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봄의 성 (2)
목욕을 마친 세시안은 곧바로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손님용 침실에 들어와 안쪽에서 문을 잠갔다. 촛대를 내려놓고 커튼을 치자 금세 방 안이 어두워졌다. 분위기가 잡히자, 매번 드는 감상적인 생각이 그를 덮쳤다.
이건 일종의 기만이다.
그의 군주에 대한 기만일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군주에 대한 기만이기도 하다. 주석잔에 물을 따르고 소금을 푸는 순간까지 그는 선명하게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이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는 아내의 시녀인 앤을 어르고 겁박하여 빼돌린 작은 보석을 물속에 빠뜨렸다. 동그란 보석은 은빛 줄을 매달고 금세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촛불 빛이 일렁여 꼭 용암 속에서 굳어진 듯 보였다.
이 작은 보석이 지금 세계를 뒤집어엎고 있었다. 코시카와 웨데나의 전쟁을 초래했으며, 중부 작센으로 하여금 해군 순시선을 증강하게 했고, 그로 인해 작센은 중부에서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서부는 다소 잠잠했지만 동부 카스티야에서도 급히 새 배를 한 척 건조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로렌의 재정은 그나마 대회의가 끝난 뒤에 소문이 퍼져 살아남았으나, 올 여름의 대회의에서 해군을 증강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터였다.
드넓은 바다로부터 상선들이 안전해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저 상인들이 안심하도록 눈에 보이는 행동이 필요할 뿐이었다. 고작 실익 없는 요식행위일 뿐이지만 거기에 소모되는 돈은 요식이 아니었다. 고급 함선이 늘어나면 그만큼 군인과 장교를 많이 뽑아야 했고 그 유지비와 월급은 전부 국가 예산이었다.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보석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부옇게 내려앉은 먼지가 더 동적일 지경이었다.
앤의 말에 따르면 소금물을 타서 그 안에 넣어주면 바로 나온다고 했는데. 물과 소금의 비율도 정확히 맞추었다. 그러니 답은 셋 중 하나다. 이 보석이 가짜이거나, 앤이 거짓말을 했거나, 아니면 일부러 대화를 거부하고 있거나.
“안 들리십니까?”
세시안은 턱을 괴었다.
“릴레벨트.”
[악!]
높은 비명이 울렸다. 굉장한 반응이었다. 은빛 목걸이에서 보석이 데굴데굴 굴러 나오더니 손바닥만 한 짐승으로 변했다.
다시 보아도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옛 페란트 시대에는 암암리에 마법을 쓰는 자들이 흔했으며 중요한 지형마다 용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페란트가 망한 지도 수천 년이 지났다. 세시안은 ‘마지막 용’을 해치웠다고 알려진 자들의 후손이었다.
[뭐야! 악.]
용은 앞발로 짐작되는 넓적한 지느러미로 머리를 잡으며 괴로워했다. 오페라 극장의 가수처럼 아름다운 목소리가 높게 부서졌다.
로렌의 건국 설화는 그 과정을 제법 자세히 전하고 있었다. 올랑 지방의 왕인 미남왕 필리프는 어느 날 천사의 계시를 받았다. 세상을 도탄에 빠트리는 용을 처단하라는 계시였다. 그는 천사에게 신의 증표로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새파란 장미를 받았다. 그 성물을 구심점으로 하여 근처 여섯 지방의 군주가 모여 용을 무찌르고 나라를 세웠다. 성황청은 계시를 받은 왕을 페란트 제국에서 이어진 인간의 황제로 인정했다. 필리프는 다른 군주 여섯을 대공으로 서임하고 7인의 맹세를 하여 로렌을 만들었다.
그 자세한 설화 속에 최후의 용이라는 별명으로 더 널리 알려진 크루아흐와 ‘대화’를 했다는 구절은 없었다.
때문에 세시안은 지금까지 막연히 용을 울부짖는 짐승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아니, 기실 자세히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용이 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 무어가 중요하단 말인가? 어차피 멸종된 짐승일 것을.
그러나 생생히 살아있는 이 용은 말을 할 줄 알았다. 그것도 제법 또렷하게.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했지, 이 멍청한 왕자!]
"왕자가 아니라 세르입니다만, 벨타."
코시카 체사레비치가 대공위를 갖는 것과 달리 로렌의 세르는 '무슈'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리고 한 번 부를 때 나오지 않았잖습니까."
[그래서 이름을 불렀다고!]
"알고 있는데 부르지 못할 것도 없지요."
세시안은 단정한 얼굴에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을 머금었다.
"그보다 피라도 좀 드릴까요?"
[됐어. 입에도 대고 싶지 않아.]
"저번에는 잘만 드셨잖습니까."
[먹기 싫어졌어.]
먼저 요구해서 빈혈이 생길 것처럼 빨아먹을 때는 언제고. 이 용은 변덕이 심했다. 그녀는 달콤한 목소리로 콧노래를 부르며 관심 없는 척 배를 까뒤집었다. 파란 비늘과 선명하게 대조되는 배가 희었다.
"그래서, 대답해주실 생각 있습니까?"
[없다면 어쩔 거니?]
"생각이 들도록 만들어드리지요. 이번에는 무엇을 원하지요?"
[죽어 버려.]
"싫은데요."
유치한 대화였다. 그러나 유치하게 나오는 이에게는 유치하게 대하는 것이 제일이었다.
"전 오래 살고 싶어서요."
그는 여느 사람들이 그렇듯 숨쉬듯 삶을 소모해왔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아주 절실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살아있는 것이 지극히 당연했고, 언제까지나 살아있으리라고 믿는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기 전까지는.
살고 싶었다. 함께, 그리고 오래, 행복하게.
그가 지독한 기만의 대가를 모두 알면서도 위험을 무릅쓴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럼 꺼지든가.]
아롈이라면 눈살을 찌푸리고 윽박지르거나 입술을 꾹 깨물고 노려보았을지도 모르지만, 세시안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세상에는 그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는 일이 드물다는 것을, 그는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얼마 전에 연쇄 살인의 범인이 검거되었습니다. 남자 다섯을 꾀어내어 잔혹한 방식으로 죽였지요. 인간의 법에는 무지하실 테니 알려드리자면 틀림없이 사형입니다."
말하면서도 속으로 쓴웃음이 나왔다. 꼭 포주라도 된 듯 질척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사내새끼한테는 관심 없어.]
"여자입니다. 아주 젊은."
범인은 창녀였다. 화대를 깎아준다고 접근하여, 약을 탄 술을 먹이고 성관계를 하는 도중 상대 남자들을 죽였다. 돈과 옷을 빼앗고 시체를 동물의 사체로 위장하여 인근 도축장에 버렸다. 법대로라면 광장에서 교수형이다.
과연 구미가 당기는지 샛노란 눈에 광채가 돌았다. 다소 거부감이 들었지만, 세시안은 그의 연인이 그러하듯이 욕지기까지 느끼지는 못했다. 그는 결벽과는 거리가 멀었다. 용은 입맛을 쩍쩍 다시더니 입을 크게 벌렸다. 날카로운 이빨이 빽빽하게 차 있는 잇몸이 새빨갰다.
[맛있을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조금 역겨웠다. 세시안은 표정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드리지요."
[뭔데?]
"제가 말씀드리는 곳에 가서, 한 번만 사람들의 눈에 띄어주시면 됩니다."
주의를 돌릴 필요가 있었다. 코시카 여제가 그녀의 딸에게 향하는 주의와 관심을 돌릴 필요가. 대 웨데나 전쟁이 끝났고, 겨울도 지났다. 충분히 무언가를 하기 좋은 시기였다.
물론 그렇게 한다면 해군 증설은 필수적일 테고 그가 계획하고 있던 많은 정책들은 뒤로 미뤄질 것이다. 예산은 언제나 생기는 것이 아니다. 빚의 청산도 당분간 어렵겠지. 그는 그 모든 것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저울에 단다고 해도, 한 사람의 삶이 더 무거웠으므로.
[한 번?]
그래서 그는 표정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딱 한 번입니다."
대체 목욕을 언제까지 하는 거지?
가느다란 손가락이 불만스레 의자 손잡이를 톡톡 쳤다. 아무리 기다려도 연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료하게 허공을 바라보다가, 다 시든 화관을 손끝으로 소중하게 어루만지다가, 또 다시 허공을 보다가, 결국 촛대를 들고 피로에 묵직하게 젖은 몸을 일으켰다. 그가 다른 일을 하고 있을까 불안해서가 아니었다. 서로 떨어져 있어도 그는 아롈을 배신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믿음은 반석처럼 단단했다.
다만 보고 싶었다.
이 성에 오기 위해 지난 겨울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로렌에는 스뱌트키 주간은 없었다. 대신 작게나마 치르는 성탄절이며, 갈레트를 먹는 주현절, 주현절을 시작으로 일주일 간 이어지는 사육제까지 행사가 끊이지 않았고 그 행사를 주최한 것은 당연히도 아롈이었다..
숨 가쁘게 이어지는 일정을 소화한 다음 말 뿐인 사순절을 지나 부활절 축제까지 마친 뒤에야 간신히 얻은 휴가였다.
그런데 기껏 여기까지 와서 떨어져있어야 하다니. 흰 손이 거침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아롈은 숨을 멈추었다.
뱅글뱅글 도는 나선형 계단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런 계단은 아주 옛날 방식이었다. 둥글게 만든 벽은 벽지를 바르지 않아 돌로 만든 벽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 벽을 가리기 위해 벽마다 문장을 짠 태피스트리를 군데군데 걸어두어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구식인 내장(內裝)이 아니었다.
촛불의 불그스름한 빛이 벽에 어렸다. 그리고 방에 켜놓은 조명들 탓에 무시무시하고 둔탁한 그림자가 선명하게 벽에 새겨졌다. 꼭 가슴에 빛을 품은 괴물처럼 생겼다.
입술을 깨물곤 속으로 되뇌었다. 저건 그림자일 뿐이야. 나 자신이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두려웠다.
그림자와 눈싸움을 하듯 문가에 서 있는데 문득 손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림자가 따라 움직였다. 아롈은 소스라치며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는 수치심에 젖어 주먹을 쥐었다. 겨우 그림자 따위에 겁을 집어먹었다. 하지만 발을 내디뎌 계단을 밟을 자신은 없었다.
고작 그림자. 그저 마음을 굳게 먹고 몸을 움직여 나아가면 그 뿐. 저 복도를 뚫고 지나가면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데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망설이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자존심에 생채기가 났다. 사실 냉큼 자리로 돌아가 앉으면 그만이었다. 무료함을 견디며 기다리면 연인이 돌아올 테고, 그럼 웃으며 끌어안으면 된다. 그런데 대체 이게 뭐라고 그저 서서 오도 가도 못한 채 앞을 노려보고 있는 걸까.
초가 촛농을 뚝뚝 흘릴 정도로 서 있는데, 문득 한 문장이 다정한 음색으로 뇌리에 울렸다.
-저는 아렐르가 조금 더 어깨에 힘을 뺐으면 좋겠어요.