. 황제의 권위를 이토록 드높인 것은 루이 조제프 황제지만 그 높아진 황권을 한 대에 끝내지 않고 단단히 다진 것은 루이 오귀스트였다.
황제는 그 마법이 자녀들에게 내려갈 위험조차 감수하고 ‘마녀’인 황후와의 결혼을 감수했다. 황후가 쥐어주는 정보 덕분에 그는 옥좌에 앉은 이후 탁월한 선택을 연신 이어왔다.
그러나 그녀의 능력은 외교에는 국내정세 파악만큼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르그리트 안은 외국어를 할 줄 몰랐다. 코시카 여제를 따라다니든 서부 성황을 따라다니든 황후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나, 그들이 읽는 문서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국제 정세 파악에 있어서, 황제는 시간 이외에 다른 이점을 얻을 수 없었다. 그저께 받은 보고서에서는 전쟁 이야기가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둘 중 하나다. 이 아이가 헛소리를 하고 있거나, 여제를 지척에서 호위하는 중앙기사단장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추론할 수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마 후자일 것이다. 황제는 불쾌감 속에서 그를 인정했다.
“바다뱀의 웨데나를 위시한 반도 삼국은 근 백 년 동안 충돌을 피하며 많은 것을 양보해 왔습니다. 전 웨데나 국왕은 전전 국왕의 육촌으로 방계로 이어진 자인지라 제 자리를 유지하려면 유순하게 굴 수밖에 자였습니다만, 현 왕은 마르카와의 국경 충돌을 마다하지 않을 만큼 호전적인 자입니다. 그 성격을 누르며 약 오 년을 참아왔으니 원해 상행 통제라는 기회를 놓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녀는 목이 메는 듯이 차를 다시 한 모금 삼켰다.
“여제 폐하께서도 전쟁을 거부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미 대 피아스트 전이 끝났어야 합니다. 그래야 충분한 압박을 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나라 모두 전의가 충분하고 싸워야 할 이유도 갖추어져 있으니 전쟁이 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입니다.”
“싸워야 할 이유라.”
“웨데나의 아스트리드 공주가 낳은 폐주의 딸들은 대제 폐하와 소피야 여제 폐하의 손녀이며, 안나 여제 폐하의 사촌이 됩니다. 여든 가까운 나이이나 아직 숨이 붙어있으니 유명무실한 계승권이나마 살아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황제는 무슨 이야기인지 납득하고, 또 이해를 끝냈다.
“전쟁이 끝난 뒤 계승권자 청소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냐?”
“선전포고 전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차 한 모금.
“물론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의 혈통은 파블 1세 폐하와 이반 3세 폐하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만큼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어린아이들이 쉽게 숨이 끊어지는 일은 드물지 않은 법입니다.”
그리고 계승권자 사이의 목숨을 내건 다툼은 흔한 일이었다. 루이 오귀스트는 그가 세르 시절 마르그리트와의 비밀 결혼을 발표했을 때 마치 세르 자리가 자신의 것이 될 것처럼 날뛰던 동생들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살려달라는 거냐.”
“예.”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헛웃음을 삼켰다. 지금껏 루이 오귀스트에게 있어서 눈앞의 소녀는 체스판 위의 말, 혹은 활자 위에서 춤추는 보고서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려놓은 것 같은 미모 위로 꼬리표처럼 몇 개의 메모가 붙어있었다.
마르그리트가 싫어함, 옛 약혼녀의 딸, 코시카의 전(前) 제1 계승권자, 며느리, 아들이 반한 여자, 그리고 그가 아들과 로렌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태(胎).
실제로 선을 그었을 때 벌벌 떨며 물러났고, 황후가 핍박을 해도 얌전히 따랐다. 패배한 기억 때문인지 로렌에 도착한 이후 지극히 수동적으로 조용히 살았다. 자기가 먼저 움직이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황제는 지극히 만족하면서도 간혹 옐레나 여제를 비웃기도 했다. 덕분에 일이 잘 풀리기는 하였고 고스란히 그의 손에 태(胎)가 떨어지기는 하였으나 여제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고. 저런 수동적인 아이라면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차라리 이득이었을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갓난아이보다는 열다섯 살-그가 협상을 할 때에는 열다섯 살이었다- 짜리가 낫지 않은가. 명목상의 옥좌에 앉혀두고 뒤에서 조종만 했어도 되었을 것을.
그러나 이 아이가 처음으로 자기 발로 움직여 황제를 찾아와 고개를 조아린 지금, 황제는 이 아이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를 완전히 납득했다.
살려달라고 비는 와중에도 저리 뻣뻣하다. 무릎을 꿇고 바지자락을 붙들어 눈물을 짜내도 모자랄 판에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이 싸늘했다. 허리는 곧고 가볍게 굽어진 목선은 우아하기만 했다. 의상과 장신구는 마치 상대를 압도하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묵직했다.
“살려주십시오, 폐하.”
다시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빌었다.
앉은 자리에서 이만큼 꿰어보는 총명함에 판단력, 그냥 봐도 대단하고, 어린 나이를 감안하면 한층 더 대단했다. 그러나 그 성정이 총명함을 받쳐줄 만큼 강하지 못하다. 굽힐 줄을 모른다. 타협 없는 강함, 서리 같은 고집. 지금도 자존심을 숙이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하여 알현 신청을 했을 터인데 최대한 자신과 타협한 결과가 이 정도라는 뜻이었다.
코시카 황제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황후 자리를 주기 위해, ‘그’ 엘리엔 소피 아델라이드와 그녀가 낳은 후계자를 갈아치우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크게 웃었다. 그야말로 주님께서 로렌에게 보내주신 순풍 같은 기회가 아닌가.
하지만 저런 후계자를 뒤에 품고 있으면 그라도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 그러하다. 자기보다 모자란 사람에게는 아주 관대해지지만 잘난 사람에게는 시기와 질투를 품게 된다.
보통 사람이라도 그러한데 하물며 황제 자리. 모든 것에 독 같은 의심을 품고 판단해야 하는 자리다. 언제 자기 목이 날아갈까 불안할 테니 당연히 후계자를 갈아치우고, 먼 나라로 보내야 안심할 수 있었겠지.
물론 죽이고 싶었겠지만 로렌은 이 아이를 주지 않으면 돕지 않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어쩔 수 없이 보냈을 것이다.
이반 3세, 루이 조제프 황제 시절부터 코시카 황위에 올라앉아 길게 치세하던 그 황제는 이런 손녀를 두고 어찌 눈을 감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처세를 가르치고 부드럽게 다듬어놓았어야지. 매를 대어서라도 저 뻣뻣함을 꺾고 유연함을 가르쳤어야 제 생명 부지하는 법은 배웠을 것 아닌가.
아니면 이리 매서운 늑대나 맹금처럼 키워놓았으면 오래 살아야 할 일이었다. 아무리 독수리 새끼라곤 해도 둥지에 있으면 날 수 없고, 늑대 새끼로 태어났어도 송곳니가 자라기 전에는 부드러운 잇몸 뿐.
정말 이 아이가 옥좌에 올라앉기를 원했다면 적어도 십 년은 이를 악물고 살아있었어야 했다.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직접 손녀에게 황위를 물려주었어야 그나마 성공할 수 있었으리라.
그는 영 이 상황이 못마땅했다.
천재로 유명하던 첫째는 독살당하고, 둘째는 계집에게 빠져 도망치고, 셋째는 일찍 죽고, 마지막 달랑 남은 것이 이 아이 하나라고 했다.
오라비가 도망쳐 어쩔 수 없이 덜렁 관을 쓴 아이, 군부에게 휘둘려 반역을 준비하는 유약한 소녀로 여기고 탐을 내었더니 완전한 오판이 아닌가.
황제의 개암색 눈이 저울질을 시작했다.
그가 이 아이의 태(胎)로 만들어내려고 했던 모든 계획을 폐기하고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게 맞는 결정이 아닐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죽이도록 놓아두는 게 맞지 않을까?
아니면 아이를 낳은 다음에 죽일까?
그의 계획에는 이 아이가 살아있어야 했지만 아기만 있어도 충분하지 않을까? 아니, 아기 하나는 위험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이고. 하지만 살려두는 것도 영 마땅찮은데.
황제의 생각이 한 쪽으로 치우쳤다. 그는 옐레나 여제의 전례 때문에 잠시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한 쪽 생각만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정을 내리려는 순간 발목을 잡은 것은 아들의 목소리였다.
-보호해주십시오. 제 아내가 세르의 비(妃)로서 합당한 대우를 받기를 원합니다.
-차기 알자스 공작은 폐하의 손자가 아니겠지요.
생각하는 데에 오래 걸렸다. 차가 두 주전자를 넘어갈 무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 했더니 아들이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폐하.”
앉으라 했더니 대뜸 제 아내의 옆자리에 앉아 손등에 입술부터 대었다. 자기만 빼놓고 둘이 보고 있었느냐고 농담조로 웃었지만 명백히 경계하는 듯한 태도였다. 무슨 말로 핍박이라도 하지 않았을지 바싹 긴장해있었다.
그는 못마땅하게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를 매만졌다.
못난 놈. 자식 하나 멀쩡하게 키우기가 이토록 어려웠다. 흠잡을 데 없이 정으로 내리치고 끌로 다듬어놓았다 자부했지만 여자 취향이 이럴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