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주종 (2)
네 탓이야, 전부 네 탓이야.
엄마를 돌려내. 살려내. 우리 엄마를 살려내란 말이야!
예브게니아가 발악을 하는 동안 옐레나는 손길에 몸을 맡기고 그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창백한 피부에 혈색이 사라지고 입술이 파랗게 변했다.
황도에서 옐레나를 데리러 온 군인이 도착한 것은 두 아이가 모두 혼절한 다음의 일이었다.
장교는 가슴을 가로질러 파란 어깨띠를 매고, 반짝이는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그 장교는 옐레나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겨우 허벅지에도 닿지 않는 키의 아이에게 쩔쩔맸다.
유모인 백작 부인이 죽고, 신부가 죽었다. 키예프 성에는 장교를 접대하고 황제의 손녀를 시중들만한 귀족 인력이 예브게니아밖에 남지 않았다. 때문에 예브게니아는 그 모든 장면을 옆에서 바라보면서 서 있었다. 본능이 말했다. 옐레나가 명령하면 남자는 예브게니아를 때릴 것이다. 저렇게 키가 크고 큼직하게 생긴 남자, 맞으면 머리통이 터질지도 몰라. 소녀는 생각했다.
-아마 두 달 정도는 걸릴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아직 어리시니 속도를 늦추어야 합니다. 마차를 가져왔으니 오르시면 됩니다.
-알았어. 그런데 데려갈 사람이 있어.
-누구입니까?
-저 애.
옐레나가 예브게니아를 가리켰다. 예브게니아는 놀라서 허리를 바짝 폈다. 장교의 눈이 그녀를 천천히 훑었다.
-누구입니까?
-이 애가 내 시녀야.
예브게니아는 경악했다.
-데려갈 거야.
-전하의 뜻대로 하십시오.
다음 날 예브게니아는 옐레나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왜소한 체격의 창백한 어린아이는 멀미를 참으려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예브게니아.”
“왜. 아니, 예, 저, 전하.”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갔다. 예브게니아는 겁을 집어먹었다. 옐레나는 내내 예브게니아와 어머니의 명목상의 주인이었다. 후광도 뒷배도 없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편을 들어 시녀 하나쯤 때려줄 ‘어른’이 있었다.
“네 말이 맞아.”
목소리가 쉬어있었다. 높고 맑던 목소리가 늪의 괴물처럼 끽끽거렸다.
“뭘? 뭘요.”
“다 내 탓이야.”
폭신한 모피를 몸에 감고 있는데도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옐레나는 예브게니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머리카락도, 얼굴도 흰데다 홍채도 색이 옅어 꼭 소녀 유령처럼 보였다.
“그러니 다시는 쓰지 않을 거야.”
예브게니아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주인은 홀로 다짐하듯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다시는 마법을 쓰지 않을 거야.”
그러면 뭘 한단 말인가? 우리 엄마는 이미 죽어버렸는데.
해바라기와 독서밖에는 할 줄 모르던 어린아이가 감히 예브게니아를 구했다. 예브게니아는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원망했다.
갓 태어난 아기오리처럼 알렉산드르를 종종 따라다니는 옐레나를 따라다니는 동안 파문처럼 증오가 커졌다. 우리 엄마는 이제 없는데, 왜 ‘전하’의 곁에는 오빠도 생기고, 부모님도 생기고, 할아버지도 생기나요?
할머니인 카나예바 부인이 와서 예브게니아를 데려가겠다고 청했다. 그러나 예브게니아는 발을 구르며 고집을 부렸다. 아롈의 곁에 있겠다고 했다. 예브게니아가 제아무리 백작의 딸이라곤 해도 시녀로 일하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그녀가 고집을 부리자 옐레나는 말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더니 계속 곁에 있으라고 허락했다.
‘허락’이었다. 예브게니아는 한층 비참해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현실은 예브게니아를 홀로 비참 속에 가라앉도록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배울 것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황실에서 그녀가 모셔야 할 높은 분들의 이름이나 지위부터 시작해서 귀족의 딸로서 갖출 기본 소양들이며 ‘주인’에게 공손하게 대하는 시중 일까지.
그리 바쁘게 삼 년을 보냈을 즈음 알렉산드르 대공이 도망쳤다.
옐레나는 어미를 잃은 아기새처럼 방황했다. 채 여물지도 않은 날개를 파닥이며 빽빽 울었다.
사샤, 사샤.
놀랍게도 행복했다. 언뜻 잊어가던 증오가 다시 되살아났다.
-줄곧 기도했어요. 전하께서도 불행해지게 해달라고요. 신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셨나봐요.
그 말을 하는 동안 기쁨에 퐁당 빠져 폐까지 절여지는 것 같았다.
잠시의 행복은 예브게니아를 지옥으로 떨어뜨렸다.
옐레나 대공비-아롈의 어머니는 불경을 사유로 들어 예브게니아를 사흘 동안 굶게 했다. 채찍으로 치지 않은 것은 그녀가 백작의 딸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키예프에서는 공주나 여왕과 다름없는 지위였으나, 이 코시카 황궁에서 ‘백작의 딸’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기계장치의 부품이나 다름없었다. 지나가는 아무 시녀나 붙잡아도 그 가문이 백작보다 낮은 이가 없었다. 대공비의 관용은 예브게니아의 지위가 아니라 나이 때문에 베풀어진 것이었다.
어린 아이는 상대적으로 기아(飢餓)에 예민하다. 배에서는 이제 꼬르륵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예브게니아는 침대에 웅크리고 누운 채 이를 악물었다. 배가 고팠다. 빵을 먹고 싶었다.
엄마가 보고 싶어. 엄마가 날 봤으면 이렇게 놔두지 않았을 텐데.
아롈에게 대들 때에는 굶기는 것으로 되겠느냐고 당당하게 웃었지만, 굶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예브게니아는 하도 굶어 목구멍으로 치미는 신물을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는 항상 황도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 했던 황도에 홀로 돌아온 지금 예브게니아는 불행하기만 했다.
“카나예바 양, 계신가요?”
그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시녀, 알렉산드라였다.
“네.”
“식사를 가져왔어요.”
예브게니아는 대체로 응석받이로 키워진 아이들이 그렇듯 오만한 편이었다. 그러나 사흘을 꼬박 굶은 다음에도 자존심을 세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악다귀처럼 음식에 달려들었다. 허겁지겁 수프를 들이키고 빵을 뜯었다.
허기가 간신히 진정되고 손떨림이 멎자 예브게니아는 고개를 들었다. 알렉산드라는 눈썹을 찌푸리고는 수건을 건네주었다. 여덟 살 아이라곤 해도 부끄러움 정도는 알았다. 얼굴이 벌게졌다.
“카나예바 양,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싫어요.”
그 때 예브게니아는 ‘주코프 백작의 삼녀인 알렉산드라가 하녀도 아닌데 직접 식사를 가져다 준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는 사실을 추론할 능력이 없었다.
“정말요?”
“싫다고 했잖아요!”
앙칼진 고양이처럼 방어적인 그녀를 보고 알렉산드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알렉산드라는 예브게니아에게 한 마디 충고 정도는 해줄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렉산드라 역시 귀족의 딸이었고 오지랖이 넓은 성격은 아니었다.굶는 아이를 잠시 가엾게 여겼지만 충고를 해봐야 아무런 이득도 없는 귀찮은 어린 아이를 차근차근 달래어 충고를 해줄 정도의 무골호인은 아니었다. 예브게니아가 굶든, 그 뒤에 채찍질을 당하든, 불경으로 사형을 당하든 알렉산드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으므로.
“그래요, 쉬어요.”
그래서 알렉산드라는 예브게니아에게 그녀의 ‘건방짐’이라든가 ‘주제 파악을 못 함’ 등에 대해 아무런 지적도 해주지 않았고, 예브게니아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주인을 원망했다.
그리고 아롈은 예브게니아에게 다시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한참이나 자란 다음의 일이었다.
“카나예바 양, 카나예바 양.”
예브게니아 카나예바는 선잠에서 깨어났다. 예브게니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창밖이 어두웠다. 땀에 흠뻑 젖은 몸이 무거웠다. 팔을 들어 땀을 훔치자 손목부터 어깨까지 시큰거렸다.
달거리에 몸살이 겹쳤다. 예브게니아는 발육이 좋은 편이었고 월경도 열두 살에 시작했다. 그녀는 죽은 어머니처럼 유난히 월경통이 심한 편이기도 했다.
몸이 좋지 않아 낮잠을 잔 기억이 났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던가.
“카나예바 양?”
그녀를 깨운 것은 솔다토프 가문의 딸인 타티아나였다. 그녀는 알렉산드라 주코바가 시집간 뒤 아롈,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의 시녀로 새로 들어왔다. 타티아나는 예브게니아와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황궁에 독방을 내줄 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황족과 시중인의 방에 차이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여럿이 한 침실을 사용하게 하는 것은 시중인과 피시중인의 지위를 더욱 분명하게 하는 제도 중 하나였다.
“무슨 일인가요, 솔다토바 양?”
“오늘 당직이시죠?”
“예, 예, 그래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대공의 시녀들에게 당직이란 별 의미가 없었다. 아롈-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은 누군가 잠자리를 지키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으므로. 시녀들은 당직이라는 이름만을 가진 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침실에서 잠을 잤다.
그러나 이반 3세가 낙마한 이후로는 사정이 바뀌었다. 여대공은 툭하면 밤을 지새웠고 시녀들은 그녀가 자리에 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예브게니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벌써 시간이 되었나요?”
“그렇답니다.”
“준비하지요. 깨워주셔서 감사해요.”
“천만에요. 그런데 조심하세요. 지금 전하께서는 취침 중이세요.”
“낮잠을 주무시는 건가요?”
“그것보단 혼절에 가까우신 것 같던데요.”
사람은 수면을 취해야 살 수 있다. 그 아무리 짙푸르고 고귀한 피가 흐르는 황족이라 해도 그 사실은 변함없었다. 사흘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하면 기절하는 것도 당연하다.
예브게니아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납득했다.
“조심해야겠군요.”
요새 아롈은 극도로 예민했다. 누군가 기척을 내면 아무리 깊이 잠들었다 해도 금세 깨어나 신경질을 내곤 했다.
“지금이 몇 시지요?”
“아홉 시예요.”
“알겠어요. 준비하고 가지요.”
타티아나는 웃으며 베일을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반대로 예브게니아는 하녀를 불러 분주하게 옷을 입었다. 탐스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늘어졌다. 북부의 아가씨들은 결혼 전에는 머리를 자르지 않는다. 시중을 들기에 편한 옷을 걸친 그녀는 부엌을 거친 다음 아롈의 방으로 향했다.
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누구냐.”
찬물처럼 맑은 목소리였다. 예브게니아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어릴 적의 건방짐은 간 곳 없이 예의바르고 공손한 동작이었다.
“카나예바입니다, 여대공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