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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0. 바라마지 않는 (27)


 멘 공작 루이 앙투안은 문에 양각된 사슴 두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이블린을 통틀어 수백 개의 문이 있지만 사슴이 새겨진 문은 세르(cerf, 수사슴)의 집무실 뿐이었다.

묵직한 문은 위엄이 넘쳤다. 사슴이 꼭 수문장 같았다. 어렸을 때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곳을 마음껏 드나들었을까.

앙투안은 루이 샤를과 술래잡기를 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황제의 어린 아들들은 낄낄 웃으며 이블린을 휘젓고 다녔다. 샤를이 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빙글빙글 돌다가 쌓여있는 서류를 엎었다. 이복형인 세시안에게 엄청나게 혼이 났다. 

아홉 살 많은 세시안은 세상에 무서울 것 없는 천방지축들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들이 사고를 치면 몇 시간이나 앉혀놓고 설교를 늘어놓았다. 차라리 한 대 맞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풀이 죽은 형제는 뒤뚱뒤뚱 이 문을 나섰고, 나서자마자 싸웠다. 너 때문에 혼났다며 책임을 떠넘기며 주먹다짐을 했다. 뺨이 퉁퉁 부어 들어가자 어머니, 클라리 후작 부인이 기함을 했다.

후작 부인은 샤를을 얼마나 때렸느냐고 묻더니 뛰쳐나가 과자를 준비했다. 앙투안이 아니라 샤를의 것이었다. 그녀 대신 어머니의 시녀가 뺨을 치료해주었다. 

앙투안은 괜히 터지지도 않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시계를 꺼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지나치게 일찍 온 것이다. 대체 얼마나 기다렸다가 들어가야 맞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약속 시간 삼십 분 전이 적절한 시간이 아닐 것은 분명했다. 

대체 이복형은 무슨 일로 그를 불렀을까.

에잇, 큰 실례라면 그냥 혼나자. 어차피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었다. 

앙투안은 긴장한 채로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라는 이야기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를 부른 이복형은 간 데 없고, 장의자에 금발의 소녀가 앉아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옅은 금빛 머리채를 편하게 땋아 박홍(薄紅)색 리본으로 묶었다. 낙엽처럼 노란 옷에 적갈색 스토마커를 달았다. 치마 밖으로 진주를 단 구두가 비죽 나와 있었다. 연회장에 나갈 만한 화려한 차림은 아니었으나, 그리 간소한 치장만으로도 가을 숲처럼 아름다웠다.

연녹빛 눈이 그를 훑어 내리더니 언뜻 웃었다. 심장이 복장뼈를 폭행하듯 날뛰었다. 보드라운 목선을 손으로 훑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고 침이 바싹 말랐다.

“오랜만이군, 클라리 경.”

'멘 공작'이 아닌 '클라리 경'이었다. 그 말은 사적으로 그를 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앙투안은 감히 형수님 운운하는 호칭으로 그녀를 부를 수 없었다. 무릎을 꿇었다.

“마담 라 세르께 인사드립니다.”

“일어나서 앉아라.”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시녀가 앙투안의 앞에 찻잔을 놓고 차를 따랐다. 앤 폰 레르헨펠트가 아닌 금발 소녀였다.

“일찍 왔군?”

“죄, 죄송합니다.”

아롈은 다시 웃었다. 

“책하려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전하는 잠시 나가셨다.”

“그러합니까.”

“조금 기다려라. 오래 기다려야 하지는 않을 테니.”

아롈은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찻잔을 내려놓는데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손가락에 낀 반지가 사방으로 빛을 산란시켰다. 그의 마음도 금세 어지러워졌다. 그는 정신을 돌리기 위해 아무 말이나 꺼냈다.

“요즘 안녕하십니까?”

“좋다. 경은?”

“무탈합니다.”

“다행이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앙투안은 아롈에 대해서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아롈은 그와 대화를 지속하려는 의지가 없어보였다. 일상 회화를 꾸역꾸역 짜내는 대신 여상한 태도로 서류를 집어 들어 읽었다.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가득 찼다.

"오래 기다렸나요?“

문이 열리고 구원처럼 방의 주인이 들어왔다. 

"전하."

소녀가 또다시 웃었다. 그러나 웃음의 의미나 색조는 방금 전과 완전히 달랐다. 둥근 뺨에 홍조가 돌고, 눈이 별처럼 빛났다. 숨이 막혔다.

"사랑하는 아렐르."

세시안은 그 손등을 잡아 입 맞추고는, 친근하게 다시 뺨에 입 맞추었다. 아롈은 입맞춤을 다시 되돌려주었다. 인사를 끝낸 그는 그제야 앙투안을 돌아보았다.

"벌써 왔구나, 앙투안."

"예, 세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예를 취했다. 등에 칼을 맞은 기분이었다.

대회의 연회 때만 해도, 저렇지는 않았는데. 다정하기는 했으나 분명 양방향의 마음은 아니었는데. 지금 두 쌍의 눈에는 서로만이 담겨있었다. 장님이 봐도 그 애정을 알 수 있었고, 루이 앙투안은 안타깝게도 장님이 아니었다. 

알고 있었잖아, 루이 앙투안?

'사랑'이라는 단어를 이복형에게 알려줬을 때, 이미 그녀의 마음은 알고 있었다.

-좋은 분이십니다.

그래. 좋은 남자였다. 이복형은. 

안다, 하지만.

아롈은 금세 보던 서류에 빠져들었다. 당연하지만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어보였다.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어 있자 세시안이 기척을 내어 시선을 집중시켰다.

"요즘 아렐르와 같이 하는 일이 있어서. 같이 있어서 불편하니?"

"아, 아닙니다."

세시안은 단도직입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그의 안부를 물었다. 앙투안은 적당히 대답했다. 

"그래, 사실은 내가 네게 제안을 하나 할까 해서 불렀단다."

"예.“

"미셸이 곧 오를레앙으로 내려가지. 같이 갈 거라고 이야기했다 들었단다.“

오를레앙의 미셸은 일주일 뒤에 결혼한다. 그리고 전통에 따라 신혼부부는 오를레앙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앙투안 드 클라리’는 오를레앙 소속의 기사였으므로, 내려가는 것이 맞았다.

“예.”

앙투안은 찻잔을 들여다보았다. 주홍색 찻물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

애초에 단 한 번도 자신의 것이었던 적 없는 사람이었다. 멘 공작 루이 앙투안도, 오를레앙의 기사이자 로렌의 후작인 앙투안 드 클라리도, 손댈 수 없는 신분과 지위였다. 그러나 상실감이 들었고 그 감정만은 흠 없는 이슬처럼 온전했다. 애초에 품은 연모가 혼자만의 것이었으니 슬픔도 혼자만의 것이었다.

"이제 이블린에 돌아오지 않겠니?“

“예.”

“앙투안, 듣고 있니?”

“예.”

딱!

그는 손가락 튕기는 소리에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요즘 피곤한 일이라도 있나보구나.”

세시안은 놀란 그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무안 주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다. 귀까지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세르.”

“죄송할 것까지야.”

수치심이 들었다. 

“다시 이블린에 돌아오지 않겠니? 대회의 때에도 이야기했지만, 이번에는 정식으로 말하는 거란다.”

“멘 공작으로서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블린에 있는 게 친한 사람들도 만나고 좋지 않을까?”

“친한 사람이라 하심은…….”

“예전에는 샤를 말고도 다른 친구들과도 많이 놀았잖니. 저기 칼레 쪽에 있던 백작가 아들, 이름이 뭐였더라?”

“다뉴브 경 말씀이십니까?”

“그런 이름이었지, 참. 요즘도 만나니?”

“아뇨. 인사도 한 적 없습니다.”

“그렇구나. 다음에 만나면 인사라도 하려무나. 사교적인 관계를 유지하는건 항상 중요하지.”

앙투안은 방금 이복형이 자신을 떠봤고, 통과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로 대답했다. 그만큼이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세르, 저는 기사가 좋습니다.”

소극적인 거절이었으나 세시안은 마치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오를레앙 기사단만이 네가 기사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니지.”

“예?”

“기사로서 복무하고 싶다면, 이블린에도 네 자리가 있을 거야.”

그리고 세시안은 몇 가지 설명을 늘어놓았다. 새로 이블린의 경비를 늘리기 위해 기사단을 하나 신설하리라는 것, 소규모로 시작하리라는 것, 귀족 자제들 몇에게 제안하리라는 것, 그리고 앙투안에게 그 대장 자리를 맡기려고 고려하고 있다는 것도.

뜻밖의 제안에 앙투안은 당황했다. 

“지금 있는 근위대로는 충분치 않으십니까?”

“개개인의 호위에 중점을 더 두려고 한단다. 근위대와는 조금 방향성이 달라질 거야.”

‘호위’. 문득 시선이 다시 가서는 안 될 곳으로 흐르려 했다. 그는 간신히 참았다. 작센 왕궁, 그리고 나바르. 그가 지키려 했던 옅은 금발과 가냘픈 등. 

-경의 진심을 믿어보겠다.

어떻게 하면 좋지.

안타깝게도 그의 예지 능력은 그에게 아무런 답변도 내려주지 않았다. 열아홉 살의 그가 홀로 결정해야 하는 문제였고, 연정과 형에 대한 책임감 사이에서 단호하게 마음을 굳히기에는 그가 아직 너무 미숙했다. 

“저, 세르, 당장 결정할 수는…….”

“안단다. 느긋하게 생각해보렴. 하지만 나는 네가 남는 쪽으로 생각해주면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서려 했다. 그 때 아롈이 그를 불렀다.

“잠깐, 클라리 경.”

“예, 전하.”

“심부름 하나 해주겠나?”

심부름이라는 말에 세시안조차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앙투안은 단지 그녀가 말을 걸어주었다는 사실 자체에 기뻐서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승낙했다.

“기꺼이 명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아롈은 종이 한 장을 집어 그 위로 빠르게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두 줄, 세 줄. 종이를 흔들어 잉크를 말리고, 봉투에 넣고, 밀랍인장을 찍었다. 붉은 색소가 들어간 밀랍 위로 선명하게 동그란 원 두 겹이 돋을새김 되었다. 

“생 피에르 성당, 알고 있나?”

“예.”

모를 리 없었다.

“거기에 가서 이걸 좀 전해주게.”

“수신인이 누구입니까?”

“가보면 알 걸세. 아마 예배당에 있을 테니.”

시녀가 편지를 받아 그에게 전해주었다. 그는 편지를 코트 안주머니에 넣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는 정의관을 나서서 빠르게 성당 쪽으로 향했다. 문턱 높은 생 아델라 성당과 달리 생 피에르 성당은 이블린에 살고 있는 귀족들에게도 개방된 곳이었다. 

그는 조심스레 예배당의 문을 열었다. 

생 아델라 성당과 달리 생 피에르 성당은 스테인드글라스가 없었다. 대신 문을 열자마자 마주한 벽에 커다란 창문이 남쪽으로 세 개 나 있었다. 한낮의 햇살이 가득 들어왔다. 

거대한 십자가 앞에 미사포를 두른 흰 옷의 처녀가 무릎 꿇고 기도를 올리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역광에 잠식된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순간 루이 앙투안은 절망감과, 주제넘은 서운함으로 숨이 막혔다. 

-상대가 되어주겠소?

앤이었다.


바쁘다고 하자마자 이렇게 오니 민망하지만... 공부하기 너무 싫어서 한 편 썼습니다. 급하게 써서 역시 퀄리티는 많이 떨어지네요. 나중에 수정할게요ㅠㅠ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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