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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외전. 조손 (1)


 황제라 하여도 나이는 어쩔 수 없는 건가. 코시카의 이반 3세는 침상에 기대어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늙었기로소니 설마 말에서 떨어질 줄은 몰랐고, 낙법을 제대로 썼는데도 갈비뼈가 부러지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낙마한 순간은 그야말로 아찔했다. 형을 죽인 죄를 받아 이러나 하는 웃기지도 않은 후회가 떠오를 지경이었으니.

나이 어린 정부가 옆에 앉아 그의 등을 쓸어내리고 따뜻한 물을 먹여주었다. 이반 3세는 키옌 가문의 핏줄이 흔히 그렇듯 호색했으며 정력을 사내의 자랑으로 여겼다. 물을 마시고 다시 누우려는 참에 시종이 들어와 손님이 찾아왔다고 알렸다. '옐레나 대공비'라고 알아들은 그는 며느리인줄 알고 만면에 미소를 띠며 얼른 들어오라고 했다.

그러나 사뿐사뿐 걸어 들어온 것은 며느리가 아니라, 며느리를 꼭 닮은 어린 소녀였다. 옐레나 여대공이라고 불릴 수 있는 아이도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 것은 이미 아이를 방에 들여놓은 뒤였다.

소녀는 들어오자마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금실로 장수를 비는 수를 놓은 사라판을 입고 레몬빛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렸다. 나이는 어리지만 며느리를 닮아 눈부시게 예뻤다.

"폐하."

"무슨 일이냐."

"시키신 일을 해왔습니다."

"뭐? 내가 네게 무얼 시켰느냐?"

이 아이는 하나 남은 손녀였다. 저 작센에 둘째 딸이 낳은 아이들은 있지만 그 아이들의 성은 키옌이 아니라 위튼이었다. 그 많던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가고, 달랑 남은 거라곤 있든 없든 아무 상관없던 이 계집아이 하나.

얼굴은 예쁘지만 그 뿐. 필요 없다 여겨 이반 파블로비치, 죽은 큰 손자가 키예프로 보내자 했을 때 별다른 말 없이 그러라 했다. 돌아왔을 때에도 관심 둔 적 없었다.

"파블 대공 전하께 명하신 일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 대신 가져온 것이냐?"

"하오나 전하께서는 출타중이십니다. 당분간 돌아오지 않으실 것이라 들었습니다."

또 정부를 보러 간 건가. 그는 하, 숨을 토했다. 계집질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좀 작작하라는데 한사코 그 말을 듣지 않는다. 사내 욕심을 채우는 것 누가 뭐라고 하는가. 밤에만 해야지! 밤낮도 없고 앞뒤도 없다.

"그래서?"

"하여 소녀가 해왔습니다."

"뭐?"

푸른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는 부르르 몸을 떨다가 역정을 억눌렀다.

"다오."

긴장한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뒤에 시립한 손녀의 시녀가 종이 뭉치를 넘기고, 여대공이 고개 숙여 내밀었다.

"예, 폐하."

정부가 쪼르르 달려가 종이를 받아왔다. 긴장한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황제는 표지를 넘기기 전에 손녀를 일별했다. 예쁜 얼굴에 다시 긴장감과 기대가 어렸다. 동그랗고 흰 어깨가 한 차례 진저리를 치다가 가라앉았다.

그는 표지를 넘겼다.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내용이 아니라 필체였다. 어린 애가 쓴 것이 훤히 보이는, 줄이 잘 맞지 않고 한 쪽 끄트머리가 점점 올라가는 그런 글씨. 손아귀에 힘이 모자라 꾹꾹 눌러쓴 삐뚤빼뚤한 글씨.

그래, 애였다. 몇 살이지? 열 살? 열한 살? 열두 살?

실소가 나왔다.

"이런 글씨를 읽으라고 쓴 게냐."

삽시간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죄송합니다."

"네 선생이 그리 아무 때에나 사과해도 된다고 가르치더냐?"

"죄송……, 아닙니다."

서리거인처럼 새파란 눈이 필체를 무시하고 종이를 훑었다. 형편없었다. 양식부터 맞지 않는 얼기설기한 누더기에 불과했다. 볼 가치조차 없다. 뱃속에서 역정이 끓어올랐다.

그리고 이반 3세는 무언가를 참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근육 붙은 팔이 힘껏 종이를 내던졌다. 그러나 서류라는 이름의 낙서더미는 과녁인 얼굴에 명중하는 대신 빙글빙글 돌며 치맛자락에 맞았다.

아. 입술이 벌어졌다. 어른인 척 연분홍 연지를 발랐다. 드물게 예쁜 얼굴이 경악과 모욕감으로 얼룩졌다. 정부가 쪼르르 달려가 종이를 주우려고 했다. 이반 3세는 손짓으로 그녀를 제지한 뒤 턱짓을 했다.

“종이가 아깝다.”

“잘못했습니다.”

“또 사과!”

천둥 같은 불호령에 금세 연둣빛 눈이 젖어들었다. 손부터 어깨까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부들부들 떨렸다.

“우는 게냐?”

한심하다는 듯한 물음에, 소녀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에 반지가 반짝였다.

“아닙니다.”

“계집아이가 별 수 있느냐? 울어라. 마음껏 울어!”

“정말, 아닙니다, 폐하.”

그러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이반 3세는 하, 숨을 토했다.

“네가 대체! 뭐라고! 거기에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서 있어!”

“죄송합니다.”

강건했던 근육은 차츰 시들고, 이마에 느는 것은 주름살. 말에서도 떨어져 갈비뼈가 부러졌다. 곁을 지키던 황후는 무덤으로 돌아간 지 오래. 무릎 밑(膝下)도 비었다. 하나는 도망치고, 하나는 죽고, 하나는 천지 분간을 못하는 반편이가 아닌가. 그리하여 손자라도 잘 키워볼까 했더니 죽고 도망가고 남은 거라곤 오직 이런 것 하나 뿐이다.

이런 계집아이 하나, 고작 호통 몇 번에 바르르 떨며 울먹이는 계집아이 하나.

왜 이것만 남았지? 그렇게 많았는데 대체 왜?

그는 가슴을 움켜쥐며 비명 지르듯 소리질렀다.

“나가!”

“물러갑니다. 보중하소서.”

소녀는 무릎을 꿇고는 침실을 나갔다. 카펫에 얼룩 한 점이 남았다. 정부는 우물쭈물하며 종이를 주워다가 침대 옆 탁상에 두었다. 황제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다시 해왔습니다. 폐하.”

다시는 오지 않을 줄 알았건만, 소녀는 일주일 만에 다시 찾아와 무릎을 꿇었다. 이번에는 사라판이 아니라 초상화를 그릴 때나 입는 정복을 입고 있었다. 어깨부터 허리까지 가로지르는 붉은 어깨띠를 매고, 성 소피야 훈장을 달았다. 금빛 머리에 다이아몬드가 가득 박힌 관을 쓰고 희뿌연 베일을 썼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느냐?”

“아닙니다.”

“허면?”

“알렉산드르에게는 시키셨잖습니까.”

황제는 그 단어를 들은 순간 옆에 있던 주석잔을 던져 던졌다. 맞으면 이마가 깨질 만큼 무거웠으나, 일부러 빗나가게 던졌으므로 허공을 스쳐 저 멀리 떨어졌다. 유난히도 흰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목부터 어깨까지 잘게 떨렸다. 손을 맞잡고 꼭 힘을 주었다. 손톱이 희게 보일 지경이었다. 황제는 그 반응이 폭력에 대한 과민반응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는 그리 섬세한 사람이 못 되었다.

“다시 말해보거라.”

“폐하. 기회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다행히 도망친 죄인의 이름이 다시 나오는 일은 없었다. 대신 더욱 발칙한 말이 나왔다.

“네가 뭔데?”

“…….”

“너는 짐이 아니라 네 어미를 찾아가야지.”

“…….”

“그리 반반하니 시집갈 곳 찾기는 용이할 게다.”

부러 천박한 어휘를 골랐다. 그러나 계집아이는 또다시 울면서 뛰쳐나가는 대신 덤덤한 표정을 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안 가고 무얼 하느냐?”

“한 번 훑어라도 보아주십시오, 폐하.”

“내가 그런 시간을 쓸 가치가 네게 있단 말이냐?”

“저는 현재 유일한 코시카 여대공입니다, 폐하.”

엄밀히 따지자면, 유폐되어 있는 폐주의 여동생 두 명 역시 여대공이었으므로 그 말은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나이 어린 손녀와 말싸움을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이반 3세는 다른 것을 집어 던지는 대신 가만히 들었다. 날카로운 눈매가 천천히 아이를 관찰했다.

“저는 안나 여제 폐하의 증손녀이며, 폐하와 소피야 황후 폐하의 손녀이며, 파블 대공 전하와 옐레나 여대공 전하의 딸입니다. 제 자격은 키예나의 가장 짙은 푸른 피, 그것 하나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으로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말이 나왔다. 소녀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눈을 내리깔고 기다렸다.

머리카락은 레몬색, 눈은 남부 로렌의 레몬색. 죽은 손자의 환생인 양 닮은 아이.

고얀 것.

그는 손짓했다. 정부가 그의 손에 서류를 들려주었다. 필체는 여전히 어린애 같았다. 삐뚤빼뚤한 글씨를 보니 머리가 다 지끈거렸지만 이반 3세는 참았다.

이번에는 그래도 발전이 있었다. 제목은 크게 쓰고, 내용은 작게 쓰는 정도의 성의를 보였다. 물론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엉망인 양식은 여전했다.

“여전히 종이 낭비구나.”

“가르쳐주시면, 고쳐오겠습니다.”

“내가 그럴 시간이 있다 여기느냐?”

그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나가서 다시 생각해오거라.”

‘다시’라는 그 말에 소녀는 그 자리에 다시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아이가 나간 뒤 황제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두통이 도지는 것 같았다.

“폐하, 괜찮으시온지요?”

정부가 나긋한 목소리로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정욕은 조금도 솟구치지 않았다. 그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가서 예가체프 공을 찾아 짐이 좀 보잔다고 전해라.”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폐주는 안나 여제(아롈의 증조모)의 사촌남동생입니다. 안나 여제는 사촌을 죽이고, 그 누나들을 유폐하고 황위에 올랐어요. 
P.S.2. 제 목표는 이번 겨울에 퇴고 다 끝내고 완결내는 건데요... 저 2017년은 정말정말 바쁠 예정이라 겨울 밀리고 여름도 밀리면 뒤가 없습니다...ㅠ 응원해주세요...
P.S.3. 궁금하신 분이 계실지도 몰라서 주요 수정 예정인 부분을 적어둡니다. 안 읽으셔도 됩니다. 퇴고 다 끝나면 그 부분에 관해서 수정된 부분 올려드릴게요. 

1. 예브게니아 카나예바의 성씨가 다른 것으로 수정됩니다. 아무래도 유명 리듬체조 선수와 퍼스트네임과 라스트네임이 둘 다 겹치는 게 좀 걸리네요. 좋은 끝을 맞는 인물도 아니고요. 
2. 폐주 관련 설정 오류가 수정됩니다. 그 누나들을 자매랬다가 여동생이랬다 딸이랬다 한 부분이 있는데 누나가 맞아요.
3. 벨타 관련해서 정치적으로 모호하게 묘사됐던 부분의 묘사가 구체적으로 추가되고, 설정 오류가 수정됩니다. (필리프-미셸, 필리프-황제, 황제-황후 등의 묘사)
4. 미네트의 배신 관련해서 구체적인 장면이 추가됩니다.
5. 크리스틴의 심리 묘사가 다소 ​추​가​/​수​정​/​삭​제​됩​니​다​.​
6. 마녀, 성교회, 정교회, 마법사, 용에 대한 역사 관련 설정 오류가 수정됩니다.

위의 여섯 가지는 퇴고할 때 특히 신경쓸 부분이에요. 그리고 아래는 확정이 아니라 아직 생각 중인 부분입니다.

1. 마리야-아롈의 관계성에 대한 외전이 추가되거나 에피소드가 추가될 수 있습니다.
2. 앙투안-아롈의 관계성에 영향을 주는 에피소드가 신설될 수 있습니다. 
3. 앤이 겪은 일에 대한 묘사가 추가되거나, 관련 사건의 방향성이 바뀔 수 있습니다.
4. 세시안-아롈이 초반에 썸타는 부분이 추가될 수 있습니다. 아롈이 조금 시간을 두고 반하는 방향으로요.
5. 대회의 관련 구체적인 정치적 싸움이나 묘사가 추가될 수 있습니다.

와, 정리해놓으니 속이 다 시원하네요. 물론 제 손이 이걸 다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노력할게요. 항상 부족한 부분이 너무 잘 보여서 괴로웠습니다 (mm 이걸 다 고쳐도 또 부족한 부분이 들어오겠지만 이 김에 조금이라도 더 나은 글 쓰고 싶네요!

그럼 내일 혹은 모레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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