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바라마지 않는 (30)
사랑이 일으키는 문제는 많아도 사랑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생각보다 적다.
한 여자를 사랑하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랑해도 된다고 허락받은 뒤에도 현실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아롈의 코시카 계승권은 여전히 박탈당한 채였고, 그 계승권을 박탈하는 데에 세시안이 적극적으로 일조했다는 사실도 변하지 않았다. 황후는 여전히 아롈에게 엘리엔을 투영하여 증오했고, 황제는 아롈을 경계했다. 코시카와 웨데나 전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애정이 바꾼 것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일에 치여 펜을 굴릴 때 눈을 감고 잠시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메마른 마음을 축이듯 달콤함이 밀려왔다. 얼굴을 보면 사랑스럽고, 웃으면 감사하고, 새근새근 잠든 숨소리를 들으면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불현듯 찾아드는 감정의 변화, 언제든 꺼내어 누릴 수 있는 보장된 행복이야말로 그의 연인이 그에게 선사한 가장 큰 축복이었다. 그 마음이 비록 그의 죄책감과 책임감을 희석시켜주지는 않았으나, 그를 충족시켰다. 애정만 있다면 아무리 슬프고 힘겨워도 그가 다시 동나는 일은 영영 없으리라는 허황된 생각이 들 정도로.
세시안은 계단을 내려가다가 문득 웃었다. 복도 꽃병에 꽂힌 크림색 리시안셔스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 비슷한 색의 꽃을 선물했더니, 아롈의 표정이 석연찮았다.
의아해진 나머지 자주 쓰던 녹옥석 귀고리며 새로 맞춘 옅은 노란옷을 근거로 좋아하는 색이 아니었느냐고 물었더니, 소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털어놓았다. 사실 녹색이나 크림색으로 치장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레몬색 머리칼에 녹색 눈이라고 해서 크림색 꽃과 연둣빛 보석을 애용하는 건 이상하다'고 했다.
무심결에 예쁘다고 한 말 때문에 눈치를 보며 선호하지 않는 색으로 치장했을 것이 미안해졌고 그러면서도 한 편으론 사랑스러워서.
두근거렸다,
마치 얼굴을 떠올린 지금처럼.
빠르게 뛰는 심장이 쑥스러워서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
아롈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평소보다 두 시간만 빨리 자비관에 와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충실히 약속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자비관 사 층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생각하던 소녀가 나타났다. 시녀 둘을 거느린 채 층계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전하."
"아렐르?"
그늘에 있는데 해를 가린 구름이 움직여 삽시간에 화창한 햇살에 덮쳐진 기분이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무슨 일인가요? 왜 여기에 나와 있어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흰 손이 그의 손에 얹히고, 갸름한 턱 끝이 갸웃 움직였다. 귓불에 달린 큼지막한 귀걸이가 달랑였다. 취향을 그에게 고백한 이후, 아롈은 한동안 치워놓았던 장신구들을 착용했다.
세시안은 그런 아롈이 좋았다. 그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모습은 귀엽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모습은 당당해서 좋았다. 소녀다운 앙증맞은 장신구를 달든 장중한 느낌의 보석으로 장식하든 아예 장신구가 없든 그녀는 그 자체로 휘황했다.
소녀는 습관적으로 속눈썹을 내리깔더니, 작게 속삭였다.
“사실은 빨리 보고 싶어서 나와 있었습니다.”
목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그만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급하게 아롈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롈은 반쯤 이끌리듯이 그를 따르며 손짓해서 시녀들을 물렸다. 차라도 가져오라고 했다.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는 지금 그런 종류의 사회성을 발휘할 여력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세시안은 마담 라 세르의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았다.
“전하? 드릴 말씀이, 아…….”
몸에 밴 배려는 흥분해서 눈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충분히 그를 정중하게 움직이게 만들었다. 입술이 느리게 움직여 상대의 입술을 머금었다. 가는 허리를 끌어안고 정신없이 들이켰다. 말캉하게 움직이는 혀와, 입술과, 잇몸을 훑었다.
욕망은 일정 부분 욕정과 통하는 면이 있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옷을 벗기고 살을 맞대고픈 충동을 억누르고 입술을 떼었다.
“하아. 하아. 그러니까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습니다만.”
아롈은 뺨을 새빨갛게 붉힌 채 어깨를 들썩였다. 세시안은 어리광을 피우듯 허리를 숙여 쇄골에 입 맞추고,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아렐르는 정말 너무하네요.”
“예?”
“평생 모를 거예요. 이런 기분이 얼마나 굉장한지.”
“무슨 기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것 봐요. 모르잖아요?”
다정한 남자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는 아롈에게 잘못이 많았고, 영원을 맹세했고, 무엇보다 사랑했다. 그가 해줄 수 있는 한 행복했으면 했고, 실수의 실수로라도 상처주고 싶지 않았다. 이미 의도하지 않은 절망은 충분히 안겨주었고 그의 평생을 달아도 보상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그러니 한껏 다정하게 대하고 싶었다. 그는 아롈이 상처받은 흔적을 드러낼 때마다 서글펐다. 그리고 그 흔적을 감추려고 애쓰는 것을 눈치 챌 때면 그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었다. 새빨갛게 드러난 상처를 보듬고, 사랑만을 넘치게 주고 싶었다.
그렇게 당당해지도록, 손끝까지 애정 받고 사는 티가 흐르도록 만들어주고 싶었다. 홀로 설 수 있는 강함에 반했으니 그 강함에 색채를 더해주는 것도 애정의 일환일 터였다.
“아렐르를 사랑해요.”
그리고 동시에 마음대로 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에게는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세상 그 무엇도, 심지어 아롈의 기분도 생각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하고 싶어질 때면 그는 땅에 발을 단단히 디디고 균형을 잡으려 애써야 했다.
“사랑해요.”
아롈은 얼굴을 붉히곤 그의 품에 얼굴을 감추었다.
또 다시 사랑과 욕망이 충돌하는 순간이었다.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하고 싶은 충동과 그대로 안아 다독여주고 싶은 애정이 싸웠다. 결국 그는 손을 들어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복잡하게 땋아 단단하게 뭉친 머릿결이 손끝에 미끄러졌다.
언제부터 이렇게 여유가 없어졌을까?
분명 이 반대로 시작했던 것 같은데.
발을 동동 구르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여유작작하게 생글생글 웃으며 지켜보고는 ‘아, 참 귀엽구나’ 생각할 때가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저 아득하기만 했다.
마음은 비탈에서 굴러 내리는 눈덩이나 다를 바 없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돌멩이 하나가 그 핵(核)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움직이기조차 힘들었을 그 돌멩이가 지금은 눈덩이가 되어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밀려왔다.
아롈은 짧게 망설이더니 먼저 입 맞추고는 웃었다.
“사랑합니다.”
“정말로 너무하네요.”
그는 끙끙대며 무너졌다.
과거의 그를 생각하면 그저 경이롭기만 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두고 생글생글 웃을 수 있었지? 자아를 유지하고 한 걸음 떨어져 관조할 수 있었지? 언젠가는 행복하게 남들만큼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니, 그 무슨 자기 미래도 모르는 근시안적인 생각이었을까. 느긋하게 관찰하던 시절이 그저 꿈같았다. 그저 휩쓸리듯 좋기만 했다.
갑작스레 무게를 떠받치게 된 아롈이 앓는 소리를 냈지만 이번에는 욕망이 다정함에 대한 욕구를 아주 조금 이겼다. 그는 저울의 추가 그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발소리가 들렸다. 엉켜있던 연인은 화들짝 놀라 포옹을 풀고는 의자에 점잖게 앉았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마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앤이 들어와 다과를 차근차근 탁자 위에 차리더니, 찰랑거리는 물 한 잔을 놓고, 마지막으로 손목에 감은 팔찌를 풀어놓고 나갔다. 저걸 왜? 은빛 줄 매달린 동그란 보석이 오묘한 빛을 띠었다. 눈에 익은 물건이었다.
간신히 평정을 되찾은 그는 여상한 듯 웃으며 설탕통을 들었다. 테두리에 금박을 입히는 것도 모자라 금박으로 섬세한 꽃무늬를 그려놓았다. 요즘 막 유행하기 시작한 다기 종류였다.
세시안은 아롈의 잔에 은숟가락으로 설탕을 타서 저어주었다.
“아렐르. 무슨 일인가요?”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에 핏기가 가셔 있었다. 동그란 어깨가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가는 손가락이 초조하게 탁자를 두드렸다. 명백히 긴장하는 태도였다.
그는 조심스레 설탕통을 다시 내려놓고는 대화를 위한 자세를 취했다.
아롈은 눈을 감더니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반짝 눈이 뜨였다.
“이미 말씀드렸듯,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일까요?”
요즘 조금씩 힘겹게 털어놓는 과거에 대한 일이라고 생각했건만, 아롈은 생각보다 훨씬 진지해보였다. 평소에도 농담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묵직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롈은 나이에 비해 이런 분위기를 내는 데에는 능숙했다.
불길한 기분이 뒷목에 달라붙었다. 이런 면에서 그의 통찰은 꽤 적중률이 높은 편이었다. 적어도 크림색과 연두색 옷과 장신구를 싫어한다는 이야기나 오빠와의 추억보다는 중요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농담이라도 몇 개 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럴 만한 분위기도 아닐 뿐더러, 아롈의 엄격한 성격 상 웃으며 긴장을 풀기는커녕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대신 그는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물었다.
“뭐든 괜찮으니 이야기해주겠어요?”
연둣빛 시선이 이리 저리 흔들리다가, 결국 단호하게 고정되었다. 잘게 떨리는 흰 손이 은빛 줄을 잡아 올려, 물에 보석을 퐁당 빠트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요즘 한 소녀에게 휘둘리는 경향이 생겼다곤 해도, 세시안은 기본적으로 현실 감각이 단단한 사람이었다. 허공에 몽실몽실 떠다니는 민들레 홑씨 같은 몽상가와는 그 천성부터가 달랐다.
그 천성은 어느 정도 남부인의 특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마법사 시조가 세우고, 마법이 세상에서 사라진 지금까지 황실 계승권에 마법사의 존재를 언급해놓은 북쪽과는 달랐다. 로렌은 마지막 용이라고 알려진 크루아흐를 무찌르면서 세워진 인간의 나라였고, 세시안은 그런 나라의 후계자였다.
후계자로 키운 아들조차 경계한 황제는 세시안에게 황후의 능력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오히려 황실 및 주변 가문의 마법사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차단하며 키웠다. 황후의 모든 말들을 헛소리로 듣게끔 세심하게 안배하고 배려했다.
때문에 세시안은 북해에 해룡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에도 그것에 대해 경이라든가 신비로움을 느끼지 못했다. 짜증을 내며 새로운 정세 변화를 생각했다.
[안녕?]
그러나 눈앞에서 보석이 작은 생물로 변하는 순간을 목격하자 그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단단한 현실감각만큼이나 그 자신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그 눈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믿어야 한다.
혼란스러웠다.
“키옌 가문의 선조인 표트르는 마법사였습니다.”
아롈은 입술을 꼭 깨물더니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얘도 마법사란다. 인간의 ‘왕자’.]
순식간에 눈매가 사나워지면서 용을 죽일 듯이 쏘아보았다.
“예, 저 역시 키예나로서 그 혈통을 이었습니다.”
그의 얼굴이 얼마나 가관일지는 짐작 가는 바였다.
온갖 생각이 부유했다가 가라앉았다. 그는 코시카 황위 계승권의 순서 등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지는 못했으므로, ‘마법사’이면서 황위를 포기한 아롈에 대한 의아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당혹스러운 점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
“그리고 이 뻔뻔한 짐승은, 제가 계약한 용입니다.”
[그래, 안녕.]
세시안이 입을 다물고 있자 아롈은 허둥거렸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내내 스스로가 용이라고 주장하는 작은 생물과 아롈 사이를 오갔다. 무언가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아롈에게 선물해준 예쁜 물고기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비록 그가 바다에 가본 적은 없지만 물고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았다. 이건 용이었다.
그는 침착하게 그 사실을 납득했다. 그리고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저 용은 사악한 생물, 마녀는 성황청이 그들의 세력을 늘리기 위해 억지로 만든 희생양.
그 정도가 그가 알고 있는 개념이었다.
“아렐르.”
“예.”
그가 손을 뻗자, 아롈은 머뭇거리다가 그 손을 잡았다.
그의 신부이자, 사랑하는 연인이자, ‘마녀’.
신비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미셸 덕에 온갖 전설과 전승에 강제로 해박하게 된 세시안도 자세히 알지 못하는 분야였다.
“이 것, 이 분, 이 자…….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벨타라고 불러라. 멍청한 왕자.]
“벨타라.”
이름이 설마 릴레벨트는 아니겠지.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굳이 ‘왕자’라는 호칭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벨타가 릴레벨트 해에 나타났다는 그 해룡인가요?”
“예.”
“지금까지 숨기느라 마음고생이 심했겠네요.”
아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생 많았어요. 더 자세히 이야기해주지 않을래요?”
이내 눈물이 핑 돌았고 안도감이 퍼져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는 천천히 손등을 쓸었다. 용이 귀가 녹아버릴 듯 아름다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쳇. 조금 더 화내보지 그러니? 왜 속였느냐고. 배신감을 느끼지 않니?]
어떤 면에서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는 쓰게 웃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애정이 커져버렸다. 냉정하게 팔짱을 끼고 뒤에 물러나 있을 수 있었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아니었다. 이 소녀를 사랑한다. 그의 애정은 잠시 감정을 쏟아내는 것을 보류하고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고 싶을 만큼은 묵직했다.
천천히 이야기가 펼쳐졌다. 무의식적으로 건너뛰는 부분이 있었고, 힘겨워하는 부분도 있었고, 용이 끼어들어 재잘대다가 흐름을 놓쳐 허둥댈 때도 있었고, 스스로 정리가 안 된 이야기도 있었지만 아롈은 그의 신뢰에 최선을 다해 솔직하게 대답했다.
충분한 보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궁금한 것을 더 물어보는 대신 먼저 탈진한 아롈을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