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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0. 바라마지 않는 (26)


 오를레앙의 마르그리트 안, 오를레앙 대공녀이자 블루아의 아가씨이자 로렌의 황후는 두 달 가까이 계속 꿈을 꾸고 있었다.

운신하기조차 힘든 현실의 육체는 훌훌 벗어버렸다. 등을 덮는 머리카락은 떡갈나무 빛깔, 반짝이는 눈은 그보다 조금 더 옅은 갈색이었다.

어느 날은 코시카, 어느 날은 서쪽의 성황청, 또 하루는 동쪽의 카스티야.

꿈을 타고 온 세상을 돌아다니는 그녀는 순진한 시골처녀의 모습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아홉이나 낳았으나 꿈에서만은 할멈과 할아범의 품에서 자라며 쌍둥이 동생의 삶을 몰래 바라보던 그 때 그 모습의 마르그리트 안.

그녀는 오래간만에 이블린의 꿈을 꾸고 있었다. 몇 명이나 계단을 지나다녔으나 아무도 황후인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초록빛 옷자락이 내려오는 사람의 몸을 통과해 지나갔다. 마르그리트 안은 개의치 않았다.

마르그리트는 평생 현실보다 꿈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었다. 꿈속에서는 뒤뚱뒤뚱 걸어도 아무도 비웃지 않는다. 마음대로 화려한 옷을 입고 뱅글뱅글 춤을 따라할 수 있다. 어디든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거스.”

사랑하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관찰하고 함께할 수 있다. 황제의 얼굴을 생각하자마자 마르그리트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꽃피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주어진 여가를 황제의 주변을 맴도는 데에 사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집무실은 텅 비어있었다.

무슨 일일까, 내 사랑은 어디에 있는 걸까.

마르그리트의 발이 가볍게 움직여, 정의관 집무실 건너편에 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사랑은 그곳에 있었다. 중년 남성은 홀로 잠들어있었다. 마르그리트는 헤실헤실 웃으며 그의 뺨에 입 맞추었다. 물론 입술이 닿는 감촉은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면 그녀의 몸은 그의 몸을 통과할 터였다.

몸을 일으키자 침대 옆에 있는 협탁에 놓인 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황제의 필체였다. ‘ERM’이라는 세 글자였다. ‘en rêve. ​M​a​r​g​u​e​r​i​t​e​(​꿈​속​에​서​,​ 마르그리트)’의 줄임말이었다.

그 글자를 보자마자 그녀는 꿈에서 빠져나왔다.

현실에 있는 마르그리트의 몸이 눈을 떴다. 나풀나풀 가볍기만 하던 영혼이 발목에 쇠공을 매단 듯 무거워졌다. 특히 사라졌던 발가락의 통증이 그녀를 잠식했다. 황후의 얼굴이 자연스레 일그러졌다.

그간 멀리 했던 만큼 육신의 굴레는 한층 생생하게 그녀의 숨통을 조였다.

젊은 시절, 발가락을 만들어보려고 칼로 찌른 네 줄기의 상처는 어마어마한 고통을 황후에게 선사했다. 수십 년 전에 만든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았다 피부가 덮이지도, 갈라진 상처에 조직이 생겨 서로 붙지도 않은 채 피고름과 통증을 끊임없이 흘렸다.

마르그리트는 그것이 ‘대가’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꿈속을 흘러다니는 것은 그녀의 현실을 꿈꾸는 시간만큼 저당 잡힘으로써 대가를 치를 수 있었다. 꿈속의 그녀는 아무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유령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꿈에 들어가, 꿈과 현실을 뒤섞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황후는 상반신을 간신히 일으켜 딸을 찾았다.

“미네트!”

그러나 방은 조용했고,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황후는 종을 울려 시녀를 부르려 했으나, 그 종을 울리기 위해서는 우선 일어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마어마한 분노가 치밀었다. 마르그리트는 평생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다스리는 법을 익히지 못했다. 그럴만한 책임과 기대를 받아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나이를 먹고 아이를 낳아도 그 정신만은 자라지 못한 ‘블루아 성의 아가씨’ 그대로였다.

대체 어딜 간 거니? 넌 어디 갔어? 내가 필요할 때 내 옆에 있어야 하잖아!

황후는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협탁 옆에 놓인 이국의 향로가 가느다란 연기를 피워 올렸다. 황후는 거칠게 향로를 밀었다. 둥그런 향로가 땅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재가 쏟아졌다.

분이 조금 풀리자, 마르그리트는 다시 머리를 베개에 묻었다. 금갈색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나중에 화를 내자. 거스를 볼 때에는 웃어보여야지.

눈을 감자마자 그녀는 바로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검은 심연을 지나, 풍경을 보는 것은 전과 같았다.

단, 이번에는 다른 사람의 꿈이었다.

다시 처녀의 모습으로 돌아온 마르그리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루이 오귀스트, 마르그리트의 남편은 지도의 꿈을 꾸고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흰 종이가 널찍하게 펼쳐져 있었다.

마르그리트의 발이 조심스레 지도를 밟았다. 오른발이었으나, 꿈에서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녀의 발이 닿자마자 지도에 화르륵 불붙듯 색이 번졌다. 선으로 표시된 강은 파란색, 높고 낮은 산맥은 초록색, 수확을 앞둔 들은 밀의 노란색, 광산의 검은색과 숲의 진록색이며 바다의 청남색도 있었다. 저 먼 곳을 바라보자 흰 눈을 산꼭대기에 인 설산도 있었다. 검던 글씨가 금빛으로 변해 선명하게 위로 떠올랐다. 은빛 선이 뻗어나가 국경을 이루었다.

마르그리트는 자신이 밟고 있는 글자가 꿈틀대는 걸 뒤늦게 발견했다. 금빛 글씨는 작은 날개 달린 새처럼 퍼덕이며 발버둥 쳤다. 발을 조심스레 치우자, 글씨가 항의하듯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 날아다니더니, 원래 자리에 내려앉았다.

그 글씨는 ‘웨데나’였다.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는 ‘웨데나’를 바라보며 ‘코시카’ 앞에 서있었다. 그녀는 기쁨에 찬 어린아이처럼 환호했다.

“거스!”

​“​그​레​트​(​G​r​e​t​t​e​)​.​”​

마르그리트와 마찬가지로 꿈속에서의 그는 여전히 젊고 건강한 청년이었다. 짙고 검은 눈썹과 날카로운 개암색 눈이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다. 인상이 워낙에 강렬해서 미남보다는 호남(好男)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그녀는 겅중겅중 릴레벨트 해를 밟으며 달려가 그의 팔을 끌어안으려 했다.

“잠깐.”

루이 오귀스트는 명확한 동작으로 마르그리트를 제지했다. 그녀는 크게 실망해서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화난 거예요?”

“이번에는 당신이 심했어, 알고 있지?”

“알아요.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했잖아요.”

“그레트. 왜 그런 거야.”

“거스.”

그는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대체 왜 그랬지? 이야기해봐. 당신이 원하는 일은 이미 한 번 들어주었잖아.”

마르그리트는 황제의 집무실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젊었을 때의 엘리엔의 얼굴을 한 그 계집아이가, 창백하게 질린 채 모욕감에 떠는 모습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짜릿했다. 그녀는 꿈을 통해 황제의 옆에 서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당신도 만족했다고 생각했는데.”

“만족했어요.”

“그런데 또 왜 그랬어?”

황제는 아주 나긋나긋하게 물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분명 냉랭했다. 마르그리트는 그의 감정을 아주 민감하게 느꼈다. 지금 그녀가 있는 ‘세계’의 주인은 눈앞의 남자고, 꿈이 그의 분노에 반응하여 조금씩 술렁거렸다.

“나는 그레트가 한 일이 마음에 안 들었어.”

황제는 황후에게 그녀가 저지른 일 때문에 얼마나 큰 금전적 손해를 봤는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 때문에 그가 화났다는 감정만을 강하게 강조했다. 마르그리트가 입술을 깨물 당위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 계집애가 싫다고 했잖아요.”

“그레트.”

“거스, 날 사랑해요?”

“그럼, 사랑하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내가 당신이 아니면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어.”

그러나 마르그리트는 평소처럼 만족하여 웃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그 계집애를 며느리로 들인 건가요.”

“그레트.”

“그 계집애 말고 다른 여자들은 얼마든지 있잖아요! 우리 사랑하는 아들은 이제 딱 하나 뿐인데, 그 아들의 짝으로 꼭 그 애를 내 앞에 데려다놨어야 했어요? 그것도 마담 라 세르의 자리를 줘서?”

황제는 수천 번쯤 들은 이야기를 또다시 들으면서도 지친 기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그레트. 내가 당신에게 이야기 했지. 분명 이유가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응?”

“하지만 그 애가 날 무시했단 말이에요!”

“무슨 이야기야?”

마르그리트는 팔을 내저으며 그녀가 지금까지 느꼈던 ‘무시’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팔찌에 관한 이야기를 눈물까지 흘리며 장황하게 늘어놓았으나 황제는 그녀를 대신하여 분노해주지 않았다.

“내가 다음에 따끔히 이야기를 하지.”

“겨우 그게 다예요?”

“그레트.”

목소리가 낮게 깔리자 마르그리트 안은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

“당연하죠!”

“그럼 다시는 그러지 말아.”

“거스!”

“알았나?”
입술이 비죽였다. 마르그리트는 벌레를 씹은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루이 오귀스트는 다시 한 번 다그쳤다.

“알았어?”

“알았다고 했잖아요!”

마르그리트는 화난 듯이 성큼성큼 바다를 밟았다. ‘릴레벨트 해’라는 금빛 글자가 그녀의 발에 밟힌 뒤 화를 내며 펄럭거렸다. 그녀가 바다를 밟을 때마다 푸른 물감 같은 색감이 번지며 동심원이 여러 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화는 얼마 가지 못했다. 루이 오귀스트가 다가와 그녀를 잡은 것이다.

“내가 이래서 당신을 사랑하는 거야.”

잘생긴 젊은 시절의 얼굴로 늘어놓는 온갖 감언이설에 황후는 금세 넘어가고 말았다. 그녀는 만면에 희색을 띠고 그녀가 그간 삶을 혹사하며 본 것들에 대해 떠들어댔다.

개암색 눈이 언뜻 다정하게 보였다. 그녀는 그게 좋았다.

그의 잠자리를 데우는 창녀들에게는 절대 보여주지 않는 눈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다른 여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잘 알았다. 옆을 내주고 잠자리를 데우게 할지언정 고작 그 뿐, 절대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않고 다정한 몸짓도 하는 법이 없었다.

마르그리트 안은 그의 하나뿐인 아내고 하나뿐인 로렌의 황후로서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 ‘특별함’이 그녀를 꿈속에서 살게 했다.

마르그리트는 단 한 번도 ‘현실’에 애정을 가진 적이 없었다. 만일 마법의 대가라는 개념을 알았다고 해도 다른 사람-루이 오귀스트와 옐레나 여제-의 꿈에 들어가는 일을 멈추지는 않았을 것이다. 꿈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녀가 증오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현실은 악몽일 뿐이었다.

그녀를 버린 부모, 사이 나쁜 자매, 뒤에서 소곤거리는 별볼일없는 연놈들, 자식들의 죽음.

그녀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꿈속에서 살았고, 꿈의 대가로 일정 시간은 반드시 통증과 불면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견뎌내기 위해 점차 즉물적으로 변해갔다.

눈앞의 쾌락, 즉 식욕과 도박에 빠져들었다.

살이 찔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도박과 수면향은 이지를 둔탁하게 만들었다. 몸과 머리가 무거워질수록 꿈과 현실과의 괴리가 커졌다. 그녀는 점차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꿈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렇게 로렌의 황후는 계속 고립되었고, 그것이야말로 황제가 바라는 바였다.

꿈속의 황후는 새처럼 즐겁게 떠들었다.

“그래서요, 그 날 누구랑 누가 거기에 방문했냐하면요.”

그간 격조했습니다. 바빴어요. 앞으로도 당분간 바쁠 예정입니다. 다음주부터 다다음주까지 2주간 시험기간이에요. 시험 망하면 1월 말까지 못 올 수도 있습니다. 
공지만 올리기 뭐해서 조금 급하게 쓰는 바람에 많이 어설프네요. 나중에 수정할게요.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대한 빨리 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름 눈송이 초고'란에 아롈이 여제가 되었다면 IF외전이랑, 코시카 황가 4남매가 모두 살아있었다면 IF 외전이랑, 겨울싹 센티넬버스 AU, 연령반전 AU 써놨습니다. 후자 두 개는 쓰고 있는 중이지만요. 본편보다는 조금 많이 편하게 썼지만 관심 있으시면 봐주세요. 예전에 보신 분들은 안 보셔도 됩니다. 똑같은 얘기예요. 

도입부를 조금 더 독자-프렌들리하게 수정할 예정입니다.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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