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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외전. 주종 (1)


 키예프 성의 공주님으로 군림하던 예브게니아에게 있어서 옐레나 파블로브나라는 소녀는 움직이는 책상이나 의자 같은 존재였다.

어린 키예프 공, 예브게니아의 주인, 황제의 손녀.

그 많은 칭호와 이름들이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새하얗기만 한 동갑의 어린 아이는 성에 붙어 오랫동안 떠도는 유령처럼 존재감이 없었다.

옐레나는 아침에는 도서관에 처박혀 책을 읽고 있다가, 한낮이 되면 정원 어딘가에 앉아 하염없이 앉아 있다가, 저녁이 되면 어디론가 사라졌다. 하루 종일 말을 한 마디는 하는지 의심스러웠다.

그 아이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도 예브게니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마법사는 동화책에 나오는 매부리코의 바바예가 같은 것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옐레나를 찾아가 금빛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양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옐레나가 짜증스레 눈을 떴다. 예브게니아는 다짜고짜 물었다.

“너, 마법사야?”

“난 옐레나 파블로브나야.”

“마법사냐고, 멍청아.”

그녀는 성의 하인들에게 욕을 몇 마디 얻어 배우는 데에 심취했다. 예브게니아를 손바닥 안의 진주처럼 애지중지하는 어머니, 카나예바 백작 부인이 알면 기함할 일이었지만 언제나 금지된 일이 재미있는 법이었다.

“그렇대.”

“그럼 증명해봐!”

이 말은 외지에서 온 사내아이에게 배운 말이었다. 그 사내아이는 외지 어른들로부터 배운 ‘똑똑해 보이는’ 말들을 곧잘 읊어댔다. 그리고 그게 멋있어보였다.

풋사과 같은 눈이 허공을 향했다. 예브게니아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파란 하늘 위로 흰 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 구름이 한순간 흩어지더니 예쁘게 모여 글자를 이루었다.

응(да).

어린 아이는 대체로 머리가 크다. 예브게니아는 입을 헤 벌리고 구름을 쳐다보다가 그만 무게중심을 잃고 뒤로 자빠졌다. 두피가 찢어지고 머리에 큰 혹이 났다.

예브게니아는 그 날 옐레나가 옷을 갈아입는 시중을 받던 중에 어머니에게 피멍이 들도록 꼬집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정교회 신부의 보고서를 어머니가 빼돌린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키예프 성의 유일한 성직자인 늙은 신부는 어린 키예프 공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몇 번이나 황도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리고 그 보고서는 황도를 밟기는커녕 채 키예프 성의 성문도 통과하지 못하고 어머니의 손에 불태워졌다.

예브게니아는 그녀를 세상처럼 사랑하는 어머니의 팔에 매달려 흰 봉투가 소리 없이 타오르고, 붉은 밀랍이 불 속에서 녹아내리는 광경을 지켜보곤 했다.

카나예바 부인은 불가에 앉아 딸의 짙은 고동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몇 번이고 속삭였다.

-모두 네 것이 될 거란다, 네 것이야, 아가야.

-엄마가 그렇게 만들어줄게.

예브게니아는 아직 어렸고,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작은 머리로 이해하고 생각할 깜냥이 전혀 없었다.

기실 그녀는 자신이 ‘유복녀’라는 사실이, 어머니에게는 남편의 상실이라는 사실조차 이해할 지능이 아직 발달되지 않은 상태였다. 예브게니아가 충분히 멍청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단지 정상적인 아이로서 자라는 과정의 문제였다. 그녀는 그 때 자신의 눈으로 보는 세상과 어머니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다를 수 있다는 걸 간신히 깨달은 나이였다.

그래서 예브게니아는 카나예바 부인이 성인으로서 명료한 제정신과 판단력을 유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잔혹한 진실로부터 자유로웠다. 그저 어머니가 예브게니아를 사랑하는 만큼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렇다. 모녀는 서로를 사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분주해졌다.

그녀는 예브게니아를 꼭 끌어안고는 발을 동동 굴렀다. 생각보다 너무 빨라, 어쩌지, 하지만 곧 온다고 했는데. 이런 의미 없는 말들이 허공을 가르는 동안 예브게니아는 간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키예프는 북쪽이고, 근처에 항구가 없었으므로 설탕 등의 사치품은 육로로만 옮겨졌다. 따라서 값은 어마어마했고, 돈이 있다고 해도 구하기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키예프에서 구할 수 있는 단 것은 굉장한 날씨를 뚫고 사는 벌들이 내놓는 꿀 정도였다. 그러나 그 야생 벌들은 늦가을에나 꿀을 내놓았으므로 내내 아껴 먹어야 했다.

예브게니아는 어머니가 정성껏 수놓아준 옷을 입은 채 머리에 리본을 달아달라고 칭얼거렸다. 짙은 밤색 머리를 가늘게 땋아서 붉은색 리본을 묶자 그녀는 만족해서 웃었다.

어머니가 가진 수은 거울에 몇 번이나 얼굴을 비추며 애교를 부리고 있는데 손님이 찾아왔다.

그 나이든 신부였다.

어머니는 하인을 시켜 예브게니아를 침실에 데려다주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복도를 걷다가 다시 돌아갔다. 하인은 감히 유모의 딸인 예브게니아를 말리지 못했다.

침실 문 앞에 서자 격렬한 말다툼 소리가 들렸다.

-주님의 이름으로. 유모님께서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하셨는지 아십니까! 감히 보고서를 빼돌리시다니요!

-맹세코 그런 적이 없건만 신의 충실한 종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이 늙은이의 눈이 흐려졌다고는 해도 제가 쓴 편지조차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닙니다, 백작 부인!

그리고 다시 드문드문 소리가 들렸다. 황도, 직접, 벌을 면치 못할 것, 목숨 운운하는 맥락 알 수 없는 말들이 잔뜩 들렸다. 예브게니아는 잘 들리지 않아 문에 바짝 귀를 가져다댔다.

무언가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문이 휙 열렸다.

예브게니아는 문에 떠밀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머, 내 사랑하는 제냐. 무슨 일이니, 가서 자야지.

어머니는 다정하게 웃었다.

-잠을 푹 자야 예뻐지지.

-잠이 안 와요.

-이 엄마가 있으니까 잘 잘 수 있을 거란다.

카나예바 부인은 예브게니아를 안아서 침실에 데려다주고는 머리를 풀고 옷을 갈아입었다. 같은 침대에 누워 품에 딸을 끌어안고 끊임없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오늘 밤만 지나면 모두 다 잘 될 거란다, 내 사랑하는 아가야.

모정 담긴 속삭임을 자장가 삼아 금세 잠든 지 얼마나 지났을까. 성의 하인이 예브게니아를 깨웠다. 불이 났다고 했다. 옆에 어머니가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그녀는 뺨에 검뎅을 묻히고 정신없이 성을 빠져나왔다.

‘성’이라고는 해도 키예프는 오래된 곳이었다. 최신의 건축 기술 등이 없던 시절 지어진 성은 전부 돌로 올리지도 않았고, 구조가 정밀하거나 높지도 않았다. 1층은 돌로 쌓았으나 그 위층은 중요한 토대만을 돌로 올리고 나머지는 나무로 메꾸었다.

예브게니아가 성에서 뛰쳐나온 직후 성은 화염에 휩싸였다. 뛰쳐나온 하인들이며 구경 나온 마을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엄마, 엄마.

어린 소녀는 무서워서 엄마를 찾으며 엉엉 울었다. 카나예바 부인, 유모를 두려워하는 하녀들이 달라붙어 소녀를 달래려 애썼다. 울음이 그치질 않았다. 예브게니아가 목이 쉬도록 울 때까지 어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숯은 딸을 찾을 수 없다.

사랑한다고 입 맞출 수도 없다.

어머니는 옐레나의 침실이었던 어느 부분에서 숯으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신부(神父)가 어머니의 침실에서 숯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은 예브게니아에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세상이었던 끔찍한 무언가를 두고 예브게니아는 잔뜩 질렸다. 그럴 리 없어. 우리 엄마일 리가 없어!

날카로운 비명이 하늘로 치솟았다. 고용인들과 마을 사람들은 묵묵히 어린 성주의 시체를 찾아 성의 잔해를 뒤졌다. 다 타서 부스러진 시커먼 대들보를 치우고, 금속 상자를 몰래 가져가 그 안에서 녹아내려 덩어리가 된 금덩어리와 은덩어리를 훔치기도 했다.

성에서 옐레나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 살아있는 옐레나가 마을 밖에서 아장아장 걸어왔다.

얼굴에 눈물자국이 가득했지만 예브게니아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단지 신의 계시 같은 어머니의 독백만이 그녀를 지배했다.

-다 그 애 때문이야.

어머니는 항상 말했다.

-다, 다 걔 때문이라고!

어릴 적 항상 듣는 말은 세뇌에 가깝게 뇌리에 박히기 마련이었다. 단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던 말들, 그저 새 옷과 단 것과 모든 즐거운 것들에 밀려 귓등으로나 듣던 원망이 영혼 어느 곳에서 스며 나와 귀가 멍멍하도록 몸을 울렸다.

다 너 때문이야!

그래서 예브게니아는 어머니의 시체를 앞에 두고 옐레나의 뺨을 후려갈겼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정 즈음에 한 편 더 써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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